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이거나 팔촌이거나 옆집 사람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시절, 종로구의 한 주민센터에 방문했던 기억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한옥으로 된 건물 내부는 기둥과 천장, 창살무늬 같은 것들이 온통 나무로 되어있어 빛깔부터가 일반적인 주민센터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민원업무를 보는 동안 다른 세계에 잠시 다녀온 기분이었다. <바람의 나라> 같은 게임 속 상점에 다녀온 것 같기도 했다. 직원과 정해진 말만 주고받고, 그 밖에서는 만날 일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러나 정작 시골의 지방직 공무원이 된 나는 NPC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었다. 면사무소로 발령받자마자 내가 누구 딸인지, 엄마가 여기서 뭘 하셨었는지 설명하기 바빴으며 나는 면사무소 밖에서도 공무원이었다. 때로는 반대로 면사무소 안에서도 ‘나’이기도 했다. 민원인들은 업무를 다 보고 나서, 또는 보기도 전에 자신의 정체를 밝혀 오셨다. 그분들은 우리 엄마나 아빠를 아시는 분이기도 했고 어머님의 초등 동기이거나 아버님의 고종사촌이셨다. 나는 직원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지역 주민이니까.
산업팀 재직 시절, 한 산란계 농장의 이름이 귀에 익어 물어보니 내 남동생 친구의 부모님이 하시는 농장이었다. 어느 이장님은 어머님의 동창인 동시에 엄마와 잘 아시는 사이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다른 이장님들보다 나와 살가운 사이였다. 농지 현장을 확인하고 농지취득자격증명을 발급하는 일도 한때 내 업무였는데, 한두 해 지나 그 농지가 시외가에서 새로 사신 땅인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정도로 인구가 적은 곳이라면 다 비슷하겠지만, 지방직 공무원의 상당수는 이 지역 사람이다. 토박이가 아니라면, 여기에 연고가 있다. 그중에서도 토박이인 경우 2대를 이어 공무원직에 있는 경우가 흔하다. 멀리 갈 것 없이 시아버지도 공무원이셨고, 남편도 공무원이다. 나는 이제 그만두었지만, 사실 우리 엄마도 공무원이다.
그러니만큼, 공무원들은 지역 곳곳에서 발견된다. 출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도, 지역 내 최대 할인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도, 어린이집 하원 후 방문한 놀이터에서도 동료 직원들의 얼굴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직원들끼리는 물론, 이장님이나 민원인도 일상생활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다. 우리 아파트 단톡방에 ‘무슨무슨 날 행사’ 자료가 이장님 대신 담당 직원을 통해 바로 올라올 때, 공무원들도 주민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지역 축제 때에는 직원과 주민의 경계가 더욱 느슨하다. 축제가 이어지는 4일간, 남편은 근무날에도 아닌 날에도 행사장에 있다. 근무일에 자기 담당 부스를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고, 아닌 날에도 아이를 데리고 자기 지역 축제에 오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아이와 셋이서 또는 어머님까지 합쳐 넷이서 행사장 내부를 걷다 보면 인사를 하느라 몇 번씩이고 멈춰 서게 된다. 멀리서 다가오는 모르는 아저씨가 남편을 보며 반가운 기색으로 손을 흔들면, 나는 일단 함께 고개를 꾸벅한다. 그런 뒤 그분이 지나가면 나는 슬쩍 물어본다. “이장님이셔?”
축제장을 채운 공무원들 중엔 재직시절 나와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도 있다. 나는 이제 지역 주민의 한 사람이지만, 반갑게 인사하며 그만두고 나니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다’느니 ‘아이가 많이 컸다‘며 안부를 나누곤 한다.
이쯤 되면 지역슬롯에서 공무원들은 관공서에서만 출몰하는 익명의 존재가 아니다. 농가맛집 지원사업 담당이었던 직원이 식당 오픈 뒤에는 단골손님이 되기도 할 만큼, 공적인 관계와 사적인 관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얼마 전 가게로 걸려 온 수상쩍은 전화를 끊고서 생각했다. 이곳에서 관공서 사칭 노쇼 사기를 치는 건 쉽지 않겠다고. 가게 사장님들은 대체로 자주 거래하는 부서가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 아는 직원 한둘쯤 있기 마련이다. 모르는 직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다소의 경계를 품고 대할 법하다. 명함을 주는 것조차 수상쩍다. 우리 지역에서 군청이나 면사무소 직원들은 대체로 명함 없이 업무를 보기 때문이다. 한 다리만 건너면 사실여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실은 내게 걸려온 전화는 말씨부터 달라서 더 수상했지만.
면직 후에도 여전히 나는 이곳에 살고 있고, 남편도 공직에 남아 있어서 직원들과 아는 사이로 남아 있다. 시골에서 사돈도 팔촌도 공무원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도 아니면 옆집 사람일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