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가지 시간
지내다 보면 삶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다 보면 나무만 보게 될 때가 있다.
해야 할 일을 성실히 해내고 있는데도, 문득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어진다.
너무 열심히 살다 보면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한다.
오늘을 살아가기보다 미래를 준비하고, 다음 일을 걱정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점을 향해 계속 몸을 기울인다. 그런 시간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한동안은 한 가지 일에 온전히 빠져야 할 때도 있다. 삶의 모든 영역을 균형 있게 돌보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깊은 몰입을 방해할 때도 있다.
다만 몰입을 마치고 돌아오려 할 때, 돌아갈 곳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몰입하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무겁고, 이유 없이 삶이 메마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해야 할 일은 하고 있는데 계속 부족한 기분이 든다. 이럴 때 나는 시간을 몇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본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최근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무엇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지, 지금 내게 어떤 시간이 필요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내가 나누어 본 시간은 다섯 가지다. 존재하기, 바라보기, 삶의 기반 돌보기, 아웃풋 내기, 그리고 직접적인 영향 주기. 이 다섯 가지는 완벽한 균형을 만들기 위한 항목이라기보다, 삶이 기울었을 때 다시 돌아오기 위한 좌표에 가깝다.
존재하기는 경험 자체로 이미 완결되는 시간이다.
맛있고 건강한 점심을 먹는 것,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 여행을 가는 것, 천천히 산바카라하는 것, 햇볕을 받으며 차를 마시는 것. 이런 시간에는 그 이후에 무엇이 남지 않아도 된다.
좋은 점심식사가 오후의 생산성을 높여주지 않아도 괜찮다. 가족과의 시간이 관계를 위한 투자로 계산되지 않아도 된다. 여행에서 특별한 교훈이나 콘텐츠를 얻지 못해도 된다.
그저 그 시간을 누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순간들을 위해 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삶이 바빠질수록 존재의 시간마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버리기 쉽다.
잘 쉬어야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말하고, 건강을 챙겨야 오래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 중에도 사진과 기록을 남기고, 그 경험을 언젠가 어떻게 활용할지 궁리한다.
그렇게 모든 경험에 효용을 붙이기 시작하면 삶은 점점 거대한 준비 과정처럼 변한다.
현재는 언제나 미래를 위한 재료가 되고, 정작 살아 있는 순간은 뒤로 밀린다.
나에게 일기 쓰기와 글쓰기의 일부도 존재하기에 속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라, 내 삶을 천천히 되짚고 음미하기 위해 쓰는 글이다.
그날의 감정을 문장으로 옮기고,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순간을 다시 바라보는 일.
그런 글쓰기는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삶에 한 번 더 머무는 일에 가깝다.
같은 행동이라도 목적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간이 될 수 있다.
글을 발표하기 위해 쓴다면 아웃풋의 시간이다. 장기 계획을 정리하기 위해 쓴다면 바라보기의 시간이다.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기 위해 쓴다면 존재하기의 시간이 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하며 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이다.
존재하기의 시간에는 이런 질문이 어울린다.
나는 오늘 무엇을 이루었는가.
그보다 먼저, 나는 오늘 무엇을 충분히 경험했는가.
바라보기는 삶 안에서 잠시 삶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다.
계속 걷기만 하다 보면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가
끔은 멈춰서 지도를 펼쳐야 한다.
나에게 바라보기는 미래를 계획하고, 공부하고, 삶을 점검하는 시간이다.
하루를 돌아볼 수도 있고, 일주일의 리듬을 살펴볼 수도 있다. 몇 달 동안 반복된 패턴을 발견하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원하는 삶과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는 일을 바라보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라보기는 단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정하는 것보다 조금 더 깊다.
계획은 묻는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바라보기는 묻는다.
나는 왜 이것을 하려 하는가.
지금 가는 방향은 여전히 나에게 맞는가.
처음 세운 목표가 지금도 유효한가.
삶의 방향은 한 번 정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전의 나에게 중요했던 목표가 지금의 나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기준을 따라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릴 때도 있다.
바라보기가 부족하면 우리는 아주 성실하게 엉뚱한 곳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바라보기 역시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계속 분석하고 계획하기만 하면서 실제 삶으로 내려오지 못할 수 있다. 더 확실해진 뒤 시작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삶은 완전히 확실해지지 않는다.
나 자신을 너무 오래 관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힘을 잃기도 한다.
그러므로 바라보기는 삶을 피하기 위한 거리가 아니라, 다시 삶 안으로 잘 돌아오기 위한 거리여야 한다.
멀리서 바라보되, 그곳에 계속 머물지는 않는 것.
지도를 보았다면 다시 걸어야 한다.
삶의 기반을 돌보는 시간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병원에 가는 것, 청소하는 것, 빨래하는 것, 식사를 준비하는 것, 서류를 처리하고 일정을 정리하는 것.
몸과 집과 생활을 무너지지 않게 유지하는 일들이다.
이런 일은 끝나지 않는다.
