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 굽이를 돌아보다
“합수곡과 가삽고개를 지나 세 암봉에 오른 뒤 무쇠말재로 내려오는 길.
서로 다른 두 나무의 포옹, 말라버린 석간수, 정상에서 되살아난 가족의 기억을 만나며 산굽이 같은 삶의 한 굽이를 천천히 돌아본다.”
정상 : 가리산 1,051m
출발 : 가리산자연휴양림
거리 : 약 7.5km 순환
주제 : 다름·기억·귀환
산행일 : 2026. 3. 7
01. 다름을 품어 한 몸이 되다
“다름은 갈라놓는 이유가 아니라 서로를 살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합수곡에서 가삽고개로 향하는 흙길은 서두르지 않는 걸음을 가르친다. 그 길에서 만난 연리목은 같은 종류끼리 모여야 편하다는 오래된 습관을 조용히 거스른다. 소나무와 참나무는 서로의 다름을 지우지 않은 채 몸을 기대고 함께 자란다.
“끼리끼리 어울려 패거리를 이루기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품어주는 모습이다.”
사람 사이의 평화도 같음을 강요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상대를 내 방식으로 바꾸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가 지닌 결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관계는 비로소 숨을 쉰다. 다름은 틈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한 자리를 이어주는 여백이 된다.
능선에서 만난 꽃과 나비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살린다. 산은 홀로 완성되는 생명이 없음을 보여준다. 나 역시 누군가의 그늘과 온기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걷는 속도를 조금 더 늦춘다.
“완만한 길만 이어지는 산은 없다. 삶도 그러할 것이다.”
다 왔다 싶으면 다시 오르막이 나타난다. 산길이 굽이굽이 이어지듯 삶도 평탄함과 가파름을 번갈아 건넌다. 길이 순순히 열리지 않을 때 필요한 것은 조급함이 아니라, 지금 내딛을 수 있는 한 걸음에 마음을 온전히 싣는 일이다.
02. 마른 샘 앞에서, 잃기 전에 깨닫다
“물이 마른 뒤에야 물의 소중함을 깨닫듯, 우리는 잃고 나서야 자연의 고마움을 배우는 것은 아닐까.”
사계절 마르지 않는다는 제1봉 남쪽의 석간수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나무도 목이 마른 듯 잎을 말아 올렸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안의 생명은 인간의 편리와 욕심 앞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산 정상에 서니 살아 있는 사람보다 떠난 사람들이 더 가까이 느껴진다.”
정상에서 제2봉과 제3봉을 바라보는 순간 아버지와 어머니, 큰누이와 막냇동생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른다. 높이 오른다는 것은 더 멀리 보는 일만은 아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멀어졌던 사람을 다시 마음 가까이 불러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꽃술에 앉아 한참 머물다 떠난 그 나비가, 동생이 보내온 마지막 인사였으면 좋겠다.”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지만, 기억은 때때로 나비가 되고 바람이 되어 곁으로 온다. 그리움은 부재를 지우는 힘이 아니라 비어 있는 자리를 사랑으로 오래 품게 하는 마음이다. 남은 형제들이 세 암봉처럼 서로 기대어 그 빈자리를 온기로 채워가기를 바란다.
제2봉의 큰 바위 얼굴 앞에서 공부의 뜻도 다시 묻는다. 지식을 쌓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다. 자연의 이치를 헤아리고 세상의 흐름을 이해하며, 마침내 자기 마음을 돌아보는 과정도 공부다. 산은 말이 없지만 오래 바라보는 이에게 필요한 말을 건넨다.
03. 내려가는 사람에게도 힘을 묻는다
“산은 오르는 사람에게만 힘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려가는 사람에게도 끝까지 걸어갈 힘을 묻는다.”
무쇠말재로 향하는 능선에는 단풍으로 물들기도 전에 말라가는 잎들이 보인다. 피어나는 것만이 자연의 순리는 아니다. 시들고 사라지는 일도 삶의 한 모습이다. 하산은 끝을 향한 걸음이 아니라, 떠남과 소멸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배움이다.
화전민이 떠난 자리에는 낙엽송 숲이 들어섰다. 사람의 흔적은 희미해졌지만 나무는 그 삶을 기억한다.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자연만 만나는 일이 아니다. 그 숲에 기대어 살았던 사람들의 애환과 시간을 더듬어 걷는 일이다.
“산굽이를 돌아가듯 삶의 한 굽이도 돌아보게 되었다.”
잔자갈이 깔린 가파른 길을 내 몸이 허락하는 속도로 내려왔다. 조금 늦었지만 무사히 원점으로 돌아오니 지친 몸과 달리 마음은 가벼웠다. 자연의 변화와 삶의 흔적,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을 차례로 품은 걸음이 마음속 묵은 무게를 덜어냈다.
가리산은 다름을 품는 법, 잃기 전에 아끼는 법, 떠난 이를 기억하며 남은 사람이 서로 기대는 법을 일러주었다. 정상보다 오래 남은 것은 그 길에서 만난 관계와 기억이었다. 산을 내려온 뒤에도 그 가르침은 한동안 마음속 능선으로 이어졌다.
산이 남긴 질문
나는 다름을 밀어내고 있는가, 품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곁에 있는 소중한 존재를 잃기 전에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