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이별하는가
오랫동안 인간은 죽은 사람을 집에 두었다. 유럽의 시골에서는 거실에 관을 놓고 이웃들이 밤새 곁을 지켰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것을 〈웨이크〉, 깨어 있는 밤이라고 불렀다. 동아시아에서는 집 안에 병풍을 치고 시신을 모신 채 사흘 동안 문상객을 맞았다. 어디서나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여름이면 더더욱 그랬다.
이별에 시간을 벌어 준 것은 차가움이었다. 처음에는 얼음이었고, 이후 냉장 기술이 병원과 장례식장으로 퍼져 나갔다. 오늘날 우리는 장례식장의 차가운 안치실에 가족을 맡기고 그 옆방에서 조문객을 맞는다. 냉장고는 산 자에게 이별을 준비할 며칠을 선물했다.
세상에는 다른 방식으로 이별하는 사람들도 있다.
티베트의 고원은 땅이 얼어 있어 묘를 파기 어렵고, 나무가 귀해 화장도 쉽지 않다. 그래서 티베트 사람들은 죽은 이를 하늘에 돌려보낸다. 장례를 맡은 사람이 시신을 산 위의 정해진 장소로 옮기면 독수리들이 내려앉는다. 독수리들이 물러나면 까마귀들이 내려와 남은 것을 거둔다. 뼈는 잘게 부숴 보릿가루에 섞어 새들에게 준다. 몸은 그렇게 하나도 남김없이 하늘로 돌아간다. 이것을 〈천장〉, 하늘 장례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몸은 영혼이 잠시 머물다 떠난 빈 그릇이다. 그 그릇을 마지막으로 다른 생명에게 내어 주는 것이 죽은 이의 마지막 보시다. 가족들은 49일 동안 죽은 이의 곁에서 경전을 읽는다. 죽은 이가 다음 생으로 가는 길에서 헤매지 않도록 길을 일러 주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지내는 사십구재도 같은 불교의 뿌리에서 나왔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의 토라자 사람들은 가족이 숨을 거둬도 곧바로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 시신을 방부 처리해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집 안에 모신다. 그동안 죽은 이는 〈아픈 사람〉으로 불린다. 가족들은 매일 음식을 차려 드리고 말을 건넨다. 장례를 치른 뒤에도 몇 년에 한 번씩 무덤을 열어 옷을 갈아입히고 함께 사진을 찍는다. 멕시코 사람들은 해마다 11월이면 죽은 가족이 돌아온다고 믿고 그들이 좋아하던 음식을 차린다. 에도 시대 일본 사람들은 죽은 이를 눕히지 않았다. 무릎을 세워 앉힌 자세로 나무통처럼 둥근 관에 모셨다. 〈좌관〉이라 불리는 이 관 속에서 죽은 이는 마치 먼 길을 떠나기 전 잠시 앉아 쉬는 사람처럼 보였다.
방식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관계의 모양이 바뀌는 일이라고.
죽음은 대개 한순간에 오지 않는다. 몸은 그보다 먼저 천천히 떠날 채비를 한다. 음식을 찾지 않게 되고, 물도 몇 모금이면 충분해진다. 잠이 길어지고, 숨이 고르지 않게 된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피부에 얼룩덜룩한 빛이 돈다. 옛 어른들은 사람이 떠나기 전 검은 숙변을 본다고 말했다. 몸의 힘이 풀리면서 오래 머물러 있던 것들이 빠져나오고, 약해진 장에서 스민 피가 변을 검게 물들이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곁을 지키는 가족들은 그것을 보며 때가 가까워졌음을 안다. 몸은 그렇게 무언가를 하나씩 내려놓는다.
그렇다면 죽어 가는 사람은 무엇을 경험할까. 호스피스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많은 환자들이 마지막 며칠 사이 먼저 떠난 가족을 꿈에서 보거나 곁에 와 있다고 말한다. 대개 그 꿈은 두렵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다고 한다. 오랫동안 의식이 흐렸던 사람이 숨을 거두기 직전 갑자기 정신이 맑아져 가족을 알아보고 작별 인사를 하는 일도 있다. 의학은 아직 이 현상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인간은 그 두려움과 함께 사는 법을 찾아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있을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왔을 때 우리는 없다. 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다르게 보았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름을 남기고, 자식을 키우고, 신을 믿고, 무언가를 짓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룬 문명의 많은 부분이 죽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다.
2020년, 캐나다의 한 연구진은 의식을 잃고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뇌파를 측정했다. 곁에서 소리를 들려주자 그들의 뇌는 건강한 사람과 비슷하게 반응했다. 말도 하지 못하고 눈도 뜨지 못하는 순간에도, 소리는 여전히 그들에게 닿고 있었다. 인간의 감각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청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 아무 대답이 없더라도 말을 건네자. 고마웠다고. 사랑한다고. 잘 가라고. 그 말은 아마 들리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이 건네진 뒤, 몸은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다. 티베트 사람들은 몸을 하늘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하늘 높이 날아오른 독수리도 언젠가는 땅에 내려앉는다. 하늘로 올라간 물이 비가 되어 다시 땅을 적시듯이. 결국 모든 것은 땅으로 돌아온다.
인간이 흙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 있다. 성경의 신은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도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고, 중국 신화의 여와는 황토를 뭉쳐 사람을 만들었다. 영어의 〈휴먼〉이라는 말도 흙을 뜻하는 옛말과 뿌리가 같다.
과학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와 질소는 흙과 풀과 동물을 거쳐 우리에게 왔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 나무가 되고, 꽃이 되고, 누군가의 숨이 될 것이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그 사이 잠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