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만

8화

by마짝꿍텝











그날 오후 슬롯시간, 정현은 슬롯 공바카라을 넘겼다. 날짜만 적힌 장이 나왔다. 그 앞장은 비어 있었고, 그보다 앞선 장에도 제목뿐이었다.


“지난 시간에 한 거 펴.”


요새 통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정현을 걱정해주는 짝 규호의 공바카라이 가운데로 밀려왔다. 정현은 겨우 두 번째 줄을 옮겨 적다가 창밖 운동장을 봤다.


이달 말 대회까지 연습할 날이 많지 않았다. 마지막 연습 때 잘 들어갔던 기술을 오늘도 한 번 더 해 보고 싶었다.


상대방의 체중이 실린 뒤쪽 발뒤축을 바깥쪽에서 후리거나 걸어 넘어뜨리는 기술인 발뒤축후리기를 떠올리며 바카라상 아래에서 발을 조금 움직였다. 의자 다리에 뒤꿈치가 툭 걸렸다.


“조정현. 칠판 봐.”


정현은 이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다시 공바카라으로 눈을 내렸을 때는 어느 줄을 쓰고 있었는지부터 찾아야 했다.


덕포고에 들어갈 때 가장 필요한 건 대회 성적이었다. 공부는 나중에 따라잡으면 됐다.


종이 울리자 정후가 수학 유인물을 내밀었다.


“수학 숙제 달라며. 베끼고 내일까지 갖다줘.”


세 문제 옆에는 정후가 중요하다고 표시해 둔 당구장 표가 있었다. 밑에는 칠판에서 옮겨 적은 풀이가 촘촘했다. 식을 잘못 적었는지 지우고 고친 자리도 있었다. 그 부분만 종이가 얇아져 있었다.


정현은 첫 줄만 대충 읽고 자기 유인물 위에 겹쳤다.


“어, 고마워. 내일 줄게.”


“내일 까먹고 안 가져오면 안된다.”


“알았다니까.”


*


분식집은 학교 담장 끝, 도서관 뒤편 골목에 있었다. 아이들은 큰길로 돌아가지 않고 그 골목을 오갔다.


순덕분식 간판 아래, 떡볶이를 담던 순덕이 조용히 일어나는 아이를 불렀다. 희끗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면서도 눈은 아이의 손을 보고 있었다.


“계산은?”


“지금 하려고 했어요.”


“그럼 그 손이 문으로 가면 안 되지.”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순덕은 돈을 받아 확인하고 뒷문을 열었다. 복실이가 코를 내밀었다. 학교 앞에서 수십년간 장사해 온 그녀는 사실 집이 어려워 밖에서 침흘리며 바라만 보는 아이들에게는 컵에 떡볶이를 수북이 담아 내미는 인심 좋은 사람이었다.


“복실아, 이리 와.”


정후가 무릎을 굽히자 누렁개가 운동화 냄새를 맡았다. 정후가 어묵을 떼어 복실이에게 건네려 하자 계산대의 여자가 손을 뻗었다.


“그거 주지 마. 얘 밥 따로 있어.”


순덕의 딸 윤희였다. 아이들은 누나라고 불렀다. 짙은 눈썹 아래로 커다란 눈이 가늘어졌다. 정후는 떼어 낸 어묵을 입에 넣었다.


윤희는 손목 보호대를 고쳐 올리고 밥그릇을 밀었다.


“엄마, 밥도 먹어가면서 해야지.”


“애들 빠지고 나면.”


“그게 언젠데. 점심 애들 가면 저녁 애들 오잖아.”


“그럼 장사 잘되고 좋지.”


순덕이 웃으며 빈 접시를 당겼다. 윤희는 그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그 사이에 설거지는 내가 다 하고? 밥부터 먹어. 나도 잠깐 앉게.”


순덕은 접시를 내려놓고 밥그릇 쪽으로 돌아앉았다.


“영어는 오늘도 멀쩡히 수업 들어오더만.”


“담임 소식은 뭐 들은거 없어?”


정후는 고개를 저었다. 정현은 떡볶이를 집던 손을 멈췄다. 분명히 정현 앞에서 교장은 수첩을 다시 펼쳤었다. 정현은 담임의 편에서 충분히 진술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뒤로 아무 말도 없었다.