청소를 해도 다시 먼지가 쌓이고, 설거지를 해도 다시 그릇이 생긴다.
밥을 먹어도 다시 배가 고프고, 잠을 자도 다시 피곤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반복되는 일을 가치가 낮은 일로 여기기도 한다.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은 성취로 보이지만, 이미 있는 것을 유지하는 일은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삶은 창조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이다.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 충분히 자는 것, 제때 밥을 먹는 것. 집 안의 물건을 정리하고,
밀린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다음 날 사용할 공간과 도구를 준비하는 것.
이런 일들은 삶의 주변부가 아니라 삶의 인프라에 해당한다.
나의 경우 환경을 돌보는 일이 밀리기 시작하면 삶 전체에 대한 회의감도 조금씩 커진다.
방이 어지럽고, 식사가 불규칙해지고, 해야 할 작은 일들이 쌓이면 쉬고 있어도 쉬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미완료의 신호들이 계속 마음을 붙잡는다.
환경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가 언제나 같지는 않다. 방이 어지럽다고 마음까지 어지러운 것은 아니다.
다만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삶의 기반이 흔들리면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지친다.
반대로 기본적인 환경이 정돈되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감각이 생긴다.
존재하기가 삶을 누리는 시간이라면,
기반을 돌보는 일은 앞으로도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조건을 유지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화려하지 않다.
대부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띄는 성취보다 먼저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건강, 수면, 생활 공간, 재정, 일정, 몸의 감각과 같은 것들이다.
기반은 무너지고 나서야 중요성이 보인다.
그러므로 삶이 이유 없이 무겁게 느껴질 때는 거창한 의미를 찾기 전에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 제대로 먹었는가.
잘 자고 있는가.
아픈 곳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머무는 공간은 나를 쉬게 해주는가.
삶의 회의감처럼 보이는 감정이 때로는 밀린 빨래와 수면 부족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아웃풋은 내가 가진 경험과 생각을 바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시간이다.
글을 쓰고, 수업 자료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콘텐츠를 만드는 것.
내 안에 있던 것을 다른 사람도 만날 수 있는 모습으로 옮기는 일이다.
존재하기의 시간은 경험 자체로 충분하지만, 아웃풋의 시간은 결과물을 향한다.
다 쓴 글, 완성된 영상, 준비된 수업, 사용할 수 있는 자료처럼 행위가 끝난 뒤에도 남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아웃풋을 단순한 생산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만든 무언가로 누군가를 돕는 것.
누군가의 이해를 넓히거나, 마음을 가볍게 하거나, 몸을 더 편안하게 만드는 것.
아웃풋은 내 안의 것을 세상과 연결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시간이 커질수록 조심해야 하는 점도 있다.
모든 경험이 결과물을 위한 재료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면서도 글감을 찾고, 누군가와 대화하면서도 문장을 떠올리고,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이 경험을 나중에 어떻게 표현할지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 나는 경험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채집하고 있는 것에 가까워진다.
삶을 글로 옮기는 일은 아름답지만, 때로는 글을 위해 삶을 사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또한 결과물만을 가치 있게 여기게 될 위험도 있다.
완성된 글은 가치 있고, 쓰다 버린 글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공개된 콘텐츠는 성취로 여기면서도, 오래 생각한 시간과 실패한 시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던 시간을 낭비처럼 느낀다.
하지만 모든 아웃풋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들어 있다.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쉬고, 생각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시간이다.
존재하기와 바라보기에서 자라난 것이 어느 순간 하나의 결과물로 응결된다.
그러므로 아웃풋은 다른 시간을 희생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들 속에서 자란 것을 형태로 옮기는 일이어야 한다.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계속 만들어내기만 하면 언젠가는 안이 텅 비게 된다.
직접적인 영향 주고받기는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나에게는 요가 강사로 일하는 시간이 여기에 속한다.
미리 만들어둔 요가 영상이나 수업 자료는 아웃풋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수업에서 사람을 만나고, 그날의 호흡과 표정과 몸의 긴장을 살피며
움직임을 조절하는 일은 조금 다르다.
그 시간에는 미리 정해진 결과물보다 현장에서 주고받는 감각이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동시에 나도 상대에게 영향을 받는다.
수강생들의 몸 상태에 따라 수업의 속도가 달라진다. 한 사람의 호흡이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기도 한다. 내가 준비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만들어간다.
직접적인 영향은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다.
몸으로 교류하고, 반응을 읽고, 주의를 건네고, 다시 반응을 받는 과정이다.
이 시간의 의미는 결과물처럼 명확하게 남지 않을 때가 많다.
수업이 끝난 뒤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몇 장의 자료나 완성된 물건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날 처음으로 자신의 호흡을 천천히 느껴보았을 수 있다.
누군가는 늘 불편하게 여기던 자신의 몸을 잠시 덜 미워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을 했을지 모른다.
그 변화는 기록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는다고 해서 작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남기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삶에는 사람에게 직접 남는 것들도 있다.
