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라는 조미료

양념게장

잃어버린 기억이 도착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였다. 오후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두 시쯤이었다. 선명도 설정에는 문제가 없는데 모니터가 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타가 늘고, 마우스는 연신 헛손질을 해댔다. 의자에 앉은 내 몸은 조금씩 빳빳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식사 후 마신 커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식곤증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사실 사투라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나의 패배가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였다. 최근 머릿속 장바구니를 비웠던 기억은 없는데, 무엇이 도착했다는 건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집에 있던 아내에게 연락해 택배를 들여놔 달라고 했다. 내게 문자가 온 이상 나와 관련된 물건일 가능성이 높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택배 뜯었다. 안에서 검은색 상자가 나왔다. 크기는 A4 용지 정도였고, 은색 무늬가 어둡게 반짝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뽐내고 있었다. 택배 봉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름도 내 이름, 주소도 우리 집 주소였다. 남의 택배를 잘못 뜯은 것은 아니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 물건인지, 피곤하게 만들 물건인지는 아직 파악할 수 없었다.


상자 뒷면을 돌려보니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범죄 현장을 묘사하는 문장도 적혀 있었다. 다시 앞면을 보았다. 제작사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서 먼지 쌓인 서랍 하나가 삐걱거리며 열렸다. 희미한 기억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급히 스마트폰을 열어 예전에 받았던 메시지들을 뒤졌다. 펀딩 알림, 배송 안내, 결제 내역. 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하나씩 맞아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이건 몇 달 전, 내가 펀딩으로 주문했던 추리 보드게임이었다.


괴상한 택배가 온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보낸 선물이 도착한 것이었다. 문제는 과거의 내가 나와 상의도 없이 일을 저질렀고, 현재의 나는 그 일을 전혀 인수인계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나에게 인수인계를 안 해줄 줄은 몰랐다. 이 택배 사건을 벌인 범인도, 피해자도, 결제자도 나였다.



우리 부부가 결혼식에서 선언한 혼인 서약 1번은 이랬다. 요리는 내가 하고, 설거지는 아내가 한다. 사랑과 헌신, 존중과 배려 같은 단어가 오가야 할 자리에서 우리는 주방 노동 분배를 공식 발표했다. 누가 고기를 썰고, 누가 기름 묻은 칼을 닦을 것인가. 실전적인 조항이었다. 결혼 생활은 사랑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혼인 서약 2번은 조금 더 낭만적이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방탈출과 내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자주 함께 하자는 것.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겠다는 말은 결국 상대가 좋아하는 세계에 기꺼이 끌려가겠다는 뜻이다. 아내는 단서와 자물쇠와 제한 시간이 있는 공간을 좋아했고, 나는 테이블 위에 카드와 말과 규칙이 펼쳐지는 세계를 좋아했다. 이 두 취향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이 바로 방탈출 컨셉의 보드게임이었다. 이 정도면 훌륭한 협상이다.


우리는 종종 그런 게임을 함께했다. 작은 상자 하나를 열어놓고 단서를 뒤지고, 암호를 풀고, 사건의 앞뒤를 맞췄다. 평소 부부 사이에서 의심은 관계를 해치는 위험한 감정이지만, 추리 게임에서는 권장 행동이다. 열렬히 의심할 수 있는 시간이다.



몇 달 전, 한 유명 방탈출 업체에서 보드게임을 만든다는 펀딩 광고을 보았다. 디지털 광고 생태계의 정교한 타겟팅에 감탄하며 나는 기꺼이 그 광고에 응답했다. 큰 고민 없이 펀딩에 참여했다. 아내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깜짝 선물까지는 아니었고, 솔직히 말하면 결제한 뒤 곧장 잊어버렸다. 선물의 주체가 선물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이벤트는 몇 달 뒤 택배 기사님에 의해 완성되었다.


택배를 받아본 평일 퇴근 후에 추리 게임을 시작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추리에는 체력이 필요하다. 단서 하나를 놓고 머리를 굴리고, 알리바이를 따지고, 암호를 풀고, 사건의 앞뒤를 맞춰야 한다. 그런데 퇴근 직후의 나는 이미 회사에서 하루 치 판단력을 대부분 탕진한 상태였다. 그 상태로 범인을 찾겠다고 덤볐다간, 범인은커녕 설명서 글자도 제대로 못 읽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게임은 쌩쌩하고 총명한 상태에서 즐겨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상자를 다시 고이 모셔두었다. 몇 달을 기다려 도착한 게임을 앞에 두고, 며칠을 더 기다리기로 했다.