“아, 그 누나 봤는데. 어제 청송학원 앞에서.”


정현이 고개를 들었다.


“버스에서 너랑 껴안은 누나말야. 이름 김민정이래.”


“껴안…이름을 물어봤어?”


“성훈이 형한테. 그날 버스에서 그 누나랑 같이 있던 누나가 그 형 여자친구거든. 이수진. 수진이 누나랑 둘이 제일 친하대.”


가방끈에 가려졌던 명찰이 떠올랐다.


민정.


정현은 속으로 이름을 한 번 더 불러 봤다.


“태권도 했대. 어릴 때부터. 3단인가 4단인가.”


정후가 웃으며 손바닥으로 정현의 턱을 툭툭 두드렸다.


“뭐 하냐?”


“턱 조심하라고. 앞차기 한 방이면…어우야.”


정후는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남자친구 없대.”


“누가 물어봤냐.”


“응, 너의 전 존재가 궁금해 죽겠다고 날뛰고 있더라.”


정현은 떡을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성훈은 정후가 자라도에 살 때부터 따르던 동네 형이었다. 덕포공고에 다녔고, 이름은 정현도 들어 봤다. 지역에서 교복입고 다니는 애들 중에 그 형에게 비빌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 정후는 그 형 앞에서는 자기도 별것 아니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천하장사감 이라고 불렸다고. 정현은 순간 자라도에서는 대체 애들을 어떻게 키우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 누나들 실업계인데도 입시학원을 다니더라?”


“어, 거기도 대학 가.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덕포여상에도 진학반 있대.”


“아, 너희 아버지 덕포여상 선생님이시지? 난 상고는 다 실습 나가고, 바로 취직하는 줄 알았는데.”


정후가 빈 꼬치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아빠가 그러는데, 인문계에서 어중간하게 하는 것보다 실업계에서 내신 잘 받는 게 유리할 수도 있대.”


“그럼 우리도 실업계 가는 게 낫겠네.”


“거기 가서도 잘해야지. 실업계 애들 따로 뽑는 특별전형이 있는 대학도 있다던데.”


“어느 대학?”


“나야 모르지.”


정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누나한테 물어봐야지. 어느 대학 갈 건지.”


“네가 왜 물어봐.”


“나는 궁금한데. 너도 궁금할 것 같고.”


정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정현은 시선을 피하고 어묵 국물을 마셨다.


“피시방 갈래? 한 시간만. 오늘은 네가 좀 쏘자.”


정현은 시계를 봤다. 한 시간쯤 놀고 가도 훈련 시작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와…이런 고급정보를 듣기만 하고 피시방 한 번을 안 쏜다고?”


정후가 너무한다는 얼굴로 살짝 턱을 들었다. 정현은 주머니의 돈을 만지작거렸다. 분식값을 내고도 두 사람이 빠듯하게 한 시간 정도는 놀 만큼이 되는 것 같았다.


“딱 한 시간이다.”


정후는 웃으며 빈 컵을 내려놓고 가방을 들었다. 정현은 도시락가방을 바카라가방 안으로 밀어 넣고 뒤따랐다.


*


골목 입구의 커다란 손가락 모양 입간판이 2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는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세 명이 서 있었다. 가운데 아이가 담배를 입에서 떼었다.


반지 낀 손가락 사이로 연기가 올라왔다.


정현은 가방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꼭 연기가 도복에 밸 것 같았다.


“아… 교복 입고 대놓고 피우네.”


자신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이었지만 거리가 꽤 가까웠다. 반지 낀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뭐?”


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상대가 자기 담배를 내려다보다 웃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정후가 정현의 팔꿈치를 잡았다.


“야, 가자.”


“잠깐 서 봐, 너.”


정현이 몸을 돌리려 하자 정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에요. 저희 그냥 갈게요.”


정후는 그 말만 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정현도 따라갔다. 뒤에서 욕설이 들렸다. 두 계단을 더 오른 뒤 정현이 팔을 뺐다.


“왜 잡아.”


“교복 보니까 덕포공고던데 동네 형들 다 혼내주고 갈라고?”


“쟤가 먼저 꼬나봤어.”


“네가 먼저 뭐라고 했잖아.”


