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자의 레드 와인.

기억이 안나요.

by민영


2000년대 초.

한국에서는 와인의 인기가 한창이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와인 수입상들과 전문점 덕분으로, 편의점 싸구려 와인부터 100만 원이 넘는 고급 와인들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소주나 맥주만큼 흔한 주종으로 자리 잡았던 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저런 행사에 와인 한 병을 들고 가면, 고른 사람의 취향과 술에 대한 안목도 알 수 있고, 선물 받은 사람도 뿌듯한 마음으로 와인을 쟁여 둘 수 있었던 시기였다.


아마도 그 시절의 꽃다발 같은 것이었으리라.





소주를 제외한 모든 술이 그러하듯, 와인 역시 향으로 먼저 음미해야 하는 술이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와인 한 병을 열면, 꽃내음이 나네, 과일향이 나네..

저마다 코멘트를 달기 바쁘던 자칭, 타칭 와인 전문가들..


단기간에 유행한 것에 비해 한국 사람들의 지식 습득 속도는 엄청났다.

마치 처음 시작하는 RPG 게임 족보를 읊듯 줄줄 이어지던 그들의 설명들은 혼란스러웠고,

우아한 손동작들과 화려한 스웰링 뒤에 이어지던 전문가틱한 롤링은 부담스러웠다.



뭔 냄새가 난다고 저래?
입에 머금고 있으면 술만 빨리 취하는데...



술을 즐기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감각기관인 코가 제 역할을 못 하는 나에게, 와인은 핏빛 양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수밖에 없었으니,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일반인 와인 전문가들의 길고 긴 와인 예찬을 듣다 보면 나만 동떨어진 세상에 와있는 것만 같았다.


또 나만 촌스럽네..
레드 와인에 대해서 Level up이 필요하겠어..



레드 와인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와인을 접할일이 늘어나다 보니 나 역시 그 녀석을 알아가 보려 몇 년을 시도했었다.


와인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니..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가?


칠레 와인, 프랑스 와인, 호주 와인, 미국 와인, 아르헨티나 와인..

바디감이 어떻고, 아로마향이 어떻고...

에어링을 해야 풍미가 살아나고...

와인잔은 부딪힐 때는 청아한 소리가 나는 것을 사야 하고..

알아야 할 것들과 몸소 느껴야 하는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만 갔다.


알면 알 수록 더 아리송한 녀석...

그나마 오랜 시간 여러 종류의 와인을 마셔본 결과, 아르헨티나산 말벡으로 취향을 좁힌 것이 최선이었다.

롤링은 커녕 입에 닿기만 해도 입술 터진 사람처럼 검붉은 입가가 되는 통에 최대한 빨리 꿀떡 삼키기 바빴다.






20대부터 입에 댔던 와인과의 간극은,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좁혀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술 마시는 일이 1년에 열 번도 안되기 때문에, 어쩌다 가끔 있는 술 마시는 날에 와인을 선택하는 일이 드물었다.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술주정을 피울 수 없고, 대리기사 문화가 흔하지 않은 중남미에서 음주운전의 위험을 감수하기도 싫었으니, 자연스레 현지 레스토랑에서는 금주를 했다,


간혹 집으로의 손님 초대에서는 한식만 차려대는 통에 와인을 들일 메뉴가 아니었다.

코르크 따개와 전용 잔을 챙겨야 하고, 상대방의 술 취향을 맞추기 까다로운 와인은, 결국 소주와 하이볼에 밀려 점점 더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


더군다나 나의 경우 와인 한잔이면 취기가 쉬 올라서, 음식에 곁들여 즐길 요량으로 마신 와인 때문에 기억 없는 저녁 시간으로 변하는 것도 부담으로 느껴졌다.

(레드 와인을 마신 다음날의 괴랄 망측한 숙취와 구토는 생각만 해도 술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과일 숙성주답게, 한잔이면 몽롱해지고, 두 잔이면 혀가 꼬이고, 세 잔이면 잠이 드는 마법의 술.

