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
2025년 12월 2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한 사람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75년 전에 총살당한 사람이었다.
이름은 이관술. 1946년 미군정치하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7월 3일 골령골 골짜기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사법절차 없이 1,800명 넘는 재소자들과 함께 총살됐다. 죄목은 '조선정판사 지폐위조'. 학계에서는 이 사건 자체가 조작이라는 견해가 진작에 우세했는데, 사법부가 그걸 공식으로 인정하기까지 79년이나 걸렸다.
이관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적어두는 게 좋겠다. 해방직후 잡지 『선구』의 정치여론조사에서 그는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5위에 올랐다. '가장 양심적이고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 다섯 명 중 한 명이었다는 뜻이다. 동덕여고에서 학생을 단 한 번도 때리지 않은 교사였고, 1931년부터 해방까지 15년간 일본 경찰의 수배망을 한 번도 뚫리지 않은 혁명가이기도했다.
이관술이 그렇게 오래 수배망을 피해다닌 데에는 한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그 사람은 이재유다.
무죄가 왜 79년이나 걸렸는지부터 짚어두자. 검찰의 그림은 이랬다. 조선공산당이 당 활동 자금을 마련하려고 정판사의 인쇄시설로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것. 그런데 검찰이 위조를 저질렀다고 지목한 1945년 10월, 정작 그 일을 했다는 정판사 인쇄공들은 아직 공산당원조차 아니었다. 그들이 입당한 건 이듬해 2월이다. 인쇄에 썼다는 징크판도, 정판사에서 찍었다는 위조지폐도 법정에 단 한 장 제출되지 못했다. 유죄의 근거는 오직 피고들의 자백뿐이었는데, 그 자백은 경찰서에서 나왔고 법정에서는 모두 번복됐다. 고문 때문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뚝섬 위폐사건'이라는 별개의 지폐위조사건이 있었고, 그 피의자 중 하나가 우익단체 간부였다. 경무부장 조병옥이 박헌영에게 "이번 사건은 뚝섬 사건"이라 말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사건의 실체는 따로 있는데 공산당 간판이 붙은 인쇄소로 옮겨 붙였다는 뜻으로 읽힌다. 한국외대 임성욱의 박사논문은 이 모든 모순을 짚은 뒤, 정판사 사건은 조작이며 피고들은 최소한 무죄라고 결론지었다. 2025년 재심재판부도 같은 입장에 섰다.
1934년 4월 어느 날,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한 남자가 사라졌다. 족쇄를 풀고 창문을 넘었다. 담당 간수였던 모리타 순사가 그의 사상과 인간성에 감화되어 탈출을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모리타는 산골 주재소로 좌천된 뒤 행방불명됐다.
탈출한 남자는 택시를 몇 번 갈아탔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경성제국대학 관사. 거기서 그는 38일을 살았다. 응접실 마룻바닥 아래,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가는 토굴이었다. 집주인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재정학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였다. 일본인이었다.
마룻바닥에 젓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으로 쪽지를 주고받았다. 바카라을 내려보내고, 운동노선을 토론했다. 본토출신 교수가 피지배 민족의 혁명가와 글로 연락하는 풍경이 낯설다. 미야케는 결국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정체성과 노동운동 지원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대학에서 추방되고 감옥에 갔다. 출옥 후에는 일본 본토 슬롯에서도 외면당했다. 그 대가를 평생 치렀다.
이재유는 꽤나 거창한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 '30년대 슬롯주의 운동의 신화적 존재'라 불려서 그렇다. 함경남도 삼수에서 태어나 일본대학을 다녔고, 70여 차례 검속을 거치며 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3년 6개월을 살았다. 1932년 12월 출소 직후부터 그는 코민테른의 지령을 거부하고 조선 안에서 자기 식의 운동노선을 고집했다. 전위당부터 만들고 대중을 거기에 끼워 맞추는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일상 속에서 조직을 키워 올라가는 방식. 그 방식의 결과물이자 시작점이 '경성트로이카'였다.
