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창업은 내게
해보고 싶은 일이 아니라 검증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증명해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기계를 산 것도 아니고,
샘플을 만든 것도 아니고,
주문을 받아본 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사업을 할 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예비창업 신청서를 썼다.
그 시기의 나는 창업을 말하기에 앞서,
이력서부터 써야 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갑자기 일이 끊겼고,
믿었던 관계는 무너졌고,
가까운 곳에서는 이해보다 판단이 먼저 왔다.
하루아침에 여러 개가 동시에 무너졌다.
일도, 관계도,
내가 괜찮다고 믿었던 마음도.
처음엔 창업보다 취업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당장 통장에 들어올 돈이 필요했고,
매달 빠져나가는 돈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불안은 생각보다 구체적인 숫자로 다가왔다.
카드값, 생활비, 고정비.
그리고 육아까지.
감정은 무너졌지만,
청구서는 멈추지 않았고
내 아이의 세상은 아직 내가 전부였다.
그래서 이력서를 열었다.
경력사항을 적고,
내가 해왔던 일을 정리하고,
지원동기와 자기소개를 다시 썼다.
사무, 고객응대, 발주, 일정관리, 현장 지원.
그동안 해온 일들은 분명 있었지만,
그걸 다시 문장으로 쓰는 일은 이상하게 나를 작게 만들었다.
나는 분명 일을 해왔는데,
종이 위에서는 다시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마음 한쪽에서는 다른 생각이 올라왔다.
정말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게 답일까.
월급이 필요한 건 맞았다.
하지만 월급만으로는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 질문 앞에서 자꾸 오래된 꿈이 떠올랐다.
언젠가 만들고 싶었던 공간.
바카라과 사람이 오가고,
지역의 이야기가 쌓이는 공간.
그때의 나는 사람에게 많이 무너져 있었다.
믿었던 관계는 무너졌고,
가까운 말들은 위로보다 판단에 가까웠다.
매일같이 핸드폰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더는 아무 연락도 받고 싶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나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오해도, 변명도, 해명도,
전부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모든 걸 그만두고 싶었다.
그런데도 예전과 다르게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다정한 사람이고 싶었다.
사람에게 무너졌다고 해서
사람을 향한 마음까지 잃고 싶지는 않았다.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내가 믿었던 태도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으로 남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나는 내가 좋아했던 나의 방향을 전부 잃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에게 무너진 사람이
다시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을 꿈꾼다는 것.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함 때문에
나는 그 꿈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그 공간은 아직 멀리 있었지만,
그 꿈을 완전히 접고 싶지는 않았다.
문제는 꿈이 아니라 구조였다.
공간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려면 팔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꿨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으로 버틸 수 있는가.”
그 질문 끝에 창업이라는 단어가 남았다.
지역은 점점 조용해지고 있다.
사람은 줄고, 가게는 바뀌고, 익숙했던 자리는 하나씩 비어갔다.
나는 그런 지역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
떠나지 못해서 남은 것이 아니라,
아직 여기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인구가 줄어드는 지역에서,
그래도 무언가를 시작해 보겠다는 사람들을 찾는 예비창업 공고를 봤다.
처음에는 내가 그 신청서를 써도 되는지 몰랐다.
아직 아이디어도 없고, 제품도 없고, 기술도 없고, 돈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언젠가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
그 공간을 유지하려면 먼저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는 현실감.
그리고 그 사이에서 겨우 붙잡은 마음.
그게 전부였다.
그래도 신청서를 열었다.
그건 창업에 대한 확신이라기보다,
내가 계속 이력서만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력서를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나는 생계를 미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창업만 바라보며 버틸 만큼 여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한쪽에는 이력서를 두고, 다른 한쪽에는 창업계획서를 두었다.
한 문서에는 내가 해온 일을 적었고, 다른 문서에는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적었다.
하나는 다시 어딘가에 들어가기 위한 문서였고,
다른 하나는 내 일을 만들어보기 위한 문서였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취업이 필요했고, 동시에 창업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안정이 필요했지만, 다시 내 삶을 남의 일정에만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서 예비창업 신청서를 썼다.
할 수 있어서 쓴 게 아니었다.
준비가 끝나서 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썼다.
지금 내가 가진 게 무엇인지, 없는 게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신청서를 쓰면서 처음으로 내 생각을 숫자로 바꿔봤다.
기계는 얼마인지,
재료는 얼마나 드는지,
하나를 팔면 얼마가 남는지,
누가 이걸 돈을 내고 사는지.
머릿속에서는 그럴듯했던 일이
종이 위에서는 계속 막혔다.
내 물건을 만들고 싶다는 말은 쉬웠지만,
그걸 팔 수 있는 구조로 설명하는 일은 어려웠다.
하고 싶은 일과 팔리는 일은 달랐다.
좋아 보이는 것과 돈을 내고 사는 것은 달랐다.
그때부터 창업은 내게
해보고 싶은 일이 아니라 검증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증명해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때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사업을 할 줄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게 됐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항상 준비된 사람만 출발선에 서는 것은 아니라는 것.
때로는 이력서와 창업계획서 사이에서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 시작된다.
나는 어디에 다시 들어갈 것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만들어
나를 다시 살아갈 의미를 만들어낼 것인가.
지금의 나는 완성된 창업자가 아니다.
다만,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내가 살아가기 위해 살 방법을 찾기 시작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첫 문장은
이력서가 아니라 창업계획서에 조금 더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