정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정후가 유리문을 열자 탁한 공기가 밀려왔다. 모니터 뒤로 선들이 이리저리 엉켜 있었고, 구부린 등 사이로 담배 연기가 걸렸다. 총소리와 쇠 긁는 소리가 섞여 났다.


카운터 남자는 컵라면 뚜껑에 젓가락을 얹고 두 사람이 온 시간을 종이에 적었다. 정현은 안쪽 빈자리에 앉아 가방을 다리 사이로 넣었다.


정후가 옆자리에 앉았다.


“테란 할래, 저그 할래?”


“테란.”


“그럼 난 저그.”


정현은 총도 없는 일꾼부터 움직였다. 병사를 뽑으려면 건물이 필요했고, 건물을 지으려면 광물부터 모아야 했다.


체육관에서는 후배에게 알려 주는 쪽이었는데, 여기서는 정후에게 같은 것을 세 번씩 물었다.


첫 판은 무엇에 졌는지도 몰랐다. 두 번째에는 벙커에 병사를 넣고 입구를 지켰다. 정후가 이제 좀 한다며 웃자 더 지기 싫어졌다.


약속한 시간이 가까웠다.


“딱 한 판만 하고 간다.”


그때 적이 입구를 거치지도 않고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일꾼들이 쓰러지고 건물에서 불이 났다. 으악 하며 화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가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는데 갑자기 정현의 뒤통수에 충격이 왔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 부딪친 줄 알았다. 그런데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한 번 더 맞았다. 정현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계단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던 덕포공고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턱 아래에 여드름을 짠 자국이 붉었다. 풀어 놓은 교복 단추 사이로 은색 목걸이가 보였다. 가슴에는 김영광이라고 적힌 명찰이 붙어 있었다.


뒤에는 세 명이 더 서 있었다. 아래에서 본 두 명과 처음 보는 한 명이었다.


정후도 일어났다.


“아니, 왜 애를 때려요.”


김영광이 정후를 위아래로 훑었다. 교실에서 정후는 압도적인 존재였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너는 가만있고.”


영광의 손가락이 정현을 가리켰다.


“너,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냐?”


정현은 왼손으로 뒤통수를 만졌다.


“담배 피운다고 했는데.”


“담배 피운다고? 그래서 네가 어쩔 건데.”


“그냥 한 말인데.”


“그냥? 남한테 시비 걸어 놓고 그냥이래.”


영광이 뒤를 보며 웃었다. 뒤의 한 명도 웃으며 의자 등받이를 발로 밀었다. 정후의 손이 정현의 팔에 닿았다. 옆자리 사람이 자기 의자를 당겨 모니터 앞으로 붙었다.


“야, 니가 꼰대냐? 씨발것. 뭔데 완장질이야.”


카운터 남자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야, 너네 여기서 떠들지 말고. 게임 안 할 거면 나가.”


영광 뒤의 아이가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영광아, 나가서 하자.”


정현은 카운터 쪽을 봤다.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 계산부터 하러 나가라고 했다.


“천 원씩, 두 명 이천 원.”


정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폐와 동전이 손바닥에서 겹쳤다. 두 사람 몫을 세어 놓는데 동전 하나가 굴렀다. 뒤에서 누가 웃었다.


정후가 동전을 주워 계산대에 올리다가 정현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신호하면 튀어.”


정현은 가볍게 끄덕이고 가방을 들었다. 화면에서는 아직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


두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살짝 비좁은 계단을 내려갈 때는 앞에 둘, 뒤에 둘이었다. 정현과 정후가 네 명에게 앞뒤로 둘러싸여 걷는 모양새였다.


정현은 등에 맨 가방끈을 살짝 조였다. 아래층 현관 너머로 큰길이 보였다. 사람들이 건물 앞을 지나갔다.


김영광이 앞서 내려가며 건물 뒤쪽을 가리켰다.


“나가서 오른쪽으로.”


정후의 발이 한 계단 위에서 멈췄다.


“저희 집에 가야 되는데요.”


영광이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개새야, 집은 니미 씨발거.”


계단 위에서 누가 정현의 가방을 발로 퍽하고 찼다. 정현의 발끝이 계단 밖으로 살짝 밀렸다. 난간을 붙잡자 한 번 더 차려는 발이 보였다.


