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은 생각보다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니었다

by진경수

산행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정상을 생각한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산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누군가 내려오면 묻기도 한다.


“정상까지 얼마나 걸려요?”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도 비슷하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산에서 그 ‘조금’은 참 길다. 한 고개를 넘으면 또 오르막이 나오고, 이제 다 왔겠지 싶으면 능선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오른다. 정상이 있기 때문이다.



정상석 하나를 만나려고


산길의 오르막은 정직하다. 내가 걷지 않으면 한 발짝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숨이 차면 쉬어야 하고, 다리에 힘이 빠지면 속도를 늦춰야 한다. 누가 대신 걸어줄 수도 없다. 그래서 산은 때때로 삶보다 단순하다. 한 걸음 내디디면 그만큼 앞으로 간다. 나는 그 단순함이 좋았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석이 보이면 이상하게 힘이 다시 생긴다. 몇 걸음 전까지만 해도 무겁던 다리가 가벼워진다. 정상에 선다.


“드디어 왔구나.”


사진을 찍는다. 멀리 산줄기가 펼쳐지고, 지나온 길이 발아래 놓인다. 기분이 좋다. 그런데 잠시 뒤 누군가 말한다.


“이제 내려갑시다.”


그 말 한마디에 정상은 목적지에서 다시 경유지가 된다.



그렇게 힘들게 왔는데


처음에는 조금 허무하기도 했다. 몇 시간을 걸어 올라왔는데 정상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몇십 분이다. 점심을 먹는다고 해도 그리 길지 않다. 겨울에는 바람이 거세 오래 있을 수도 없다. 하산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 결국 다시 배낭을 멘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온 정상을 내 발로 떠난다.


산은 참 이상하다. 정상에 가라고 온 힘을 쓰게 해 놓고, 도착하자마자 다시 내려가라고 한다. 산을 오래 다니다 보니 그 짧음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상은 소유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잠시 빌려 서는 자리였다. 오늘 내가 서 있는 곳에 조금 뒤에는 다른 사람이 선다. 나는 내려가고 또 다른 사람이 올라온다. 정상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삶에도 정상석이 있었다


살면서도 많은 정상석을 향해 걸었다. 시험의 합격, 자격증, 사업의 성과, 슬롯적인 인정, 어떤 자리와 직함. 그때는 그것을 얻으면 무엇인가 크게 달라질 것 같았다. 실제로 기뻤다. 합격 소식을 확인했을 때도,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 성과를 냈을 때도, 노력을 인정받았을 때도 마음이 벅찼다. 그 기쁨을 작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노력해서 얻은 성취는 충분히 기뻐할 일이다.


다만 오래 지나 돌아보니 그것들도 산 정상과 닮아 있었다. 기쁨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다. 다음 날이 왔다. 새로운 일이 생겼다. 또 다른 문제가 기다렸다. 성공한 날에도 저녁은 왔고, 다음 날 아침에는 다시 하루를 살아야 했다.



공을 이루고 머물지 않는다


노자는 『도덕경』 제2장에서 말한다.


功成而弗居. (공성이불거)

공을 이루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젊은 날에는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 아쉬웠다. 힘들게 이루었는데 왜 머물지 않는가. 조금 누려도 되지 않는가. 이제는 그 뜻을 다르게 읽는다. 기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성취를 부정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 성취를 영원한 내 자리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 정상에서 마음껏 웃어도 된다. 사진도 찍고, 함께 오른 사람과 기쁨도 나누면 된다. 다만 시간이 되면 배낭을 다시 메면 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높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정상에서는 멀리 볼 수 있다. 그러나 멀리 보인다고 모든 것이 잘 보이는 것은 아니다. 정상에서는 길섶의 작은 꽃이 보이지 않는다. 계곡의 물소리도 멀어진다. 숲 속의 작은 새와 나무 아래의 그늘도 없다.


높은 곳에서 얻는 풍경이 있고, 낮은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도 있다. 사람의 자리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넓게 볼 수 있는 것이 생긴다. 반면 가까이에서만 보이는 사람의 표정과 사정은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높이 올라갈수록 가끔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람 곁에 서보는 일이 필요하다.



정상보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산행 사고는 오를 때보다 하산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나 역시 산을 다니면서 하산할 때 더 긴장하려고 한다. 오를 때는 힘들다. 그래서 발을 조심한다. 숨이 차니 천천히 걷는다. 그러나 정상에 다녀오고 나면 마음이 풀린다.


‘이제 다 왔다.’


바로 그 생각이 위험하다. 몸은 이미 지쳐 있다. 다리의 힘도 떨어졌다. 내리막에서는 작은 돌 하나에도 발이 미끄러질 수 있다.


삶에도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무엇인가 이루고 나서, 높은 자리에 오른 뒤, ‘이제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그때부터 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말 한마디, 사람을 대하는 태도,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는 방식,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건네는 모습.


사람의 품격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더 선명하게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이제 정상에 서면 오래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 잠시 숨을 고른다. 멀리 펼쳐진 산줄기를 바라본다. 사진 한 장을 남긴다. 그리고 내려갈 길을 살핀다. 아직 산행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삶에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 어디까지 올라왔는가 보다, 어떻게 내려갈 것인가. 무엇을 더 얻을 것인가 보다, 무엇을 잘 건네고 갈 것인가. 정상은 생각보다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잠시 머물 수 있지만 가질 수 없고, 올라갈 수 있지만 결국 떠나야 하는 자리.


산은 정상에서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여기까지 잘 왔다. 이제 잘 내려가라.”


요즘 나는 그 두 번째 말을 더 오래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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