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세탁이 끝난 빨래를 건조기에 넣으려고 세탁기 문을 여는 순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안에는 축축한 빨래가 한가득이었고, 윙하는 이상한 소음이 들려왔다. 문잠금 표시등에는 불이 깜빡이고 있었지만 버튼을 아무리 이것저것 눌러봐도 소용이 없었다.
전기 제품이 말썽을 일으킬 때 가장 기본적인 해결 방법은 전원을 끄는 것, 아니 플러그를 뽑는 것이다. 결국 플러그를 완전히 뽑으니 소음은 멈췄다. 사람도 가끔 전원을 꺼야 하는 순간이 있지 않나? 잠깐의 휴식으로 리셋이 되는 과정을 거치면 의외로 손쉽게 해결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다시 플러그를 꽂는 순간, 윙 하는 소음이 되살아났다. 세탁기 문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열어줄 생각이 없었다.
캐나다에서는 가전제품이 고장 나면 스스로 해결하지 않는 한 수리비가 만만치 않다. 이럴 땐 한국이 너무 부럽다. 한국은 서비스 센터에 전화만 하면 언제든지 출동해 주시는 서비스맨들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나는 현재 증상을 동영상으로 찍어 AI에 원인을 물어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고장이나 에러 부분에 대한 건 대부분 정확한 해결방법을 알려주는 편이다. 영상을 본 후 AI는, 세탁기 내 배수필터에 이물질들이 끼어 물이 덜 빠졌다고 인식하고 안전을 위해 문을 잠근 후 억지로 배수를 시도하고 있을 수 있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한동안 세탁조 청소를 안 했더니 배수필터에 찌꺼기가 끼고 뭔가 막혔나 보다. 별수 없이 우선은 플러그를 뽑아 두고 몇 시간을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다음날 전원을 꽂아보니 다행히 문은 정상적으로 열렸다. 내부를 확인해 보려고 남편이 세탁기 뒷면에 있는 나사를 풀어 살펴보니 아래쪽에 배수구 쪽에 동전 몇 개가 나왔는데 그게 원인이었을 수도 있겠다.
빨래를 되찾은 후 오랜만에 세탁조 청소를 하기 위해 청소용 제품을 넣고 자체 Clean Wash 기능을 돌렸다. 뜨거운 물에 불려진 세탁기 안에서 시꺼먼 뭉치들이 보였다. 한번 더 제품을 넣고 돌린 후에야 더 이상 찌꺼기가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강아지 털이 묻은 옷을 자주 빨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배수에 막힘 문제가 발생한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까지 청소를 하고 나니 기분까지 개운했다. 앞으로 매달 초, 한 달에 한 번씩은 주기적으로 세탁조를 청소하고, 옷을 빨기 전에 미리 털을 제거하기로 했다.
우리가 2018년 캘거리로 이사 왔을 땐 새로 지은 집이었기에 모든 가전이 당연히 새것이었다. 그런데 6년쯤 지나자 하나둘 고장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2024년에는 세 가지 가전제품이 한꺼번에 말썽을 부린 적이 있었다. 식기세척기 바닥에는 물이 빠지지 않아 고여 있었고, 전기오븐 하나는 불 조절이 되지 않았으며, 냉장고 서랍에도 물이 차올랐다. 처음엔 남편이 이리저리 뜯어보며 어떻게든지 해결해 보려 했다. 평소 같으면 직접 부품을 찾아 교체했겠지만, 그때는 어떤 부품을 교체해야 할지 확신이 없었다.
결국 기술자를 불러 점검을 받기로 했다. 이메일과 전화상으로 이미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다 알려준 상태였다. 수리 기사가 우리 집을 방문해 3가지 가전을 다 둘러보고 점검하는 데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짧은 시간에 기본 방문비에 3가지의 가전제품별 점검 비용이 추가되어 총 320달러가 청구되었다. 30분에 320달러라니 도대체 시간당 얼마인 거야! 한국처럼 방문하자마자 바로 고쳐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점검에 드는 비용이었다. 게다가 냉장고는 원인이 확실한지 문도 한번 열어보지 않았다.
