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보다 먼저 찾아온 오후 5시

합격은 기회였지만, 출발선은 사업계획서 밖에서 먼저 시작되고 있었다.

byAnotherScent

예비창업자패키지에 합격했다.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 시기 내가 가장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창업의 기회보다 안정적인 수입원이었다.


청년 인턴 기간제 근로자에는 떨어졌다.

동종업계라서 그래도 내 경력이 조금은 반영되지 않을까 싶어
대기업 면접도 다녀왔다.

하지만 면접장에서 느낀 것은 기대와 조금 달랐다.

그들은 내 이력서를 충분히 읽고 온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어떤 업무를 맡았는지.

이전 온라인 게임에서 어느 정도의 바카라임과 조건으로 일했는지.

그런 것들은 면접 안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결국 제시된 조건은 최저시급에 가까웠다.


그때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분명 몇 년 동안 일해왔는데,
다시 처음부터 가격이 매겨지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취업 시장에서는 내 경력이 생각보다 쉽게 지워졌다.


그런데 가장 기대하지 않았고,
가장 가볍게 넣었다고 생각했던

예비창업자패키지는 덜컥 붙었다.


아이러니했다.

안정적인 월급을 기대한 자리에서는 내 시간이 낮게 계산됐고,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창업 지원사업에서는 내 가능성이 먼저 통과됐다.


그래서 합격 소식을 듣고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기회가 생긴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 기회는 당장의 생계를 해결해 주는 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이상한 방향의 신호 같았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은 안전한 길을 찾을 때가 아니라,
무모해 보여도 직접 해보라는 쪽으로 밀려난 건지도 모르겠다고."


합격은 끝이 아니라 출발선이었다.


그 출발선은 생각보다 덜 낭만적이었고,
생각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앞으로 시작될 강의 시간은 오후 5시부터 9시.

그 시간대는 아이를 키우는 사람에게
단순히 4시간을 비워두면 되는 시간이 아니다.


하원 이후의 저녁.

식사와 씻기기.

잠들기 전까지 이어지는 돌봄.

그리고 아이가 가장 쉽게 무너지는 시간.

그 모든 것이 겹치는 시간이다.


일단 시작이라도 하려면
먼저 그 시간을 대신 감당해 줄 사람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지방소도시에 생각보다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

낮 시간의 돌봄은 제도 안에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저녁 시간의 돌봄은 지원도 기회도 어렵다.


그제야 출발선의 의미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나에게 창업의 시작은제품을 정하는 일도, 브랜드 이름을 고민하는 일도 아니었다.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아이를 어디에 맡길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부터였다.'


그때의 나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퇴직금은 들어오지 않았고,
마음도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감정은 자주 흔들렸고,
생활은 계속 계산해야 했다.


그런 상태에서 강의가 시작됐다.


그래서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라기보다,
무너진 생활 위에 억지로 세워야 하는 또 하나의 일정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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