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 있다

순천만습지

byPhotographer akilin

순천만습지에서는 걸음이 느려진다.

갈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갈대가 한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그 너머로 넓은 갯벌이 모습을 드러낸다.

목적지가 없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빨리 가고 싶지 않다.

평소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가장 먼저 시간을 확인했고, 얼마나 걸리는지 계산했다. 조금이라도 효율적인 길을 찾았고, 약속 장소에는 가능한 한 일찍 도착하려 했다.

바쁘게 사는 것이 성실하게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믿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날 순천만습지에서는 시계를 자주 보지 않았다.

대신 자꾸 옆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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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었다.

수많은 갈대가 동시에 흔들렸다.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바람이 지나가면 제자리로 돌아왔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물결처럼 보였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갈대가 바람을 거스르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오면 몸을 내주었다.

그렇다고 쓰러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반대로 살아왔던 것 같다.

힘든 일이 생기면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쳐도 내색하지 않는 것이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여겼다.

쉬고 싶은 날에도 할 일을 먼저 찾았다.

누군가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습관처럼 괜찮다고 대답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괜찮아서 한 말은 많지 않았다.

멈추면 안 된다는 마음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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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서 갯벌이 넓게 보였다.

그 위로 물길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곧은 길이 거의 없었다.

크게 휘어지는 곳이 있는가 하면 한참을 돌아 다시 바다 쪽으로 향하는 물길도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사람은 왜 자신의 삶만큼은 반듯하게 흘러가기를 바라는 걸까.

학교를 마치면 다음으로 가야 할 곳이 있고, 어느 나이가 되면 이루어야 할 것이 생긴다.

그 보이지 않는 순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의 속도가 내 삶의 기준이 된다.

누군가 앞서가면 마음이 급해지고, 잠시 멈추면 뒤처진 것처럼 느껴진다.

나 역시 자주 그랬다.

이미 제법 먼 길을 걸어왔는데도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보다 누가 나보다 앞에 있는지를 먼저 살폈다.

그러느라 내 길이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본 적이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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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의 물길에는 목적지를 향해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휘어질 곳에서는 휘어지고, 좁아질 곳에서는 좁아졌다.

그래도 결국 바다와 이어져 있었다.

그 단순한 풍경이 마음에 남았다.

돌아가는 길도 길일 수 있다는 것.

잠시 멈춘다고 방향을 잃는 것은 아니라는 것.

어쩌면 내가 늦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도 누군가의 시간과 비교했기 때문에 늦어 보였던 것은 아닐까.

삶에는 애초에 하나의 시간표가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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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길을 다시 걸었다.

앞에서 걷던 사람들은 어느새 멀어져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길 가장자리에 서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갈대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새 한 마리가 갯벌 위를 낮게 날았다.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빨리 걷는 동안에는 몰랐던 풍경이었다.

속도를 늦춘다고 시간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제야 내가 지나고 있는 시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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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급해졌을까.

생각해보면 분명한 시작은 없었다.

하나를 끝내면 다음 일을 준비했고, 목표에 도착하면 또 다른 목표를 만들었다.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할 때는 더 바빠졌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쉬는 날에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몸은 앉아 있는데 마음은 늘 다음 장소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정작 지금이라는 시간에는 오래 머물지 못했다.

순천만의 느린 풍경 속에서야 그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늘 다음 시간을 먼저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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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걷는다.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오늘만큼은 조금 늦어도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도 상관없었다.

갈대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고 물길은 자신의 모양대로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속도가 있을 것이다.

아직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다른 사람의 걸음에 맞추느라 내 호흡을 놓치지는 않았으면 한다.

가끔은 멈춰 풍경을 보고, 돌아가야 할 때는 돌아가면서.

그렇게 가도 결국 내가 가야 할 곳에 닿을 수 있기를.

순천만습지를 나오며 시계를 확인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내가 지나온 시간을 제대로 걸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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