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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에 피어난 꿈

그랜드마 모제스

by은파랑

세월은 똑같이 흐른다. 얼굴에 주름이 내려앉고, 걸음이 예전처럼 가볍지 않다는 걸 어느 날 문득 알게 된다. 손끝에는 시간이 눈송이처럼 소리도 없이 쌓여 있다.

하지만 사람을 늙게 하는 것은 세월이 아니다.

마음.

더는 설레지 않는 하루가 이어지고, 가슴에 품은 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시 시작할 용기마저 놓아 버린 그때부터 영혼은 서서히 빛을 잃어 간다.

살다 보면 영혼에도 주름이 지기 마련이다. 삶이 기쁨으로만 채워지는 일이 때문이다. 상처 나고, 실망은 좀처럼 떠나지 않고, 후회는 마음 한편에 그늘을 드리운다. 그렇게 세월은 구김살을 남겨 놓는다.

그런데 영혼 주름은 부끄러운 흔적이 아니다. 그 속에는 묵묵히 견뎌 낸 날들이 있다. 울음을 삼키고 일어선 아침.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에도 한 발을 내디뎠던 하루가 곱게 접혀 있다.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제스. 미국 화가였던 그녀를 사람들은 다정하게 ‘그랜드마 모제스’라 불렀다.

그녀의 젊은 날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스물여덟에 농부 토머스와 결혼했고, 새벽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들판으로 갔다. 저녁노을이 산 너머로 스러질 때까지 땀을 흘렸다. 손은 늘 거칠었고, 하루는 늘 짧았다. 꿈을 들여다볼 틈도 없이 계절은 몇 번이고 바뀌었다. 세월은 그렇게 그녀의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손에는 관절염이 찾아왔다.

하지만 인생은, 이제 정말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아름다운 문 하나를 슬며시 열어 놓기도 한다.

일흔일곱 살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손자가 두고 간 물감과 도화지가 눈길을 붙들었다.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꿈 하나가 봄눈처럼 스르르 녹아내렸다.

‘나는 원래 화가가 되고 싶었어.’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을까. 다음 날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름진 손으로 붓을 쥐고, 굳은 손가락으로 색을 얹었다. 그림은 서툴렀고, 선은 흔들렸으며 색은 투박했다. 그래도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행복했다. 시간이 흐르자 붓끝에서 그녀만의 세상이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눈 내린 농장, 추수감사절 풍경, 크리스마스 웃음소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마을 길.

평범한 풍경들이 그녀의 가슴을 지나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담을 수 있는 따뜻함이 그림에 스며 있었다.

일흔아홉 살이 되던 해, 첫 전시회를 열었다. 사람들은 그림 앞에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거기엔 잃어버린 고향이 있었다.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냄새가 있었다. 저마다의 삶을 견디게 해 주었던 따뜻한 기억들도 가만히 숨을 쉬고 있었다. 작품은 뉴욕 화랑가에서도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백한 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붓을 들고 있었다. 그해에만 스물다섯 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평생 남긴 작품은 천육백 점에 이른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늘어 갔지만, 꿈은 한 번도 늙지 않았다.

그녀의 삶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꿈에는 나이가 없다. 늦었다는 말은 포기한 사람이 만들어 낸 핑계일 뿐이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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