외국 주부들은 와인잔을 손에 들고 요리도 하고, 정원일도 하던데...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여차저차 이어가던 레드 와인과의 인연은, 어느 가을날의 만취로 끝을 내게 되었다.



언니, 언니,
나, 이 벤치 오늘 60% 세일해서 샀다?
우리 댕댕이들이랑 앉으려고 샀는데 너무 괜찮지?



꼬부라지는 발음으로 내 옆에 앉아있던 동네 언니에게, 새로 사 온 야외용 벤치를 자랑했더랬다.


덩치 큰 댕댕이 구름이와 중형견 설이를 내 옆에 함께 앉히고도 넉넉한 사이즈라, 퍽이나 마음에 들었던 찰나,

조용히 듣고 있던 언니가 말했다.




야, 이거 아까 나랑 같이 가서 사 오고,
내 차로 실어왔잖아.
지금 너 같은 말 네 번째 하고 있어.
너네 강아지들도 옆에 앉아있다가
내려간 지 한 참이야!ㅋㅋ



이 언니 성격도 좋지..

같은 말을 네 번이나 들어줬네..

그러고 보니 언니네 집에서 우리집까지 어떻게 온 것인지 기억이 없었다.


칼집을 낸 브리치즈에 꿀을 뿌려 구워내고, 위에 갖가지 견과류가 올려진 안주.

방울토마토와 채소가 섞인 발사믹 소스 샐러드였던가...

아기자기하게 세팅된 술안주들과 고급 와인이 상에 올랐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래...

그날의 첫끼가 되었던 가벼운 안주와 레드 와인이 나를 시간 여행자로 만들어 주었으리라..



내가 사라져 볼게, 얍!




그렇게 와인과 함께 내 기억은 시간 여행을 떠났고, 그날 이후 내 삶에 와인은 없다.







어쩌면 입맛 촌스러운 내가 딱히 술맛도, 멋도 모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와인이 무슨 죄가 있겠나?


이렇게 어렵기만 한 레드 와인을 게임에 비해보자면, 이제 막 게임 캐릭터 직업을 정하고 필드에 나선 Player 앞에 나타난 '보스 몹' 같은 녀석 같다.


레드 와인을 즐기는 경지에 다 달으려면 아주 험난한 레벨업이 필요할 테지만, 아무리 전장을 누비듯 와인병을 비워내도 스킬업이 되지 않는 기분이라면 이해하려나..?


남들은 이벤트 퀘스트까지 완료하고 게임을 이어나가는데, 나는 NPC들의 수많은 안내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전혀 이해 못 한 채 마을 광장 입구에 렉이 걸린 채 앉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그 퀘스트, 아니 레드 와인과의 게임을 포기하기로 했다.


오랜 경험에도 불구하고 레드 와인을 정복하려면 어떤 퀘스트를 마쳐야 하고, 어떤 경험치를 쌓아야 하는지 귀띔해 줄 수 없어 아쉽지만, 이 넓은 세상, 나는 다른 술로 갈아타련다.

얄팍한 지식으로 유난을 떨고 싶지도 않고, 이런 날에, 이런 음식에, 이런 날씨에는 어느 나라 와인이 어울리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스테이크를 썰면서 붉은 레드 와인을 한잔 곁들이는 멋진 저녁 식사 자리.

맛도 모르는 붉은 술을 우아한 적 들이킨 후, 입술 주름 사이사이가 검붉게 물들어 프란체스카의 현신이 되는 민망한 짓은 그만하련다.


몸에 맞지도 않는 레드 와인은 그만 버리고 기똥차게 말아먹는 하이볼이나 소주를 즐겨야겠다.

레드 와인의 세계에 새롭게 모험을 떠나는 자들이 있다면 건승을 빈다.




레드 와인!

이탈리아에 가서 파스타를 평가하는 날 다시 만나자!

덕분에 많이 취했고, 많이 토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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