그때 정후가 갑자기 앞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앞을 막은 영광의 무릎 뒤를 정후가 발뒤꿈치로 밀어찼다. 영광의 다리가 접히며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곁에 있던 아이까지 벽 쪽으로 함께 엉켰다. 영광이 난간을 붙잡고 일어나려고 할 때 정후가 정현의 등을 떠밀었다.


“정현아, 뛰어!”


정현은 일어나려던 앞쪽의 두 명을 밟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마지막 몇 계단을 뛰어내리듯 내려가 현관 밖으로 빠져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려는데 뒤에서 뭔가 부욱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문턱에서 정후가 붙잡혀 있었다. 뒤따라 내려온 아이 하나가 뒷깃을 움켜쥐었다. 정후의 목이 젖혀졌다가 몸과 함께 돌아갔다. 다른 아이도 하나 더 달라붙었다.


세 사람이 현관 옆 벽에 뒤엉켜 부딪쳤다.


“정후야!”


정현은 몸을 돌려 다시 정후에게로 달려갔다.


그 와중에 정후가 한 명의 턱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일순 비틀거리던 아이가 입간판을 붙잡고 함께 넘어졌다. 금속 틀이 바닥을 때렸다.


“이 새끼들이!”


뒤늦게 계단에서 내려온 영광이 소리쳤다.


정현이 정후에게 매달린 아이를 떼어내려 손을 뻗자 눈썹이 옅은 아이가 앞을 막았다. 정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배에 주먹이 들어왔다. 빨랐다.


잠시 숨이 나오지 않았다. 고개가 숙여지자 곧장 턱에 무언가 날아왔다. 앞차기인가 생각할 틈도 없이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귀 안에서 났다.


정현은 한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이 아스팔트에 쓸렸다.


“정현아!”


일어나야 했다.


정현은 한쪽 어깨를 빼 가방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자 눈썹 옅은 아이가 다시 다가왔다. 처음보다 한결 자신 있는 얼굴이었다.


정현은 자신에게 뻗어 오는 팔을 얼른 붙잡았다. 상대의 교복 소매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상대가 팔을 빼려 했지만 정현은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 쪽으로 상대를 당겨 놓고 상대의 발 사이로 한 걸음 크게 들어서며 몸을 휙 휘돌렸다. 상대의 가슴에 등이 닿자, 곧 등 위로 무게가 실렸다.


정현이 잡은 팔을 앞으로 끌어당기자 상대의 운동화가 바닥에서 떨어졌다. 몸이 정현의 등을 넘어갔다. 정현은 매트에서 하던 대로 소매를 놓지 않고 받쳐 당겼다. 이미 기술에 완전히 당한 상대를 배려하여 떨어지는 충격이 오롯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스포츠맨십이었다.


하지만 평소 매트에서 나던 소리와는 달리 제법 둔탁한 소리가 났다.


정현은 소매를 쥔 채 그 아이를 내려다봤다. 벌어진 입에서 숨이 헉 하고 새어 나왔다. 다른 손이 자연스레 등 쪽으로 갔다.


“자라!”


정후의 양쪽에 두 명이 매달려 있었다. 입간판과 함께 넘어진 아이도 다시 붙은 모양이었다. 정후의 셔츠 단추가 벌어져 맨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정현은 소매를 놓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영광이 욕을 퍼부으며 다가왔다. 정현은 둘 사이로 가방을 휘둘렀다. 가방 모서리가 팔에 닿자 영광이 한 걸음 물러섰다.


정후가 웅크렸던 팔을 크게 벌렸다. 정후를 잡고 있던 녀석중 한 명이 손을 놓쳤다. 정후의 힘이 얼마나 센지 다른 한 명은 앞섶을 붙잡은 채 함께 끌려왔다. 정후가 그 손과 가슴을 거칠게 쳐 냈다. 또 한 번 단추가 튀면서 손이 풀렸다.


“반장! 뛰어!”


정후가 먼저 큰길로 뛰어나갔다. 옆으로 정현이 따라 붙었다. 두 사람은 길을 건너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경적이 길게 울렸다. 차들 때문에 뒤를 쫓던 아이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운동화 밑창이 바닥을 잇달아 때렸다. 타다다다닥. 모퉁이를 하나 더 돌아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아도 옆에서 정후의 숨이 들렸다.


