<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2>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와 인간 세상을 다시 둘러본 뒤, 사람들이 "더 작아졌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그들은 언제나 차가운 무관심이거나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정신의 부름 앞에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도망치고, 삶의 치열한 고통과 깊은 쾌락을 모두 거부한 채 회색빛의 안도감 속에 숨어 지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주체성을 상실한 채 안전한 중용을 미덕으로 삼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나태함을 가감 없이 폭로합니다.
"차라투스트라를 위해 낼 시간이 우리에게는 아직 없다." 저들이 항변조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를 위해 낼 "시간이 없다"고 할 때 그 시간이란 것이 뭐란 말인가?
군중이 차라투스트라를 회피하며 내놓는 상투적 변명은 "시간이 없다"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시간 부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가르침을 마주할 의지가 없다는 전형적인 근대인의 자기기만에 해당합니다. 그는 "시간이 없다"는 말 자체를 되받아쳐서, "차라투스트라를 위해 낼 시간이 없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그들이 주체적으로 보내고 있다고 믿는 시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입니다. 그들이 "바쁘다"라고 여기는 그 시간 즉, 생업, 사교, 일상의 안락 추구야말로 공허하며, 진리와 대면할 시간이야말로 유일하게 "시간다운 시간"이라는 암시입니다.
저들 가운데는 의욕을 갖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의욕의 대상일 뿐이다. 이들 더러가 진짜다. 그 대부분은 서툰 배우들이고.
차라투스트라는 "wollen"(의욕하다, 능동)과 "gewollt werden"(의욕 된다, 수동)을 문법적으로 대비시킵니다. 소수만이 진정한 의지의 주체이고, 대다수는 자기 의지를 갖지 않은 채 타인의 욕망·기대·슬롯적 요구에 의해 "선택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무언가 열정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진정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의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대한 슬롯적 시스템이나 타인들이 만들어놓은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되고 있을 뿐입니다. 즉, 남이 바라는 바를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서툰 배우들'에 비유합니다. 가면을 쓰고 타인이 써준 대본대로 연기하지만, 그 연기마저 어설프고 주체성이 결여된 가짜 삶이라는 비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앉을 의자를 한가운데다 놓았다. 만족해하는 돼지로부터 만큼이나 죽어가는 검투사로부터 멀리 떨어져." 저들이 능글맞은 웃음으로 내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간치일 뿐이다. 비록 이미 그것이 중용이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의자"는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입장, 태도, 삶의 자세를 은유합니다. "한가운데(die Mitte)"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중용(mesotēs) 전통을 명시적으로 겨냥한 표현입니다. 두 극단 사이의 균형 잡힌 지점을 미덕으로 삼는 윤리학이 그것입니다. 대중은 쾌락에만 찌들어 사는 '만족해하는 돼지'도 아니며, 그렇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치열하게 투쟁하거나 파괴되는 '죽어가는 검투사'도 아닙니다. 그들은 양극단 사이의 안전하고 편안한 중간 지점에 자리를 잡고 이를 '지혜로운 중용'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에게 이것은 진정한 고결한 중용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비겁함과 안일함의 다른 이름(중간치) 일뿐입니다. 열정도 고통도 회피한 채 타협 속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적 태도를 능글맞은 웃음 뒤에 숨겨진 위선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1834년, 오노레 도미에는 《입법부의 배》(Le Ventre législatif)라는 석판화 한 점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화면 속에는 프랑스 하원 의사당의 반원형 의석에 앉은 서른다섯 명의 실존 인물들, 즉 왕당파 각료석의 의원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그들의 몸은 하나같이 비대하고,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으며, 몇몇은 이미 잠들어 있습니다. 표정에는 지루함과 자족감이, 자세에는 어떤 긴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언어유희입니다. 당시 이 의회의 공식 명칭은 "입법부(Corps législatif)", 문자 그대로는 "입법의 몸"이었습니다. 도미에는 이 "몸(corps)"을 "배(ventre)"로 슬쩍 바꾸어놓음으로써, 국가의 이성과 의지가 깃들어야 할 신체를 한낱 식탐과 안일에 잠긴 위장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이는 니체가 "Mittelmäßigkeit"(평범함)와 "Mäßigkeit"(중용)라는 두 단어의 형태적 근친성을 이용해 "중용이라 불리는 것이 실은 평범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폭로했던 바로 그 언어적 전략과 정확히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들은 급진파도 극단적 왕당파도 아닌, 이른바 "중도" 각료석에 자리한 온건 보수파였습니다. 즉 이들은 문자 그대로 "의사당의 한가운데에 자신들의 의자를 놓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미에가 폭로하는 것은 그 중간 자리가 지혜로운 균형의 산물이 아니라, 부와 안락을 지키기 위해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자들의 도피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그림이 발표된 이듬해인 1835년, 정부는 정치적 풍자화 일체를 금지하는 검열법을 통과시켰습니다—진실을 향한 웃음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권력의 옹졸함이, 도미에가 그려낸 그 게으른 웃음 뒤에 무엇이 숨어 있었는지를 스스로 증명한 셈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마주한 "능글맞은 웃음"과, 도미에가 의사당에서 포착한 저 무겁게 감긴 눈꺼풀 사이에는 반세기의 시간과 국경을 넘어선 하나의 동일한 인간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위대함도 몰락도 감당할 수 없어 그 중간에 몸을 누인 채, 스스로를 절제와 지혜의 화신이라 부르는 자들 말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마주한 자의 눈에는, 그 편안한 중간 자리야말로 가장 위태로운 배덕(背德)의 자리로 비칩니다.
다음 콘텐츠는 매주 월요일 무료로 공개되며, 멤버십 구독을 통해 전편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