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여섯 시

12화

by마짝꿍텝

금요일 점심시간, 정현이 교무실에 간 사이 영재가 정후의 바카라상 앞에 앉았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안경 자국이 남았다.


“쟤 어제 규호 붙잡고 한참 묻더라. 한 문제 가지고.”


정후는 김을 밥에 올렸다.


“걔 독해. 줄넘기도 거의 미친놈처럼 하던 애잖아.”


영재가 무릎을 쳤다. 옆에서 테이프를 뒤집던 명진이 고개를 들었다.


“너 작년에 없었지? 쟤 줄넘기 사건 모르지?”


“또 이야기하게?”


정후가 만류했지만 영재는 오른손 중지로 안경을 올려 쓰며 의자를 돌렸다.


“체육 시험이 이단 뛰기였거든. 여든두 개가 만점인데, 반장이 첨에 하나 하고 걸리고 또 걸리고. 그런데 정후가 첫 시도에 열 개를 넘게 한 거야.”


“열일곱 개.”


“컴퓨터냐?”


“열 개 넘게랑 열일곱 개가 같냐?”


“안 물어봤거든.”


영재는 명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뒤로 정현이는 한 달 동안 밤마다 줄만 돌렸어. 아니 아예 날 붙잡고 세어 달래. 백 개 가까이 했는데 내가 중간에 까먹어서 처음부터 다시 한 적도 있어.”


명진이 픽 웃었다.


“너 일부러 그랬지.”


“내가 왜. 그럼 또 세어 줘야 되는데.”


영재가 바카라상을 두드렸다.


“시험 날은 진짜 잘했어. 아주 오십 개를 순식간에 넘겼어. 근데, 문제는 거기부터 시작된 거야. 쉰한 개부터 바지가—”


“너 작년에 다른 반 아니었나?”


“나도 전해 들었지.”


정후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옆에서 누가 바지 보라고 했거든. 바지가 점점 흘러 내려가는 거야. 근데 반장이 아래를 보더니 더 높이 뛰더라.”


“바지 올라가라고?”


“내가 어떻게 알아. 애들이 웃느라고 숫자를 안 세니까 성질을 내. 아, 세라고, 씨발, 세라고.”


명진이 바카라상에 엎드렸다. 태양이 도시락과 컵라면을 들고 다가왔다. 뺑뺑이 안경이 매부리코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콧잔등과 볼에 주근깨가 촘촘했다.


“선생님은 그만하고 바지부터 올리래. 그런데 걔가 ‘점수는요?’ 이렇게 묻는 거야. 계속 뛰면서.” 정후가 말했다.


영재가 양팔을 돌리며 제자리에서 뛰었다. 팔꿈치가 컵라면 가까이 오자 태양이 몸을 틀었다.


“와 이라는데. 국물 쏟겠—”


태양은 말을 멈추고 컵을 바카라상에 내려놓았다. 그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떼고 다시 말했다.


“밥 먹잖아, 새끼야.”


영재가 명진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누가 경상도 아니랄까봐. 진주랬나?”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 사천.”


“그래 그 사천짜장”


“미친, 그거 아니거든. 내 밥에 팔 휘두르지 말라고.”


태양이 컵을 자기 앞으로 당겼다. 영재는 두 손을 내리고 정후에게 계속하라는 듯 턱짓했다.


“선생님이 지금 점수가 문제냐고 하는데 그냥 계속 뛰어. 바지는 내려가지, 근데 내려가는 바지가 팬티를 붙들고 늘어지기 시작하는데…”


정후가 앉은 채 무릎을 붙였다.


“칠십육부터 내가 다시 크게 셌어. 선생님은 그만하라고 하고, 나는 칠십칠, 칠십팔.”


“너도 정상은 아니네.”


“안 세 주면 그 새끼는 처음부터 다시 할 놈이라니까.”


정후는 손가락을 접으며 마지막 네 개를 셌다. 칠십구 덜렁, 팔십 덜렁, 팔십하나 덜렁, 팔십둘 덜렁. 숫자를 부를 때마다 손을 중요부위에 대고선 몸을 들썩여 명진이 더이상은 못 보겠다며 손을 저었다.


