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배격할 때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예순 살의 남자가 교수대 앞에 선다.
9년 전, 이 남자는 이 나라 최초의 농지개혁법 초안에 농림부장관으로서 서명했다. 수백 년간 고정되어 있던 지주와 소작의 구도를 해체하고, 한반도 남쪽의 토지 70%를 실제 경작자의 이름으로 옮긴 개혁이었다. 그 법을 만든 해에 제정된 또 하나의 법이 국가보안법이다. 같은 정부, 같은 국회, 같은 연도에 통과된 두 법 중 하나는 그에게 근대국가의 공직을 맡겼고, 다른 하나는 지금 그의 목을 매단다. 이 두 법의 공존이 이승만정권의 본질을 요약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언어로 세운 국가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정치적 반대를 사형으로 처리했다.
자유민주주의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선다. 하나는 자유다. 개인이 국가의 강압에서 자유롭게 말하고, 결사하고, 정치에 참여할 권리. 다른 하나는 민주다. 다수의 의사가 권력을 구성하되, 소수의 권리가 침해받지 않는다는 원칙인 것이다.
조봉암이 태어난 1899년의 강화도는 당시에도 변방이다. 양반의 땅도, 상인이 밀집한 항구도시도 아닌, 빈농이 대부분이던 섬. 그 강화 읍내에서 열린 만세시위에 스무 살의 조봉암이 끼어 있었다. 조봉암은 체포되어 1년을 복역한다. 이후 그는 슬롯주의운동에 투신했고,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두 차례 옥살이를 했다. 모진 고문으로 손가락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1939년 출옥한 조봉암은 더 이상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스탈린의 대숙청이 동지들을 하나씩 끌어내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고, 코민테른의 기계적 지령 체계에 환멸을 느꼈다. 러시아연방 국방성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1932년 이후 조봉암은 박헌영을 비롯한 어떤 공산주의자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해방 후 1946년 그는 박헌영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좌경 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박헌영의 답은 강제 출당이었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조봉암은 공산주의를 스스로 버린 사람이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조봉암이 주도한 헌법조항들을 보면 그의 정치적 지향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영장제도에 변호인 조력권과 구속적부심사제를 넣었고, 고문과 잔인한 형벌을 명시적으로 금지했다. 이거,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다. 11년 뒤 조봉암은 자신이 헌법에 새겨놓은 그 조항들이 정면으로 위반되는 방식으로 처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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