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걷다

by소담

퇴근길 내내 머릿속이 무거웠다. 딱히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요즘 들어 자꾸 이런 날이 늘었다. 뭔가에 몰두하고 싶은데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애매하게 지친 저녁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을 즈음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던 날이었다. 슬리퍼를 신고 잠깐 다녀오려던 길이었는데, 어디선가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에 걸렸다.


아파트 둘레를 따라 아카시아 향이 가득 번져있었다. 괜히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올려다보기도 하고, 볼끝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에 눈을 잠시 감아보기도 했다.


늦은 시간에 산바카라을 나온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천천히 걷는 사람들의 얼굴은 평온했고, 주인을 따라가는 강아지들의 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바짝 긴장했던 몸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산바카라이 끝나고도 쉽게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밤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기도 하고, 담벼락 틈새에 자란 이름 모를 풀 앞에 멈춰 서 있기도 했다. 서늘하게 내려앉은 밤공기가 하루 종일 굳어 있던 어깨를 천천히 풀어주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하루쯤 기분 전환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저녁이 되면 나도 모르게 운동화 끈을 묶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 중 그 시간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시작된 산바카라은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예전보다 더 먼 거리까지 걷는 날도 있었다.


복잡하게 엉켜 있던 생각들은 밤공기 사이로 흩어졌고, 걸음은 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강아지도 그 시간을 알아챘다. 내가 현관문을 열면 어느새 옆에 와 있었고, 함께 걷다 보니 혼자였던 산바카라이 슬며시 둘의 산바카라이 되어 있었다.


강아지와 함께 비 내리는 날 처음 산바카라을 나갔던 날의 일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으레 산바카라은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현관 앞을 서성이며 자꾸만 밖을 바라보는 강아지 때문에 결국 우산을 들고 나섰다.


젖은 풀밭 위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냄새를 맡던 강아지는 연신 풀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빗물이 털끝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는데도 마냥 신나 보였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걷다 보니 복잡했던 마음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회색빛으로 가득하던 머릿속은 집으로 돌아올 때쯤엔 파스텔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강아지와의 산바카라은 리드줄만큼이나 느슨했다. 강아지가 길가의 냄새 앞에 오래 머물면 나도 함께 멈춰 섰고, 벤치에 앉으면 나 역시 잠시 쉬어갔다.


주말 아침 산바카라길은 늘 느린 걸음으로 시작됐다. 아직 덜 깨어난 동네는 조용했고, 새벽 공기 사이로 새소리만 들려왔다.


이제는 산바카라이 끝난 뒤 나란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강아지와 나 사이에 꼭 비밀 하나를 나눠 가진 사람들처럼 조용히 눈을 마주친다.


돌이켜보면 그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 게 시작이었다. 그렇게 대단할 것 없는 걸음 하나가 취미가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그런 작은 걸음이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