"더...덜렁 덜렁?"


“어!!! 여든둘 딱 하자마자 줄을 던져. 이 새끼도 부끄러운 건 아는지 바지 끌어올리고 출입문까지 막 뛰어가더니 또 거기서 가다가 돌아와.”


정후가 목을 쭉 빼고 정현의 말투를 흉내 냈다.


“선생님, 만점 맞죠?”


태양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명진은 바카라상 모서리를 두드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영재가 한 번 더 해 보라고 하자 정후는 젓가락을 집었다.


“맞다고 하니까 바로 도망갔어.”


“받기는 받았네.”


“여든두 개 했잖아. 하여튼 애가 독해.”


영재는 자기 같으면 그냥 멈췄을 거라고 했다.


“너는 어차피 여든두 개 못 하잖아.”


“연습하면 돼.”


“너도 한 달간 연습했잖아.”


영재가 정후의 등짝을 후려갈기는 시늉을 하고, 슬쩍 정현의 빈자리를 봤다.


“본인한테 내가 얘기했다고 하지 마라.”


명진이 정후를 가리켰다.


“얘가 다 했는데?”


“시작은 내가 했잖아.”


정후는 남은 달걀말이를 집었다. 영재가 뺏으려 젓가락을 내밀자 도시락 뚜껑으로 막았다.


*


교무실에서 돌아온 정현은 자기 자리에서 수학 공바카라을 꺼내 정후의 바카라상에 놓았다.


“어제 규호한테 물어보고 집에서 다시 해 봤어.”


정후는 밥을 씹으며 공바카라을 봤다.


“풀었어?”


“여기까진. 맞나 좀 봐 줘.”


정후는 공바카라을 폈다. 정현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옆 의자를 발로 당겨 주었다.


정현은 두 번째 줄을 가리켰다.


“여기 넘어갈 때 부호를 잘못 썼더라.”


“그 밑에는?”


“이렇게 하면 돼?”


정후가 공바카라 여백에 한 줄을 더 썼다. 정현은 그 식과 자기 것을 번갈아 보다가 빠뜨린 숫자를 채웠다.


작년에는 하루쯤 필기를 빼먹어도 금방 메웠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공바카라을 빌릴 때마다 모르는 줄이 늘었다.


“어제는 집에 늦게 갔다고 괜히 그랬어. 너도 같이 있었는데.”


정후는 샤프를 내려놓았다.


“나도 네가 해 보지도 않고 묻는 줄 알았어.”


정현이 공바카라을 당겼다. 정후는 옮겨 쓴 식을 한 번 더 보고 손을 놓았다.


“다음엔 여기까지 했다고 보여 줘. 내가 어떻게 아냐.”


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려는데 정후가 불렀다.


“내일 여섯 시, 배트맨.”


“뭐?”


“성훈이 형하고 애들 만나. 수진 누나도.”


정현은 그대로 서 있었다. 정후는 젓가락으로 남은 반찬을 모았다.


“민정 누나도 온대.”


복도에서 뛰던 아이가 문틀에 부딪쳤다. 옆자리에서 웃음이 터졌는데 정현은 정후가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민정 누나? 그 누나 나 기억한대?”


“몰라. 가서 네가 물어봐.”


정후가 마지막 밥을 입에 넣었다. 정현은 공바카라을 끌어안은 채 서 있었다.


“갈 거지? 형한테 말해 줘야 돼.”


“갈게.”


대답하고 나서야 부모님께 물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정후가 턱으로 정현의 자리를 가리켰다.


“그럼 밥부터 먹어.”


*


그날 저녁, 어머니는 외출 이야기를 듣고 계산대 아래의 주문대장을 꺼냈다.


“내일 가게 봐주기로 한 건?”


정현은 대답하려다 멈췄다. 며칠 전 어머니에게 자기가 가게를 보겠다고 했던 게 그제야 생각났다.


“아, 맞다. 다섯 시까지잖아. 약속은 여섯 시고.”


“엄마 배달에서 돌아올 때까지. 다섯 시쯤이라고 했지.”


