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No gracias.
여름을 대표하는 한국 음식이 몇 가지나 되려나?
수많은 음식들 가운데 나의 '불호 스티커'를 받은 메뉴들 중에는 유독 여름 음식들이 많다.
쫄면, 냉면, 콩국수...
중복 더위에 태어난 사람이지만 여름을 끔찍이도 못 견뎌하는 나는, 찬음식으로 더위를 식힐 수 없는 위장을 가졌다.
덕분에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찬음식보다는 따끈한 국물이 있는 요리를 주로 먹었고, 굳이 면을 먹어야 한다면 잔치국수나 라면, 짬뽕 같은 메뉴들이 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내 호불호를 무시해야 하는 날도 있는 법.
적지 않은 나이지만, 나보다 스무 살, 혹은 마흔 살 넘게 차이나는 어른신들과의 식사 동행 때가 특히 그랬다.
장어탕, 염소탕, 콩국수..
그나마 장어탕이나 염소탕집은 그 음식들의 특수성으로 다른 메뉴를 시킬 수 있는 암묵적인 허락이 있어 다행지만, 콩국수집에 끌려가는 날은 의견 피력도 하기 전에 '전체 메뉴 통일'의 참담한 날들이 흔했다.
스테인네스 그릇과 세트처럼 어울리는 은빛 쟁반에 콩국수 그릇들이 바둑알처럼 실려오면, 사람들의 표정이 베테랑 방청객들처럼 일순간에 밝아졌다.
언제나처럼 그 테이블에서 어두운 것은, 나와 검은깨 뿐.
탱탱 거리는 금속 소리가 들리는 것 만 같은 스테인네스 그릇과, 맷돌 돌리는 이미지가 떠오르는 뽀얀 콩국물.
잘 삶아낸 누리끼리한 국수와 토마토 슬라이스, 채 썬 오이가 한데 담기고, 검은깨 고명이 톡톡 뿌려 완성되는 전형적인 여름 음식 콩국수가 상 위에 놓이면, 녀석과 나의 눈 맞춤 대결 시작이다.
앞에 놓인 콩국수 그릇을 30도쯤 내리깐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자면, '그 나이에도 편식하냐?'라는 핀잔의 소리가, 수저 놓고 물 따르는 동작처럼 자연스레 따라오곤 했다.
편식에 나이가 무슨 소용일까?
나이가 많을수록 골고루 먹지 않아도 되는데, 그 나이에 편식하냐는 헛소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나의 외증조할머니께서는 팔순의 연세에도 편식을 하셨는데..
내 기호와 별도로 콩국수는 그 맛 자체로도 말이 많은 음식이다.
부산의 돼지국밥, 속초 물회, 수원 왕갈비같이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들을 마주 할 때면, 맛이 있네 없네 이외에는 다들 그러려니~하고 큰 이견이 없던 것 같은데, 유독 이 콩국수만큼은 저마다 자기 고향의 방식이 맞다는 설왕설래가 자주 들렸다.
더러는 설탕을 뿌리고, 더러는 소금을 뿌리며 하얀색 조미료 몇 알로 지역색이 갈렸다.
콩국수는 소금이지!
무슨 소리야, 설탕 쳐, 설탕!
설탕이던 소금이던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다들 왜 그래..
누런 콩이 불려지고 으깨지며 만들어진 콩물에서 콩 특유의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데, 간을 무엇으로 맞추든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싶다.
냄새에 둔한 비염인의 코를 뚫고 느껴지는 콩 냄새가, 코털 하나하나에 아롱아롱 맺힌다.
무슨 콩내가 난다는 거야?
너 냄새도 못 느끼잖아!
무슨 냄새가 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그냥 콩 비린내가 나서 난다고 한 것이옵사온데...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것이던, 사실이던, 콩내가 느껴지는 걸 어쩌란 말인지 모르겠다.
정말 콩국수에서는 콩 비린내가 난다.,, 아주 많이..
다시 콩국수 그릇으로 시선을 옮겨 무의미한 젓가락질을 해댔다.
주변의 압박에 못 이겨, 젓가락으로 휘적휘적.
집어든 면발마다 콩의 잔재가 덕지덕지 묻어 원래의 면 색을 잃은 지 오래처럼 보인다.
애꿎은 콩국에 국수 면발을 담갔다 뺐다를 반복해 봐도, 좀처럼 국수 가락을 입에 넣을 용기가 없다.
하긴 국수가 무슨 죄겠냐 싶다.
소면, 중면, 쫄면, 칼국수면..
무엇을 가져다 삶았더라도 콩국물이 닿으면 그 면들의 본연의 식감은 사라진다.
콩국물은 정말 강적이다.
용기 내어 밥숟가락의 1/3만큼 콩국물을 떠 본다.
늘 그렇듯 혓바닥에 콩 맛이 번지고, 앞니와 입술 사이의 점막 안쪽으로 콩의 잔재와 곡물의 즙이 모래알처럼 끼어들어간다.
급하게 물을 들이켜 이리저리 헹구어보아도 이미 구순점막 구석구석 콩의 흔적이 가득하다.
영겁 같던 시간.
콩의 흔적들을 입안에서 치우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한데, 고작 반숫가락도 안될 만큼의 국물을 맛본 것이라는 현타가 오곤 한다.
참방참방, 그릇 가득한 콩국물을 어째야 하는 것일까..?
날도 더운데 콩국수나 한 사발 할까?
남편은 내게 지난 15년간 단 한 번도 그런 멘트를 하지 않았다.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달랐을까?
제대로 된 콩국수를 맛보기 힘든 중남미라는 지리적 이점과, 찬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의 식습관을 인지한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남편이 여름마다 콩국수 노래를 불렀다면 아마도 마당에서 콩 농사를 지었거나, 먹지도 않는 콩국수를 만드느라 진땀 꽤나 뺐겠지 싶다.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만들었다가 남편 입맛까지 잃게 하고 싶지 않으니 어찌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냥 제육볶음 해 줄게..)
사람들은 내게 투덜대는 음식 투정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들 했다.
콩국수와 추어탕, 장어탕이 좋아지면 진짜 어른이 된 것이라고도 했다.
그 음식들을 안 좋아하는 사람은 노화도 멈춰지려나?
영원히 안 먹을 자신 있는데...
어른 되기 싫은데..
콩국수 한 번도 안 먹고 넘어간 올해 여름에 안도하며, 라면 냄비에 물이나 올려야겠다.
#콩국수 #소금이냐 #설탕이냐 #뭣이중요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