수리 기사는 우리가 교체해야 할 부품을 적어서 인보이스로 보내주겠다며, 원한다면 부품을 주문해 주겠다고 했다. 부품 외 교체비용은 별도다. 이메일로 받은 인보이스에는 가전제품 세 개에 필요한 부품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각각의 부품마다 별도 작업비까지 따로 붙어 있어 총비용은 1,000달러가 넘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부품은 우리가 직접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었고, 업체에서 제시한 가격은 온라인보다 1.5배가량 비쌌다. 작업비까지 생각한다면 직접 해결하는 편이 훨씬 저렴했다. 결국 업체를 통하지 않고,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며 남편이 세 가지 가전제품의 부품을 모두 교체했다. 그렇게 우리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남편과 나는 이제부터는 뭐가 고장 나든지 다 고칠 수 있겠다며 굉장히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캐나다에 오면 이렇게 점점 핸디맨이 될 수밖에 없다. 여러 번 이런 일을 겪다 보면, 고장 난 뒤에 수리하는 것보다 미리 점검하고 관리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암 진단을 받고 나서부터 남편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안 곳곳을 이상하리만치 꼼꼼하게 점검하기 시작했다. 몸에 더 좋은 물을 마셔야 한다며 캘거리에 유독 많은 석회 성분까지 걸러내는 정수기로 바꾸고, 6개월이나 1년마다 갈아야 하는 정수기 필터의 교체 시기도 기록해 두었다. 심지어 세탁기뿐만 아니라 가전제품들의 청소 주기와 지하 Vent 필터 교체 시기 등을 엑셀로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이 집에 없을 때 식기세척기 배수구가 막히거나, 지난번처럼 세탁기 문이 열리지 않거나, 중앙 환기장치 필터에서 물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암묵적으로 우리 부부는 내 몸에 암이 생긴 것처럼, 집안의 무언가도 갑자기 고장이 나거나 먹통이 될까 봐 두려워했던 것 같다. 암이 되기 전에 막아야지.. 그러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크게 후회할 것 같은 심정으로.
그러면서 집안의 작은 문제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둘러보고 신경 쓰고 있는 우리를 발견했다. 작은 이상이 있을 때 미리 살펴보고, 청소할 것은 청소하고, 갈아야 할 것은 갈아놓았다.
사실 나도 별다른 이상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실감하게 되었다. 가끔 가전제품도 사람 몸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멀쩡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계속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잘 돌아갈 때 한 번씩 열어보고 닦아보고 갈아줄 것을 갈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아무리 점검한다고 해도 고장을 모두 막을 수는 없고, 정기검진을 받는다고 해서 암을 모두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가전제품도 몸도, 작동을 멈추거나 문제가 생긴 뒤에야 들여다보는 것보다 평소에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런 것도 암과 관련짓는 걸 보니 내 생활 깊숙이 암이란 존재가 너무 크게 존재하고 있나 보다. 4개월 전만 해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였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우리 부부는 이런 면에선 마음이 참 잘 통하는 편이다.
내가 정리하면, 남편은 즉시 출동한다.
그러고 보니 항암도 벌써 8번을 마쳤고, 내일이면 9번째 항암주사를 맞으러 간다.
12번의 항암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항암 후 카톡으로 늘 “좋은 주사 잘 맞고 왔어?”라고 물어보는 동생이 있다.
암의 크기를 줄여주는 주사이니, 몸에 좋은 주사가 맞긴 하다. 정상적인 세포까지 공격해서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만약 항암이 다 끝나고 나서, 다시 새로운 약으로 2차 항암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좌절하지는 말자. 순리라고 생각하고 잘 받아들이고, 약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어쨌든 '좋은 주사'니까.
세탁기 플러그를 뽑은 후 모든 기능이 새로고침되었듯, 사람 몸에도 그런 리셋 버튼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이제 그만 플러그를 뽑을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