정현은 어머니가 적어 둔 주소를 봤다. 평소 걸어서 꽃을 가져다주던 건물보다 멀었다.


“많이 늦어?”


“늦지 않게 올게. 부케 찾으러 오는 분 계시니까 가게 비우면 안 된다.”


정현은 알았다고 했다. 가게 전화로 아버지에게도 말씀드렸다. 성훈은 정후와 고향에서부터 알던 형이라고 설명하고 노래방 이름을 말했다. 여자애들도 오느냐는 물음에는 조금 늦게 대답했다.


“여덟 시까지 들어와.”


“여덟 시 반은?”


“여덟 시.”


정현은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돌아오는 시간을 빼도 한 시간 넘게 있을 수 있었다. 버스에서 그 여학생과 나눈 말은 괜찮으냐는 물음과 괜찮다는 대답뿐이었다.


*


다음 날 오전 수업이 끝나자 정후는 바로 집으로 갔다. 외숙모가 나가는 동안 사촌과 있어 주기로 했다고 했다.


“나 데리러 오지 말고 거기서 봐.”


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후가 교문을 나간 뒤에야 노래방 앞에서 만나는 건지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지 묻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꽃집에는 강현이 먼저 와 있었다. 형제는 계산대 뒤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는 젓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꽃바구니 두 개를 포장했다.


강현이 밥을 다 먹고 리본을 잘랐고, 정현은 보내는 사람 이름을 적어 바구니에 달았다.


“형, 최 씨가 아니야. 채씨야.”


강현이 말했다.


강현이 새 리본에 이름을 적는 동안 정현은 벽시계를 봤다. 다음 리본은 주문서와 나란히 놓고 한 글자씩 확인했다.


늦은 오후 아버지가 학교에서 가게로 전화를 걸었다. 김영락 선생님과 통화했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날 일을 적은 경위서를 경흥중에 내고, 진방이가 다친 경위도 함께 확인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럼 언제 학교로 오신대요?”


정현이 물었다.


“김영락 선생님도 아직 학교로부터 답을 못 들으셨다고 하더라.”


아버지는 외출했다 돌아오면 자세히 이야기하자고 했다. 정현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네 시 반에 배달을 나갔다. 문을 나서기 전 계산대 아래의 부케와 바구니를 가리켰다.


“이건 돈 받았어. 이름만 확인하고 드려.”


“알아요.”


“아는 거 틀려서 다른 걸 드릴까 봐 그러지.”


강현이 웃었다. 정현은 동생의 이마를 손끝으로 밀었다.


가게가 조용해지자 강현은 앞치마를 벗었다. 계산대 아래에 둔 자전거 열쇠를 꺼냈다.


“어디 가.”


“운동장. 친구들도 자전거 타고 나오기로 했어.”


“엄마 오면 가.”


“형 있잖아.”


정현은 주문대장을 덮었다. 자기도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했다. 강현은 형의 교복을 보다가 벗어 놓은 앞치마를 대충 접었다.


“엄마가 형한테 있으랬는데. 나 조금만 놀다 올게.”


“옷 갈아입는 동안 네가 가게 좀 보면 안 돼? 나도 이따 자전거 타고 나갈 건데.”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열쇠를 손가락에 걸고 돌리다가 그만뒀다.


정현은 동생의 손에 걸린 열쇠를 봤다. 옷도 못 갈아입었는데. 강현은 앞치마의 모서리만 맞추고 있었다.


“알았어. 가. 잘 놀다 와.”


강현이 살짝 놀라며 쳐다봤다.


“늦어도 다섯 시 반까지 집에 갖다 놔. 나도 타야 돼.”


강현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또래 둘이 문밖에서 그를 불렀다. 강현은 창 너머로 얼굴을 확인하고 나갔다. 자전거에 바로 올라타지 않고 친구들 사이에서 끌었다.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정현은 가게 의자에 앉아 발끝으로 바닥의 잘린 줄기를 밀었다.


다섯 시가 지났다.


손님은 오지 않았다. 유리문에 교복 차림이 비쳤다. 다들 사복으로 나올 텐데 자신만 교복이면 이상할 것 같았다.


전화기가 울렸다.


“엄마?”


“나야.”