한 문장, 한 번의 시선, 한 번의 수업, 누군가가 자기 몸을 대하는 방식을 조금 바꾸는 경험.
직접적인 영향은 내가 무엇을 남겼는가보다, 함께 있는 동안 무엇이 오갔는가에 가까운 시간이다.
이 다섯 가지 시간을 매일 같은 비율로 나누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기에는 아웃풋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거나, 집중해서 결과물을 내야 할 때도 있다.
몸이 아프거나 생활이 무너졌을 때는 삶의 기반을 돌보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써야 할 수도 있다.
휴가 중에는 존재하기의 시간이 커지고, 진로를 고민하는 시기에는 바라보기의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매일 모든 영역을 조금씩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분류조차 또 하나의 관리 항목이 된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균형 잡힌 하루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남아 있는가를 보는 일이다.
몰입한 뒤 존재하기로 돌아올 수 있는가.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 뒤 혼자 회복할 수 있는가.
오래 바라본 뒤 실제 행동으로 내려올 수 있는가.
삶의 기반을 정돈하다가 정작 삶을 누리는 일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모든 경험을 아웃풋으로 바꾸지 않고 그저 경험으로 남겨둘 수 있는가.
삶은 고정된 균형보다는 순환에 가깝다.
경험하고, 바라보고, 돌보고, 만들고, 만난다.
그리고 다시 경험한다.
이 다섯 가지 시간을 이렇게도 부르고 싶다.
누리기.
바라보기.
돌보기.
만들기.
만나기.
누리고, 바라보고, 돌보고, 만들고, 만나는 것.
어느 하나만으로는 삶이 완성되지 않는다.
계속 누리기만 하면 현실을 피하게 될 수 있다. 계속 바라보기만 하면 생각 속에 머물게 된다. 계속 돌보기만 하면 삶을 정리하느라 삶을 살지 못한다. 계속 만들기만 하면 모든 경험이 생산의 재료가 된다. 계속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정작 나 자신의 감각을 잃을 수 있다.
각각의 시간은 다른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잘 존재해야 바라볼 것이 생긴다.
잘 바라봐야 무엇을 만들지 알 수 있다.
기반을 돌봐야 오래 만들고 만날 수 있다.
무언가를 만들어야 내 안의 것이 세상과 연결된다.
사람을 만나야 생각과 결과물이 다시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 다시 존재하기로 돌아온다.
어떤 시간이 부족한지는 시간표보다 감정이 먼저 알려줄 때가 있다.
존재하기의 시간이 부족하면 삶이 메마르게 느껴진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라보기의 시간이 부족하면 계속 바쁘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삶의 기반을 돌보는 시간이 부족하면 사소한 일에도 쉽게 무너진다.
공간과 몸과 일정이 어수선해지면서 마음까지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아웃풋의 시간이 부족하면 생각과 능력이 안에 고여 있는 것처럼 답답하다.
무언가를 표현하고 세상에 내놓고 싶다는 욕구가 쌓인다.
직접적인 영향의 시간이 부족하면 사람들과 실제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고립감이 생긴다.
반대로 어떤 시간이 지나치게 많을 때도 감정은 신호를 보낸다.
존재하기가 회피로 변하면 무기력해진다.
바라보기가 과해지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기반을 돌보는 일이 지나치면 완벽하게 정돈된 뒤에야 살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아웃풋에 몰두하면 생산하지 않는 시간에 죄바카라감을 느낀다.
사람들과 계속 만나면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시간을 점검한다는 것은 몇 시간을 어디에 썼는지 계산하는 것만은 아니다.
최근의 나는 어떤 감정을 자주 느끼고 있는가.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감정이 생겼는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인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시간인가.
삶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음 사실 막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질 때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도, 무언가를 깊이 배우고 만들 때도 우리는 기울어진다.
때로는 한동안 나무만 보아야 비로소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방법을 잊는 것이다.
최근 나는 무엇을 충분히 누렸는가.
한 걸음 물러나 삶의 방향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내 몸과 공간과 생활을 돌보고 있는가.
세상에 내놓고 싶은 것을 실제 형태로 만들고 있는가.
사람들과 직접 만나 무엇을 주고받고 있는가.
이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어디에 오래 머물렀고, 어느 곳을 너무 오래 비워두었는지 조금씩 보인다.
균형은 언제나 정확한 중간에 서 있는 상태가 아닐지도 모른다.
기울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지금 필요한 방향으로 다시 몸을 옮기는 능력에 더 가깝다.
나는 내 시간을 완벽하게 나누고 싶어서 이 다섯 가지를 생각한 것이 아니다.
한동안 너무 멀리 가버렸다고 느낄 때, 다시 삶 전체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내가 돌아오고 싶은 삶은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충분히 누리고, 가끔 멀리 바라보고, 일상의 기반을 정성스럽게 돌보며, 내가 가진 것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과 몸과 마음으로 만나 살아가는 것.
그리고 어느 한쪽에 오래 머물렀다면 다시 묻는 것.
지금 나에게 필요한 시간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