*


국제서림 사거리의 건물 화장실에서 두 사람은 멈췄다. 정현은 물을 받아 턱에 댔다. 손끝에 피가 묻었다. 정후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벌어진 교복을 맞췄다. 단추 두 개가 없었다.


“아, 씨. 교복 아작 났네. 아까 목있는데도 찢어진 것 같던데.”


정후는 여기에 떨어졌을 리 없는 단추를 바닥에서 찾았다. 정현은 웃으려다 배를 잡았다.


“너 아까 그거 유도 기술 아냐?”


“어.”


정현은 손바닥에 묻은 모래를 씻어 냈다.


“걔 일어났을까? 내가 넘긴 애.”


“글쎄, 앉아있긴 하던데 넋 나갔던데?”


정현은 수도꼭지를 잠갔다. 자기는 보지 못했다. 정후를 붙잡은 손을 본 뒤로는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매트에서 받쳐 당길 때는 나지 않던 소리가 자꾸 생각났다.


정후가 물었다.


“너 근데 왜 아까 가다가 돌아왔냐.”


“니가 잡혔잖아.”


“그냥 가야지.”


“너 혼자 네 명한테 다구리 당하게 두고?”


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정현을 보다가 자기 앞섶을 한 번 더 당겼다.


“정현아, 우리 이긴 거지?”


“몰라.”


“안 진 건 확실하지?”


“작년에도 너 나한테 안 졌다고 우겼잖아.”


“너도 이겼는지 모른다고 했거든?”


정현은 입술을 눌렀다. 2학년 때 서로 멱살을 잡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무슨 말로 시비가 붙었는지는 흐릿했다. 싸움이 끝났는데도 서로 먼저 놓으라고 버티던 것은 기억났다.


그 뒤로 둘이 붙어 다녔다.


“확실한건 오늘 네 단추는 졌다.” 정후가 웃다가 입술을 당겼다. 정현도 웃으려다 손목시계를 보고 멈췄다.


“아, 훈련.”


정후가 말했다. 정현은 가방을 열었다. 구겨진 도복 위로 수학바카라이 보였다. 그 사이에 자기 프린트와 정후에게 빌린 것이 나란히 끼어 있었다.


“전화해. 전에도 늦었는데 전화 안 해서 코치한테 혼났다며.”


“어, 해야지.”


정현은 주머니를 뒤졌다. 게임비를 내고 남은 십 원짜리를 손바닥에 올렸다. 정후가 백 원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이거 써.”


“돈 없다며.”


“야, 됐어. 집에 걸어가면 돼.”


정현이 정후를 봤다.


“내가 나중에 줄게.”


“전화나 해.”


정현은 건물 밖 공중전화에서 체육관 번호를 눌렀다. 후배가 받았다. 뒤에서 매트 치는 소리가 났다.


“코치님 좀 바꿔 줘.”


기다리는 동안 유리 칸막이에 비친 교복 깃을 봤다. 턱에서 흐른 피가 묻어 있었다.


“조정현, 어디야?”


“국제서림 앞이요. 죄송해요. 피시방 갔다가 시비가 붙어서…….”


“싸웠어?”


정현이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지금 너 혼자야?”


“친구랑 있어요.”


“지금 올 거야?”


“네.”


“그럼 둘 다 바로 와.”


정현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너도 같이 오래.”


“나도?”


“응.”


정후는 가방을 고쳐 멨다.


“가자.”


*


체육관 유리문 안에서는 아이들이 둘씩 마주 서 있었다. 도복을 잡아당기며 몸을 돌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늘 정현과 짝을 하던 후배는 다른 선배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


정현은 신발을 벗었다. 매트 위로 올라가려는데 코치가 손을 들었다.


“거기 앉아.”


벽 쪽 의자였다.


정후도 옆에 앉았다. 교복 앞섶을 무릎 위에서 맞춰 놓았다. 코치는 정현의 턱에 묻은 피를 보고 휴지를 건넸다.


정현은 턱을 닦고 가방을 무릎으로 끌어올렸다.


“도복은 나중에 갈아입고.”


지퍼를 잡은 손이 멈췄다.


“처음부터 이야기해 봐.”


정현은 입술을 한 번 적셨다.


“제가 먼저 뭐라고 하긴 했어요.”


코치는 대답하지 않고 기다렸다. 안쪽에서 누가 매트에 넘어졌다. 정현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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