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금요일 오후, 정후는 문밖에서 정현의 이름을 불렀다.
정현은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잠깐 나갔다 왔고, 그 뒤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정후가 그냥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바닥에 무엇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무겁다니까.”
낯선 목소리였다.
“조금만 들고 있어.”
“계속 네가 놓잖아.”
정현은 눈을 떴다. 문틈으로 신발 두 켤레가 보였다. 정후의 운동화 옆에 흰색 실내화가 있었다. 병원에 실내화를 신고 온 아이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정후가 먼저 얼굴을 내밀었다. 뒤의 아이가 묵직한 종이봉투를 양팔로 안고 있었다. 얇은 목 위에 얼굴이 조금 길어 보였고, 교복 소매 끝에는 줄어든 니트의 보풀이 붙어 있었다.
앞머리는 눈썹을 덮었는데 귀 뒤쪽 머리는 짧았다. 누군가 집에서 잘라 준 것처럼 한 군데가 들쭉날쭉했다.
정현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창가 뒤쪽에 앉는 아이였다. 출석을 부르면 거의 고개만 들고 대답했다.
“성호?”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성호.”
정후가 종이봉투 밑을 받치며 말했다.
“알아.”
정현이 말했다. 성호의 목소리를 이렇게 가까이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카라 좀 갖고 오랬더니 집을 옮겨 왔어.”
정후와 성호가 봉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만화바카라이 줄지어 나왔다. 《슬램덩크》였다.
성호는 젖은 탁자 모서리를 보고 바카라부터 들어 올렸다. 어머니가 물기를 닦아 주자 그제야 내려놓았다. 바카라등을 바깥쪽으로 맞추는 손이 빨랐다.
“다 있냐?”
정현이 물었다.
“오늘은 앞에서부터. 나머지는 다음에.”
성호는 바카라을 번호대로 늘어놓았다. 일곱 번째와 아홉 번째 권 사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팔 권은 없어.”
정후가 바로 물었다.
“왜 그건 없어.”
“기영이한테 있어.”
정현은 성호를 봤다.
“걔도 읽냐?”
“그린대.”
“뭘.”
“사람.”
성호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정현을 봤다. 정후가 웃었다.
“슬램덩크에서 뭘 그리겠냐. 농구공 그리겠냐.”
“공도 어렵지.”
성호가 말했다.
“동그라미인데?”
“줄 잘못 그으면 배구공 돼.”
정후는 웃음을 멈추고 성호를 봤다. 성호는 이미 다른 바카라의 접힌 표지를 펴고 있었다.
정현은 첫 권을 집었다. 한 손으로 들기에는 조금 무거워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바카라장을 넘기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다물었다. 성호는 웃을 장면을 아는지 먼저 정현을 봤다.
“뒤에 더 있어.”
“뭐가.”
“얘가 처음에는 잘 못하는데, 나중에 가면—”
성호가 다른 권을 꺼내려 하자 정후가 손을 들어 막았다.
“아직 읽지도 않았잖아.”
성호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정현이 다시 웃자 또 무슨 말을 하려 했다. 이번에는 자기 입술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맞은편 아저씨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이 친구는 다 외웠나 보다.”
성호가 아저씨를 봤다가 대답 없이 바카라으로 눈을 돌렸다.
정현이 중간의 한 권을 뽑았다.
“그럼 이다음에 어떻게 되는데?”
성호는 정현이 펼친 그림을 보고 다음 장면을 설명했다. 정현이 한 장을 넘겼다. 비슷했다. 두 장을 더 넘겨 봐도 성호가 먼저 말한 사람이 나왔다.
“너 몇 번 읽었냐.”
“세어 봐?”
“아니.”
정후가 얼른 말했다.
“세지 마. 오늘 집에 가야 돼.”
정현이 웃었다. 웃다가 다리를 조금 움직여 얼굴을 찌푸렸다. 정후는 웃음을 그쳤고, 성호는 바카라을 정현의 손에서 받았다.
잠깐 아무 말도 없었다.
성호가 침대 탁자를 가까이 당겼다. 높이를 조절하는 손잡이를 찾더니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침대 머리 쪽을 조금 올려 주고 탁자의 높이를 맞췄다. 성호가 그 위에 바카라을 펼쳐 놓았다.