드디어 주말이 왔다. 우리는 게임 방법을 정독했다. 추리 게임에서 설명서를 대충 읽는 건 위험하다. 범인을 못 잡는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이고, 나중에는 서로를 잡게 된다. "오빠가 아까 그렇게 하자고 했잖아." "아니야 내가 말한 건 그 뜻이 아니었어." 이런 대화가 시작되면 게임 속 사건보다 우리 집 사건이 더 커진다. 우리는 회사에서 중요한 보고서를 검토할 때보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설명서를 살폈다.


게임의 목적은 범죄 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것. 유력한 용의자들 사이에서 진짜 범인을 골라내야 했다. 단서를 수집하고, 증언을 비교하고, 사건의 앞뒤를 맞춰야 했다. 우리는 탐정이 되어 작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자료들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 침대에서 빈둥거리던 부부는 종이 몇 장과 의심스러운 사진 몇 장이 앞에서 태도가 달라졌다.


나는 나름대로 추리를 시작했다.


"내 생각에는 이 사람이 범인 같은데, 동기는 이거야. 그런데 그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거지."


아내가 곧장 물었다.


"근데 그럼 이 증거는 어떻게 된 건데?"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건 모르겠고..."


내 추리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럴듯한 말은 했지만, 정작 증거 하나를 넘지 못했다. 범인을 지목하는 일은 쉬웠다. 문제는 그 사람을 범인답게 만드는 일이었다. 아직 내 추리는 나 자신도 설득하지 못했다.


아내도 본격적으로 추리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왜 이 사람은 그 시간에 거기 있었을까. 왜 저 사람은 진술을 바꿨을까. 이 증거는 누구에게 불리할까. 우리는 제법 진지하게 사건을 파고들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아내의 상상력이 증거의 울타리를 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빠, 봐봐. 이 사람이랑 이 사람이 사실 부부였던 거야."


"잉?"


"근데 남들은 모르게 숨기고 있었던 거지."


"왜 숨겨?"


"왜냐하면 이 여자가 남편 몰래 저 남자를 좋아했던 거야."


"갑자기 불륜이야?"


"그러니까 겉으로는 모르는 사이처럼 행동했지만, 알고 보면 전부 다 얽혀 있었던 거야."


나는 추리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평일 오전 8시 30분 편성 드라마를 집필하고 있었다. 유력 용의자들에게 몰래 품은 금단의 사랑, 말 못 할 과거, 의문의 채무 관계를 부여했다. 아내는 단서에는 나타나지 않은 인간의 욕망을 보고 있었다.


문제는 아내의 이야기가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묘하게 그럴듯했다. 증거가 부족할 뿐, 감정은 풍부했다. 추리는 빈약했지만 서사는 탄탄했다. 범인은 못 잡아도 시청률은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단서를 이해하는 것보다 아내가 새로 만든 세계관을 따라가는 일이 더 어려웠다. 사건의 범인을 찾는 일보다, 이 인물들이 언제 사랑했고 왜 헤어졌으며 누구를 속이고 있는지 파악하는 일이 더 큰 과제가 되었다. 결국 내가 먼저 항복했다.


"우리 조금만 쉬었다 하자. 나 너무 힘들어."


아내는 내 얼굴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내 표정이 꽤 절박해 보였던 모양이다. 범죄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킥킥 거리며 말했다.


"두 시간 쉬어도 돼. 이따 이어 하자."


그 말이 왜 그렇게 고맙던지. 나는 탐정이 되려다 아내가 구성한 세계관에 탈진한 사람이 되어 잠시 소파에 몸을 눕혔다.



잠시 소파에 누워 눈을 감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범인을 찾기 전에 체력을 먼저 찾아야 했다. 게임을 이어가기 전에 밥부터 먹기로 했다.


냉장고에는 보드게임만큼 오래 기다린 것은 아니지만, 그 간절함만큼은 결코 밀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사흘 전 만들어둔 양념게장이었다. 잘 손질한 게를 물과 식초에 잠깐 담가 잡내를 잡았다. 그다음 간장, 고춧가루, 설탕, 식초, 마늘, 생강, 파를 섞어 만든 양념에 게를 버무려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이름만 들으면 어려운 요리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적어놓고 보면 과정은 단순하다.


제대로 익었는지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만 집어 먹고 싶고, 맛이 들었는지 봐야 한다는 핑계로 또 하나를 꺼내고 싶은 마음을 참아가며 숙성의 시간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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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게장을 접시에 넉넉히 담았다. 붉은 양념이 게 껍질 사이사이에 스며 있었다. 고춧가루의 매콤함, 간장의 짭조름함, 설탕의 은근한 단맛, 식초의 산뜻함이 한데 엉켜 있었다.