이재유는 결국 1936년 12월에 다시 잡혔다. 6년형을 받고, 1942년 형기가 끝났다. 그런데 풀려나지 못했다. '비전향'이 이유였다. 그는 1944년 10월 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죽었다. 해방을 11개월 앞두고였다. 묘비도, 장례식도 없었다.
남은 사람들의 끝 역시 고운 모습일 수 없었다. 이재유가 엮어놓은 사람들은, 그가 죽은 뒤로도 한동안 살아 움직이다 하나씩 지워졌다.
충북 충주 출신인 김삼룡은 형무소에서 이재유를 만났다. 트로이카와 경성콤그룹의 노동조직이 그의 몫이었다. 박헌영이 1948년 월북한 뒤로는 남로당 서울지도부를 3년간 홀로 끌었다. 1950년 3월 27일 아현동에서 붙잡힐 때, 그는 엿장수로 변장한 채 색안경 일곱 개를 지니고 있었다. 서울에만 아지트가 일곱 군데였다.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 법정에서 그가 남긴 말은 한 문장이었다. "아무런 할 말이 없으니 나를 더 이상 욕보이지 말고 죽여주시오."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 서울형무소에서 즉결처형됐다.
그의 아내는 이순금이었다. 동덕여고 시절 운동에 발을 들여, 이재유와는 위장부부로 살고 박진홍과 함께 트로이카·콤그룹의 연락망을 맡았다. 이재유가 죽은 뒤에는 김삼룡의 아내가 됐다. 한 사람의 생애 안에 이재유와 김삼룡이 나란히 들어 있는 셈이다. 그 생애는 1948년 월북을 끝으로 끊긴다. 박헌영 숙청기에 함께 사라졌다는 게 정설이지만, 죽은 날도 죽은 자리도 모른다. 남자들에게는 그나마 처형 날짜라도 남았는데, 이 여자에게는 그마저 없다.
전북 금산 출신 이현상은 6·10 만세운동으로 운동을 시작해, 이재유·김삼룡과 함께 트로이카 1기의 핵심멤버 셋을 이뤘다. 해방 후 남로당군사부를 거쳐 1948년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보급도 퇴로도 해방구도 없이 5년을 산에서 버텼다. 그런 그를 끝낸 것은 토벌대이기 전에 자기사람들이었다. 박헌영이 평양에서 숙청당하던 무렵, 그는 남로당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1953년 9월 17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됐다. 같은 편이 그를 내친 직후의 일이다.
박헌영도 다르지 않다. 1939년 이관술을 만나 경성콤그룹에 합류했을 때, 그는 이미 두 번의 옥살이를 지난 사람이었다. 일제의 고문을 견뎠고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했다. 그런 그를 끝낸 것은 1955년 평양이었다. '미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씌우기에 당했다. 일제의 감옥을 두 번 겪고도 살아남은 사람을, 한때 같은 진영이던 이들이 처형한 셈이다.
박진홍의 마지막은 이순금과 겹친다. 함북 명천 출신의 그는 이재유의 또 다른 사실혼 동지였다. 1944년, 조선문학사 연구의 개척자이자 콤그룹원이던 김태준과 함께 옌안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결혼했고, 해방이 되자 함께 돌아왔다. 박진홍은 월북했고, 남에 남은 김태준은 1949년 11월 사형됐다. 박진홍이 그 뒤 어떻게 됐는지, 기록은 없다.
다 같이 1930년대 경성의 한 골목에서 시작한 사람들이다. 일제에 한 명, 이승만의 나라에 두 명, 김일성의 나라에 세 명이 죽었다. 사라지는 방식도 다 다르다. 옥사, 처형, 사살, 숙청, 실종.
이재유 그룹이 『적기』에 내건 강령은 추상적인 '해방'보다도 꽤 구체적인 설계도를 보여준다. 정치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조선의 독립. 경제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의 해체, 즉 지주의 땅을 농민에게 돌리는 토지개혁. 7시간 노동제. 모든 은행을 단일 국민은행으로 통합하고 생산을 노동자·농민의 통제 아래 두는 것. 한마디로 사적 소유와 시장을 국가와 계급이 대체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슬롯주의국가였다.