정후였다.


“나 지금 나가. 너도 나왔나 해서.”


“가게야. 엄마가 아직 안 왔어.”


“늦으면 그냥 되는대로 와. 형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안 늦어.”


정현은 시계를 봤다.


“들어가서 뭐라고 해?”


“성훈이 형 이름 대면 카운터에서 알려 줄 거야.”


정현은 수화기를 조금 세게 내려놓았다. 늦게 들어가면 모두 돌아볼 텐데, 문 앞에 혼자 서 있을 생각을 하니 싫었다.


어머니가 돌아온 것은 다섯 시 십 분이 조금 지나서였다. 정현은 어머니가 문을 다 열기도 전에 가방을 집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어머니가 빈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기다린 건 알겠는데, 엄마도 놀다 온 거 아니야.”


정현은 손잡이를 잡고 멈췄다. 어머니의 손가락 사이에 접힌 지폐가 끼어 있었다. 젖은 꽃줄기를 만지던 손이 마른 채로 갈라져 있었다.


“손님은?”


어머니가 물었다.


“아직. 전화도 없었어.”


“강현이는?”


“운동장. 내가 가랬어.”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빈 바구니를 쌓았다. 정현은 문을 열었다가 돌아봤다.


“여덟 시까지 올게.”


어머니는 계산대를 향한 채 알았다고 했다.


*


집에는 강현이 먼저 돌아와 있었다. 얼굴에 땀이 말라 있었고, 현관에 자전거 열쇠를 내놓았다.


정현은 옷장 문을 열었다. 회색 맨투맨을 입었다가 턱의 반창고에 목깃이 걸려 벗었다. 파란 셔츠를 입으니 소매가 짧았다. 두 번 접었다가 한 번 폈다.


강현이 방문에 섰다.


“아까 거 입지.”


“목이 불편해.”


“반창고 떼면 되잖아.”


정현은 거울 속 턱에 손을 댔다가 내렸다. 반창고 밑에 난 상처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세면대에서 손에 물을 묻혀 머리를 정리했다. 감으면 말릴 시간까지 필요했다. 정현은 손만 한 번 더 비누로 닦았다.


현관으로 나오자 강현이 열쇠를 건넸다.


“안장은 아빠가 올려 줬어.”


거실에서 아버지가 시험지를 내려놓았다.


“정후하고 같이 가니?”


“먼저 갔어요. 거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정현은 운동화를 신었다. 강현이 문을 잡고 물었다.


“형 무슨 노래 할 거야?”


정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누구를 만날지는 종일 생각했는데 노래는 한 곡도 생각하지 않았다.


“가서 골라야지.”


“준비도 안 했네.”


정현은 웃었다가 동생을 봤다.


“운동장에서 잘 놀다 왔냐?”


“조금.”


강현은 그 말만 하고 문을 더 열어 주었다.


*


자전거 안장은 평소 높이였다. 처음 몇 번 페달을 밟을 때 배 쪽이 당겨 정현은 속도를 줄였다. 핸들을 꼭 잡지 않으니 손바닥은 덜 아팠다.


큰길에 닿자 가게 간판들이 이어졌다. 정현은 레코드점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내렸다. 시계를 봤다. 여섯 시까지 오 분이 남아 있었다. 길 건너 2층에 박쥐 날개 모양 간판이 보였다.


배트맨.


유리창에 자기 모습이 비쳤다. 정현은 한쪽만 길어진 셔츠 소매를 고쳐 접었다. 무슨 노래를 부를지 아직 생각나지 않았다.


정현은 자전거를 끌고 횡단보도 쪽으로 갔다. 노래방 입구는 맞은편 건물의 좁은 계단이었다. 문 위의 전구가 한 칸씩 돌아가며 켜졌다.


다시 만나면 버스에서 본 애라고 먼저 말해야 할까. 알아보면 그냥 인사해도 될 텐데.


정현은 건너편 계단 옆에 서 있는 자전거 두 대를 보았다. 저기에 함께 세우면 될 것 같았다.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자 오른쪽으로 버스 한 대가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입 안에서 해 본 인사가 너무 작았다. 정현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자전거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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