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 입국 첫 날

설렘과 생존 사이에서

by바람따라들레

문이 열리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왔다.

한 달 전 폭우 속에서 마주했던 공항과는 달리,

이날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쿠알라룸푸르, 첫인상


2025년 11월 15일 13시, 쿠알라룸푸르 공항


우리의 첫 말레이시아 방문은 그로부터 한 달 전이었다.

학교와 집을 투어하기 위해 잠시 들른 3박 4일 동안, 매일같이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숨이 턱 막힐 듯한 습기와 낯선 공기까지, 모든 것이 버거웠다.


첫날부터 어긋난 일정은 마지막 날까지 우리를 지치게 했다.

렌트카 문제로 공항에서 발이 묶였고, 예약한 숙소는 불법 에어비앤비였다. 다음 날 우리는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쫓기듯 숙소를 옮겨야 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이어졌다. 학교 투어와 하우스 뷰잉을 하는 동안 남편은 점점 예민해졌고, 나는 지쳐만 갔다.


여행이었다면 웃고 넘겼을 일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온 방문이었기에 작은 변수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설렘보다 선택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쿠알라룸푸르의 첫인상은 요란한 하늘처럼 심란했다.

사진: Unsplash의Max LaRochelle


쿠알라룸푸르, 다시 서다


2025년 12월 27일 17시, 쿠알라룸푸르 공항


한 달 만에 우리는 다시 이 공항에 서 있었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 어쩌면 순간의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 남는 것이 있었다. 폭우와 혼란보다 국제학교를 둘러보며 받았던 인상이 더 오래 남았다. 아이에게 다른 환경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결국 나를 움직였다. 그 선택의 무게를 피하지 않겠다는, 어쩌면 조금은 오기가 섞인 각오가 나를 다시 비행기에 태웠다.


이번에는 여행이 아니라 이주였다.

캐리어 여섯 개와 아이 둘, 그리고 일주일간 정착을 도와주고 돌아갈 남편.


비장한 마음으로 도착했는데, 이상하리만큼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날씨는 맑았고 입국 수속도 길지 않았다. 집 열쇠를 건네받는 일, 인터넷과 정수기 설치, 중고차 계약까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됐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하나씩 정리될수록 긴장은 조금씩 풀렸다. 마음 한켠에 ‘이 정도면 지낼 만하겠는데.’ 하는 작은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그 평온이 오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때는 미처 하지 못했다.



쿠알라룸푸르, 남겨진 새벽


유학원을 통해 해외 정착 이주 서비스를 이용하면 200~300만 원이 든다고 했다.

우리는 그 비용 대신 남편의 비행기값과 숙식비를 선택했다.

일주일 동안 그는 집 계약, 차량 구매, 생활 인프라 정비까지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해냈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새벽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잠귀가 밝은 사람이다.

뒤척이는 소리에도 쉽게 깨는 편이다. 그래서 알람 없이도 일어날 줄 알았고

현관에서 배웅하며 “조심히 가.”

한 마디쯤은 건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새벽, 나는 깨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는 남편이 떠난 지 30분쯤 지난 뒤였다. 시계를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나는 벌떡 일어나 맨발로 집 안을 돌았다.

거실, 욕실, 작은 방. 알면서도 문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집은 고요했다. 지나치게 고요해서 그의 빈자리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그가 떠난 자리에는 생각보다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이미 각오한 이별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전화를 붙들고 울었다.

“왜 그냥 가. 인사라도 하고 가지… 이렇게 나만 두고 가면 어떡해.”


아이들 앞에서는 씩씩한 척했지만, 가장 먼저 무너진 건 나였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이제 정말, 나와 아이들만 이곳에 남았다.

설렘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생존이라는 단어만 또렷해졌다.


그리고 그 며칠 뒤, 나는 전혀 다른 이유로 완전히 무너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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