보드게임에 몰입해 한껏 텐션이 올라 있던 아내는 게장을 보자 더 들떴다. 조금 전까지 용의자들의 비밀 관계를 캐내던 눈빛이 이번에는 게딱지 쪽으로 향했다. 수사 대상이 바뀐 것이다. 이번에는 범인이 아니라 살을 찾아야 했다. 도저히 얌전히 먹을 수 없었다.


나는 접시에 충분히 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게 두 조각 정도를 야무지게 빨아 먹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다야?"


방금 전까지 범죄 사건을 추리하던 사람답게, 접시 위의 게장 총량에도 의혹을 제기했다.


"아직 냉장고에 많아."


그 말을 듣자 아내의 표정이 환해졌다. 사건 해결의 결정적 증거를 발견한 사람 같았다. 아내는 더 이상 접시 단위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예 통을 꺼내왔다.


"게장을 이렇게 마음껏 먹을 수 있다니 너무 좋아."


아내는 감탄사를 내뱉고, 곧바로 게딱지를 입에 가져갔다. 감탄사와 게딱지가 번갈아 나왔다. 말하다 먹고, 먹다 감탄하고, 감탄하다 다시 집었다.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가격표를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한 조각을 집을 때마다 마음속 계산기가 켜지는 식당 게장이 아니었다. 비싸서 밖에서는 감히 마음껏 먹지 못하던 음식을 우리 집 식탁 위에 넉넉히 올려두고 절제 없이 먹었다.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양념이 묻은 밥그릇은 빠르게 비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식탁 여기저기 떨어진 양념의 흔적만큼이나, 머릿속에는 여전히 용의자들의 알리바이가 어지럽게 떠다녔다. 이제 다시 수사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밥심을 얻은 탐정은 조금 더 진지해졌다. 다만 한 가지 조치가 필요했다. 끝을 모르고 치솟던 아내의 상상력에 잠시 안전벨트를 채워야 했다.


"이번에는 증거 안에 있는 것만 보자."


우리는 다시 단서를 하나씩 맞춰갔다. 이 사람이 그 시간에 어디 있었는지, 이 증언은 왜 앞뒤가 맞지 않는지, 이 물건은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한지 차근차근 따졌다. 그렇게 조금씩 사건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범인은 이 사람 아니야?"


"맞아. 그리고 이 증거가 그걸 설명해주네."


"아까 그 사람과 그 사람은 부부가 아니고?"


"아니야."


"아쉽네."


아내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현실적인 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냈다. 범인을 지목하고, 사건의 앞뒤를 정리하고, 우리가 찾아낸 단서들을 하나씩 맞춰보았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우리는 정확히 범인을 골라냈고, 얽힌 상황도 대부분 맞혔다. 사건이 아침드라마로 확장되어 가던 것을 감안하면, 우리의 수사는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이대로 끝났어도 충분했다. 이미 몇 달을 기다린 값어치는 충분히 했다. 그런데 게임에는 한 번 더 반전이 숨어 있었다. 사건이 끝난 뒤 이어지는 숨겨진 이야기가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범인을 잡았다고 끝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아낸 사건 뒤편에 또 다른 사연이 있었고, 그 이야기를 따라가며 우리는 조금 더 탐정이 될 수 있었다.


몇 달을 기다린 보드게임은 우리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주었고, 사흘을 기다린 양념게장은 그 이야기에 힘을 보태주었다.


기다림은 그 자체로 아무 맛도 없는데, 어디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풍미를 낸다. 게임에 들어가면 기대가 되고, 음식에 들어가면 숙성이 되고, 사람 사이에 들어가면 추억이 된다.


그날 우리 집 작은 테이블 위에는 범죄 사건의 단서와 양념게장의 흔적이 함께 남아 있었다. 한쪽에는 추리의 여운이, 다른 한쪽에는 게딱지의 잔해가 있었다.


게임도 음식도, 기다림은 특별한 조미료다.


아내의 후기

양념게장
★4.9점
제 인생에 양념게장을 원 없이 먹어보는 날이 오다니, 정말 벅찼습니다.
먹는 내내 너무 행복하다하고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르겠어요.
식당에 가면 살은 통통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고 양도 배부르게 먹기에는 늘 아쉬웠거든요.
특히 특제 양념 소스가 맛있어서 흰쌀밥에도 슥슥 비벼 먹었더니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오늘은 양념게장 덕분에 정말 행복한 날이었어요.
다만 0.1점은 게살이 조금 더 통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감점합니다.
신랑님의 요리 발전 가능성을 고려한 애정 어린 감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