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해지고 나서야 들리는 것들.

송광사로 들어가는 숲길에는 물소리가 따라온다.

byPhotographer akilin

길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돌에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내고,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햇살은 발아래 군데군데 밝은 자리를 만든다.

산속의 공기는 도심보다 서늘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그 길을 걸었다.

사찰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 같았지만, 사실 소리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고 바람도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그 소리를 듣는 나였다.

평소 같았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소리들이 하나씩 귀에 들어왔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듣지 못하며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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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식사하고, 웃으며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도 사람들과 헤어지고 혼자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허전할 때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불을 켜면 조금 전까지 들리던 목소리들이 사라지고, 방 안에는 나 혼자 남았다.

그런 밤이면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켰다.

딱히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필요했었다.

조용한 방에 앉아 있으면 낮 동안 잊고 지냈던 생각들이 찾아온다.

괜히 서운했던 말이나 마음에 걸렸던 표정, 끝내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

혼자 있는 시간이 불편했던 이유는 어쩌면 외로움보다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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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지나 송광사 경내로 들어섰다.

오래된 기와지붕 아래로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무기둥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마당에는 햇빛이 고르게 내려앉았다.

송광사는 오랫동안 수행의 전통을 이어온 사찰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계절을 맞고 보냈을 것이다.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고, 마당을 쓸고, 저녁이면 산 너머로 사라지는 빛을 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루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잠시 떠올려 보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도 같은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시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우리는 대개 특별한 날을 기억한다.

기쁜 일이 있었던 날이나 오래 기다리던 일이 이루어진 날, 혹은 견디기 어려웠던 날들.

그러나 삶의 대부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삶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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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 앞에 잠시 앉으니 처마 끝으로 하늘이 보였다.

햇빛을 받은 기와는 밝았고, 처마 아래에는 서늘한 그늘이 남아 있었다.

멀리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진다.

한참 뒤 바람이 불었다.

처마 아래 풍경이 작은 소리를 냈다.

맑고 짧은 울림이었다.

그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소리가 없는 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느껴본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혼자 있는 시간이 어렵지 않았다.

마당에 앉아 개미가 지나가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고, 창밖에 비가 내리면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자국을 따라가며 놀기도 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아도 심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자꾸 무언가로 채우게 되었다.

손에는 늘 휴대전화가 있었고, 잠깐의 틈에도 새로운 소식을 확인하며,누군가의 하루를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따라가느라 정작 내 마음이 어떤지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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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의 마당에 앉아 있으니 오래전 잊고 지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어린 날의 오후.

그때는 고요가 불편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나는 조용한 시간을 견디기 어려워졌을까.

사찰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은 저마다 달랐다.

두 손을 모으고 전각 앞에 서 있는 사람도 있었고, 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혼자 걸어가는 사람도 보였다.

그들의 사연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누구에게나 말로 다 전하지 못하는 마음이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에는 사소하고, 혼자 간직하기에는 조금 무거운 것들.

예전에는 그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는 사람.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 주는 사람.

물론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서만 위안을 구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스스로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도 필요했다.

서운했다면 서운했다고, 외로웠다면 외로웠다고.

그 마음을 굳이 다른 감정으로 바꾸지 않고 인정하는 일.

그날 나는 오랜만에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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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빛이 조금씩 기울었다.

마당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길어지고 나무기둥의 색도 한층 짙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경내를 천천히 걸었다.

오래된 건물 사이로 난 길에는 사람들이 오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오래도록 머물렀던 자리에도 새로운 사람이 찾아오고, 계절이 바뀌면 나무들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그 평범한 사실이 좋았다.

세상이 끊임없이 달라지는 동안에도 제자리를 지키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머무는 풍경이 사람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사찰을 나서기 전 마당을 다시 돌아보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고요가 낯설지 않았다.

돌아오는 숲길에도 물소리가 들렸다.

올라갈 때보다 햇빛은 조금 옅어졌고 나무 아래에는 그늘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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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옮기다가 잠시 멈췄다.

계곡물이 돌 사이를 흘러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린 시절 비 오는 오후가 다시 떠올랐다.

창가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간.

누구에게도 보여줄 필요가 없었던 나의 하루.

그런 시간이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산길을 다 내려올 무렵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연락이었다.


나는 조금 더 걸었다.

귓가에는 여전히 물소리가 남아 있었다.

고요해지고 나서야 들리는 것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내 마음의 목소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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