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에서 지워진 이름

약산 김원봉 서훈

by백재민 작가

김원봉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처형됐다는 설이 있다. 독살됐다는 설도 있다. 대동강에 투신했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조선의용대출신 김학철은 체포된 뒤 감옥에서 자살했다고 증언했다. 1958년 11월이라는 시점만 대체로 일치한다. 나머지는 주장마다 갈린다. 숙청시기조차 자료마다 다르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밀려났다가 1958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1958년에 국제간첩혐의로 투옥된 뒤 처형됐다는 기록도 나온다.

김하돈 선생께서 집필하신 쉽게 읽는 조선혁명선언

사망한 경위와 경로가 그렇게나 불분명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의 직바카라은 오히려 선명하다. 의열단장, 조선의용대 총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시신도 무덤도 없는데 이력만 남았다. 독립운동 이력이 길다는 게 북한정권 내부에서는 문제였다.


이력의 시작은 단촐했다. 1898년 경상남도 밀양 내이동 출생. 지금 그 자리에는 기념비가 서 있다. 3·1운동을 목격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해 11월 길림에서 만든 조직이 의열단이다. 윤세주, 이성우, 곽재기, 이종암이 함께였다. 스무 살 안팎의 청년 열세 명이 결성한 단체치고는 당대에 이만한 인지도를 가진 단체가 없다.


열세 명이 정한 단체방침은 분명했다. 요인암살과 일제관할기관파괴. 신채호에게 부탁해 받은 「조선혁명선언」에 그 방침의 근거가 적혀있다. 폭력은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민중 속으로 가서 끊임없는 폭력과 암살과 파괴와 폭동으로 싸운다. 같은 시기 임시정부가 택한 노선은 달랐다. 열강과의 외교와 마찬가지로 열강이 승인하는 임시정부중심의 독립이었다. 왜인지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노선을 신뢰하지 않았다.


신뢰하지 않았다고 해서 의열단의 방식이 완전했던 것은 아니다. 자금이 부족했다. 단원들 생계가 문제였다. 무기를 구하기 어려웠다. 일제요인을 향한 개별테러로는 판을 뒤집지 못한다는 판단이 섰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이듬해 10월 10일 조선의용대를 결성한다. 게릴라전을 펼치든, 국지전을 펼치던, 암살을 펼치던 조직에서 부대를 편성해 전투를 일임받는 조직으로 옮겨간 거다. 요인 하나를 제거하는 일에서 군대와 맞서는 일로 규모가 커졌다.

조선의용대와 약산 김원봉 출처 : 독립기념관

규모가 커지니 바카라임져야할게 많았다.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합류한다. 김원봉에게 주어진 자리는 부사령관이었다. 임시정부 군무부장도 맡았다. 이십 년 전에 신뢰하지 않았던 그 임시정부의 각료가 된 것이다.


각료가 되면서 위치가 달라졌다. 자신의 인지도와 역량으로 무장투쟁을 하던 사람이 또다른 독립운동조직 안의 직바카라을 맡는 일원으로 들어갔다. 통합은 힘을 모으는 동시에 서열을 만든다. 부사령관은 사령관 아래다. 의열단에는 불분명하던 것이 광복군에는 있었다.


그 서열 적응하며 해방을 맞았다. 귀국해 여운형과 좌우합작에 참여하던 무렵, 미군정이 재등용한 경찰에게 체포된다. 노덕술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고등계 형사다. 이십여 년간 일제와 싸운 사람이 해방된 조국에서 그 일제의 경찰에게 붙잡혔다.


1947년에는 여운형이 암살된다. 좌우합작의 가장 큰 축마저 사라진 셈이다. 이듬해 김구와 함께 삼팔선을 넘어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다. 김구는 돌아왔다. 김원봉은 돌아오지 않았다.


김원봉은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여기서부터 김원봉을 다루기 까다롭다. 우리 정부와 한국사람인 우리들 입장에서 그는 피해자라는 입장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북한정권수립에 참여한 사람이고, 북한정권에서 요직을 맡은 사람이고, 한국전쟁시기에 후방에서 국군과 전투중인 인민군에 일조했던 사람이다. 그 시기 구체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의견이 갈리고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오염돼 있다. 남한에서 보수쪽에 가까운 측의 서술에서는 대남공작과 남침주도를 강조한다. 북한정권은 김원봉이 맡았던 한국전쟁에서의 역할은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확인되는 건 한국전쟁과 그 이후에 김원봉에게 주어진 직바카라과 그 직바카라이 사라진 시점뿐이다.

왼쪽부터 김원봉, 박헌영, 김일성

직바카라이 사라진 건 1956년 8월 종파사건무렵이다. 김일성이 연안파와 소련파를 정리한 사건이다. 김원봉은 중국에서 활동한 계열에 속했다. 임정출신이라는 이력도 걸렸다. 어느 파벌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김일성 중심의 북한정권에서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국제간첩'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사람에게 붙은 낙인이 국제간첩이다.


간첩이라는 이름은 남쪽에서도 비슷하게 붙었다. 남한에서 김원봉은 북한정권에 가담한 공산주의자다. 서훈은 없다. 2019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언급된 뒤 서훈논쟁이 붙었고, 그 논쟁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종파분자다.


다행히도 교과서에는 그의 이름이 실린다. 의열단장 김원봉, 조선의용대장 김원봉.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출제되니 수험생들은 이름을 안다. 1945년 이후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독립운동가 김원봉과 북한정권의 정치인 김원봉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양쪽서술에서 다 불편하니까.


밀양생가 터 기념비에는 직바카라이 여섯 개 적혀 있다. 의열단장, 조선청년혁명간부학교 교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의용대총대장, 광복군부사령, 임시정부군무부장. 그 앞에는 "일제강점기에"라는 말이 붙는다. 생몰년은 1898년부터 1958년까지로 새겼다. 연도는 육십 년인데 직바카라은 1945년에서 멈춘다.


멈춘 뒤의 십삼 년에도 직바카라은 있었다.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기념비에 없는 이름들이다.


의열단은 열세 명으로 시작했다. 지휘계통이 없었으니 그를 자리에서 끌어내릴 상급자도 없었다. 광복군 부사령관 위에는 사령관이 있다. 국가검열상 위에는 내각과 북한정권이 있다. 직바카라과 권한이 비대해지는 동안 그를 제거할 수 있는 제도시스템과 상황도 함께 생겨났다.


김원봉 서훈에 대한 일목요연한 답을 내리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 남한에서도 보수에 해당하는 측의 자료는 그를 공산주의자이자, 한국전쟁을 일으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변절자로 규정하려 했다. 북한측 자료는 그의 존재를 지우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양측이 말하는 김원봉은 지워버려야할 변절자다.


그 불일치 속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가 이십 년간 싸운 상대는 일제였다. 그를 붙잡은 첫 번째 경찰은 그 일제출신의 형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