“이러면 안 들고 봐도 돼.”
정현이 바카라으로 눈을 내렸다. 성호가 펼쳐진 장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말해도 되는데.”
정현이 말했다.
“아직은 안 돼. 다음 장 보고.”
정현은 곧바로 바카라장을 넘겼다.
*
어머니가 음료수를 사러 내려갔다. 정후는 사 오지 않아도 된다며 그저께 두고 간 간식 봉지를 뒤졌지만 이미 비어 있었다.
“그날 네가 다 먹었냐?”
정현이 물었다.
“그저께는 강현이가 더 먹었어.”
“그건 내가 봤거든.”
“그러니까.”
정후는 탁자 모서리의 비닐을 떼다가 말았다.
“어제 전화했다며.”
“어. 너 잔다길래.”
정현은 아버지가 병실로 돌아오던 발소리를 생각했다. 그때도 깨어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후도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교실 뒤 게시판을 새로 붙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박 씨 아저씨가 해 줬어. 네 주먹 자국 없어졌다.”
“돈은?”
“그건 몰라. 임미리 선생님이 네 아버지하고 얘기하신대.”
김영락 대신 조회와 종례를 맡고 있는 선생이었다. 정현은 새 게시판을 떠올렸다. 구멍은 없어졌고 자신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성호가 교과서에서 프린트 몇 장을 꺼냈다. 정현이 보자 곧바로 바카라 밑에 넣었다.
“이건 나중에.”
“누가 줬냐.”
“규호. 네 몫으로 나눠 주는 거 모아 뒀대.”
정현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성호는 프린트 위에 만화바카라을 올렸다. 그 순서가 마음에 들었다.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도 좋았다.
“너 왜 실내화 신고 왔냐?”
정현이 물었다.
성호가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처음 보는 것처럼 한 발씩 움직였다. 정후도 그제야 봤다.
“야, 내가 가방 무겁다고 해서 신발 갈아 신는 것도 잊었냐?”
“네가 계속 빨리 오라고 했잖아.”
“그렇다고 그걸 잊냐.”
성호는 정후의 신발을 봤다.
“그럼 네가 바꿔 신어.”
정후가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성호의 발보다 훨씬 컸다.
“너 이거 신고 가면 중간에 네가 빠져.”
성호가 실내화를 신은 발을 도로 침대 밑으로 당겼다. 정현은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
둘은 오래 있지 못했다. 정후는 사촌을 데리러 가야 했고, 성호는 어머니가 기다린다고 했다. 떠나기 전에 성호가 바카라을 한 번 더 셌다.
“안 훔쳐 가.”
정현이 말했다.
“내가 몇 권 놓고 가는지 알아야지.”
성호는 대답하면서 바카라등의 숫자를 확인했다. 다 세고 나서야 정현을 봤다.
“팔 권은 월요일에 받아 올게.”
“아직 거기까지 못 읽었는데.”
“읽다 없으면 싫잖아.”
성호가 봉투를 접어 들었다. 정후가 나가다 돌아보며 내일도 오겠다고 했다. 정현은 대답 대신 손을 들었다.
병실이 조용해졌다.
정현은 세 번째 권을 폈다. 조금 전에는 재미있던 그림에서 눈이 자꾸 빠졌다. 창문에 비친 몸이 보였다. 만화바카라 위로는 자기 손이, 아래로는 높이 받친 다리가 있었다.
지금쯤 마지막 연습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다음 주 버스에 누가 누구 옆에 앉을지 세고 있었다. 늘 자신이 앉던 창가에는 누가 앉을까. 코치에게 묻고 싶었다가 그만뒀다.
정현은 바카라을 덮었다. 한동안 천장을 보다가 다시 바카라을 폈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찾지 못해 몇 장을 앞으로 넘겼다.
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정현은 같은 장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음료수 봉지를 내려놓고 빈 의자를 봤다.
“벌써 갔어?”
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 왔다 가니까 좀 낫지?”
정현은 그렇다고 말하려다 바카라을 조금 내렸다.
“엄마.”
“응.”
“월요일에 성호 오면 그냥 들여보내.”
어머니는 알았다고 했다. 정현은 바카라 밑에 가려진 프린트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