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다는 것

섬 속의 섬, 비양도를 걸으며

by오션펌킨

성실하다는 것은 절대선은 아니다. 그러나 성실함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것들을 대면할 때면 숙연해지곤 한다. 내 삶이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판단되어 무기력감에 허우적거릴 때 의지적으로라도 일상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어렵다. 아침 일찍 눈을 뜨지만 일어나서 할 일이 없다는 무망감에 누워있게 된다.

잠깐만 볼까 하는 마음으로 짧은 동영상 몇 편을 보다 보면 두세 시간은 훌쩍 가버린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나면 배가 고파진다. 배꼽시계가 알려주는 허기짐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몸에 나쁜 음식은 넣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냉장고를 뒤져 가능한 집에서 조리한 음식으로 허기를 채운다. 따뜻하게 커피를 마시고 잠시 식탁에 앉아 있다 보면 오후가 훌쩍 지나가 버린다. 곧 저녁이다. 늦은 저녁은 건강에 좋지 않으니 야채나 삶은 달걀 등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다시 눕는다. 아니, 누워있어도 속이 불편하지 않기 위해 적게 먹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방구석 방황은 오래가지는 않는다. 길어야 일주일, 나름의 합리화를 만들어 가면서 버티다가 등산이라도 간다고 집을 나서거나 약속을 잡는다. 일부러 일상을 바쁘게 만들어 며칠을 움직이다 보면 다시 생기를 찾기도 하고 의무적으로 일상으로 돌아가곤 한다. 가족들 걱정시키고 싶지 않고 잔소리도 듣고 싶지 않은 마음에 몸부터 일으켜 세운다. 내키지 않은 마음일지라도 일상을 유지하다 보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어린 마음일 때는 편하게 쉴 수도 없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차라리 그런 긴장감이 나를 나락 끝까지 가게 하지는 않았다.

가족이지만 버거울 때가 있다.

극단적으로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울 때는 가족도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 기댈 수 있는 포근한 노인이 될 줄 알았던 부모가 고집스럽고 옹졸한 모습을 보일 때 나의 마음에도 한계가 생긴다. 모성애가 본능이 아닌 것처럼 효심도 자연스러운 감정은 아니다.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도 한계가 있고 키워준 공로에 대한 보답도 총량이 있는 것 같다.

본인의 자격지심 때문에 상대방의 태도가 불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한 일이다. 나이가 들고 힘이 빠져 옛날의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다면 인정하고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는 것이 맞다. 그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하고 가족들을 몰아세우는 것은 폭력이다. 물건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폭행을 해야만 폭력이 아니다. 자기 뜻대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고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그 상대를 모욕하는 것이다. 가족이라도 각자의 삶의 방식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젊은 시절만 기억하고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세로 타인을 힘들게 하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다.

개개인으로 분리해 놓고 보면 가족 구성원 각자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으면 자신과 비교해서 다른 부분을 비난의 대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오면서 틀리지 않았고 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와 다른 방식도 틀리지 않았다면 그 또한 옳은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방식이 다를 뿐인데, 당장 자신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이다.

가족으로부터 온전한 독립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개별적 존재라는 것은 인정받아 마땅할 일이다. 일상에서 숨이 막히는 것처럼 답답함을 느낄 때는 단 하루라도 여행을 떠나보면 좀 나아진다. 돌아갈 마음도 생기곤 한다. 어쩌면 혼자 하는 여행을 즐기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관계에 지쳐서 떠나는 여행에서 오롯이 혼자이고 싶기 때문이지 않을까.

철저하게 나를 방치했던 시기가 떠올랐다. 목적도 없는 삶에서 나아갈 방향까지 잊고 주저앉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요즘 언급되기 시작하는 "고기능 우울증"이 그 당시 나의 증상이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에는 우울증이라고 의식하지도 못했다. 단순히 실패에 의한 좌절감으로 잠시 멈추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생각 하나, "지금 죽어도 두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문장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애써 떨쳐냈지만 불쑥 밀고 들어오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마음은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생각들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르는 것일까?