식민지 소작농과 공장노동자가 인구의 절대다수였던 1930년대 조선에서, 토지개혁과 노동시간 단축은 그 시대 어떤 민족주의우파도 정면으로 내걸지 못한 급진적 약속이었다. 동시에 권력집중과 생산수단의 국가통제라는 구상이 현실에서 어떤체제로 귀결되는지를, 우리는 휴전선 북쪽에서 이미 보았다. 이들이 꿈꾼 나라와 김일성이 세운 나라가 같은 것이었는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이들 대부분이 바로 그 북쪽 정권의 손에 숙청당했다는 사실만큼은, 그 꿈과 현실사이의 거리를 말없이 증언한다.
남쪽정부는 '좌익'이라 외면했고, 북쪽정부는 '종파분자'라 지웠다. 2026년 5월 국가보훈부가 발표한 '5월의 독립운동가' 자료에서도 이재유의 슬롯주의 이력은 누락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는 아직도 절반만 독립운동가다.
80년 가까이 지나서 이 사건의 진위여부를 따지는 일의 쓸모는 이렇다. 독립운동을 '좌'와 '우'로 갈라 한쪽만 갈등의 희생양으로 올리는 일은, 결국 식민지를 살아낸 절반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한 사람의 항일이력은 그가 해방 후 어느 편에 섰는가로 소급해 지워지지 않는다. 한계도 뚜렷하다. 이들을 복권한다는 것이 이들의 노선까지 복권하는 일은 아니다. 토지를 국유화하고 시장을 철폐하는 설계도는 21세기 한국에 그대로 옮겨올 수 있는 청사진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노선이 아니다. 가장 약한고리 격의 사람들 편에서 세상을 다시 짜겠다는 가치지향의 노선과 방식이 틀렸을 수 있어도, 그 가치지향을 위해 목숨을 내다바친 의지는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독립운동을 조선과 일본의 싸움으로 배웠다. 착한 조선인과 나쁜 일본인.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그 구도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재유를 제 집 마룻바닥 밑에 숨긴 일본인 미야케, 그리고 그 동지들을 죽인 조선인들.
미야케는 일본인이면서 조선혁명가 편에 섰고, 그 값으로 제 나라에서 평생 외면당했다. 이재유와 그의 사람들은 조선인이면서 남에도 북에도 남지 못했다. 국적으로 줄을 그으면 셈이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을 편가른 진짜 선은 뭘까.
이재유는 코민테른의 지령마저 거부한 사람이다. 위에서 당을 세워 대중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맨 아래 노동자와 농민의 일상에서부터 조직을 쌓아 올렸다. 힘은 위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올라온다고 믿었다. 그런 힘은 위에 선 모든 권력에게 위협이다. 식민지를 둔 제국에게도, 지주와 자본의 질서를 지키려던 남쪽국가에게도, 위에서 모든 것을 움켜쥐려던 북한의 김일성에게도. 성향이 정반대인 세 권력이, 이들을 지우는 데에는 뜻이 맞았다.
일본인은 한사람은 이들을 제 마룻바닥 밑에 숨길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국가도 이들을 품지 못했다. 이들은 조선 VS 일본 이라는 식의 간단한 도식에서 출발하면서도 계급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이들 전선은 위에서 내려오는 강제력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슬롯정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이관술의 외손녀가 판결 직후 한말이 이랬다. "오랜 세월 억눌려 왔던 정의가 마침내 역사 앞에 바로 섰다."는 것이다.
복권이 이재유에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를 마루 밑에 숨겨준 일본인 교수와 그 가족들에게도 오지 않았다. 골령골에 묻힌 1,800명에게도, 지리산 어느 능선에 묻힌 이름들에게도, 평양 어느 처형장 옆에 묻힌 여자에게도 오지 않았다. 79년이 걸린 무죄판결 뒤에는, 아직 이름조차 호명되지 못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해방 80년이 지났다. 전선은 여전한 듯 하다.
참고자료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 1930년대 서울의 혁명운동』, 푸른역사, 2007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슬롯평론, 2006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