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에서 만난 추상화

천천히 다가가니 아름다운 것들이 보였다.

by이광주

“빨리빨리.”


아마도 나는 그 말을 칠십여 년 넘게 들으며 살아왔다. 어디엔가 ‘빨리’라는 유전자가 박혀 있는 듯하다. 아홉 식구의 배고픔 속에서 자란 탓인지, 치열한 경쟁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입에 달고 살았고, 귀에 못 박히도록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말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싶어졌다. 목적지만 찍고 돌아오는 여행보다 천천히 오래 머물고. 공원을 느리게 걷다가 발길 닿는 벤치에 앉아 노을이 저무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있고 싶었다. 삶의 속도를 줄이면 놓쳤던 풍경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가려면 넓은 사거리를 건너야 한다. 어느 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옆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출발선에서 튀어나갈 육상선수들처럼 모두가 긴장한 표정이었다. 누군가는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렸고, 누군가는 잔걸음을 옮기며 초조함을 달랬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언제 바뀌려나. 붉은 신호등의 작은 불빛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몇 분도 되지 않는 기다림이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심장은 초시계처럼 째깍거리고, 발끝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간다. 사람들은 선착순 세일 매장에 먼저 가려는 듯 조급해진다.


그날은 문득 천천히 건너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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