그 시기에 나는 정말 그냥 살았다. 미래를 계획하거나 건설적인 설계를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눈앞에 놓인 어떤 것들만 도장 깨기 하듯 하나씩 처리해 나간다는 생각으로 일상을 살아 냈었다. 그때는 오히려 상처도 받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고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존에만 집중했었다. 그러다가 그곳을 떠난 이유는 지인의 도움 요청 때문이었다.

살고 있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많은 것을 감내하면서 이동을 했다. 그곳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인을 위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살아낼 뿐이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어쩌면 이런 나의 태도 때문에 지인이 더 상처받았을 수도 있었겠다. 살아온 관성이 있어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냈고 일에도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 영광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늘 어디론가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

그리고 떠날 때가 되었음을 감지한 때에는 즉시 떠났다. 결국은 가족에게로 돌아갔지만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저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아니지만 변화하지 않으면 죽은 삶이나 다름없다는 위기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변해야 할까?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전의 삶과 완전히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찾았다. 명분과 체면을 중시했던 것들을 부숴버렸다. 기존의 나를 아는 환경은 일부러 더 피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환경에 나를 노출시켜서 그곳에서 적응하고 살아가는 나를 지켜보기로 했다.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는 법을 익히겠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다. 사람들의 편견을 견디고 이겨내는 방법을 배우고 공동체 속에서 유연하게 살 수 있게 변해야 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변해야 하는 것이 맞다.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고집스럽게 버텼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오고 나서야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상대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 과정이 녹록지는 않았다. 그래도 작은 목표가 있어서 버틸만했다. 처음엔 시험만 보자고 도전했었다. 욕심이 생겨 합격하여 자격증까지 받아야 했다. 그 뒤는 없었다. 일단 합격하고 보자였다. 과정이 나쁘지 않았다. 행복한 과정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격증 취득의 목적이 정말 그 합격증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합격해서 그 자격증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문득문득 불안한 마음이 생기면 초조해졌었다. 합격하고 나면 끝인데, 그러면 나는 또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할까 걱정이 올라올 때가 있었다. 하지만 못 먹어도 "GO"였다.

나에 관한 모든 것들을 리셋시키고 싶을 때 시작한 목표였지만 그 과정 중에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합격 후 기쁜 마음은 아니었다. 떨어지지 않아 창피하지 않은 마음이었다. 내 삶에 혁신적인 변화를 줄 수는 없겠지만 안정적인 나의 노후를 위해 천천히 무엇이든 하자는 마음이 생기면서 자격증 한 장을 바라보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도 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비양도를 조용히 걸으면서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 의지나 계획으로 온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주어지는 것을 거스르지 않고 성실하게 버텨온 결과였다. 가슴 벅찬 느낌은 아니지만 성실함의 결과에 대한 뿌듯함은 남아 있었다.

앞 날에 대한 불안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떤 새로운 목표를 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끝이 어땠으면 좋겠다는 기대감도 없다. 그저 막연하기만 하다. 다만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것에 성실하게 임할 자세는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 여정을 어떻게 지나오느냐가 한 인간을 정의하는 수단이 되지 않겠는가? 방황을 하는 동안에도 이전의 나와 다름없던 것은 그 방향이었다.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타인에게도 나에게도 해롭지 않은 방법을 모색하며 순리에 맞도록 걸어왔다. 그러니 남은 시간도 같은 방식으로 성실하게 살아 낸다면 죽음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대의나 명분은 없다. 주어졌으니 살아낼 뿐이다. 결과를 모르니 조심할 따름이다. 혼자서는 두려우니 같이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순조롭기를 염원해 볼 뿐이고.

지인과 함께 비양도를 걸으며 멋진 풍경에 감탄하고 맛있는 음식에 감동하면서 즐거운 오후 한때를 보내고 왔다. 깊은 생각과 내면의 바닥까지 끌어내어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알 듯했다. 지인이 살아온 시간과 내가 살아낸 시간이 같지는 않지만 각자의 삶 속에 녹아있는 고뇌와 고통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찬란한 햇볕 아래 아이같이 웃으며 행복해할 수 있는 그 순간이 주어진 것은 그 긴 시간에 대한 보답이지 않을까.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