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소리

by이해의 등대

마을에서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소박한 일거리를 이웃과 나누다보면, 생각지 못한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때로는 그 인연이 깊어져서 한 사람의 일생을 듣는 기회도 얻게 된다. 어느날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어머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여 만나게 되었다. 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구술하는 어머님의 이야기가 조용하게 내 마음에 차올랐다. 그 차오른 사연을 어머님 목소리 그대로 띄워본다.




처음 이 마을에 이사 온 것은 45년쯤 전입니다. 부산 살다 아이가 생기고 서울에서 공부시켜보겠다는 생각에 다 정리하고 올라와서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남편이 일용직 하며 모은 돈으로 작은 지하 공장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고된 서울살이였지만, 아이들 키우는 보람도 찾았습니다. 작은 인쇄소 공장으로 큰돈 벌지는 못했지만 험한 서울살이에 지친 우리 가족 몸을 기대어 쉴 수 있는 집 한 칸은 마련하고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어린아이 둘을 키우느라, 아이 둘 낳은 뒤로는 남편이 인쇄 공장을 도맡아 했습니다. 인쇄하고 배송하고 모든 일을 혼자 하느라 고생스럽다는 한숨 내 쉴 법도 한데, 한번도 힘든 내색하지 않은 든든한 남편이었습니다. 소박한 행복에 복 많은 인생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라주어서 더 바랄 것이 없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영원히 행복이 이어졌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이었지요. 처음 서울 올라와서 식당일, 가사 도우미로 생활할 때 비하면 말할 수 없이 행복했으니까요.


무엇보다 잘 커가는 아이를 옆에서 지켜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산동네 험한 길에 큰 눈 오는 겨울이면 아이들과 함께 엉금엉금 기어서 골목길을 다니던 일도 행복하기만 한 추억입니다. 가끔은 연탄 배달이 늦어서 추운 밤 우리 네 가족 한 이불 안에서 덜덜 떠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 함께 지낼 수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좋았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기에 연탄을 남들처럼 쌓아 놓고 있을 수 없어서 이웃집에 아쉬운 소리 할 때도 넉넉한 마음으로 연탄 나누어주는 이웃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추운 밤 한 이불 안에서 서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간지러움에 누군가 먼저 웃기 시작하면 방안 가득 웃음소리가 가득해지곤 했습니다. 그때만큼은 우리가 가난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행복할 것 같은 날이 몇 해 정도 이어진 어느 날, 웃음소리가 멈추는 날이 왔어요. 남편과 연락이 안 되어 며칠을 찾아다니다가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단 주문한 분이 연락이 안 되어 공장에 찾아갔다가 쓰러져 있는 남편을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병실에 누워있는 남편을 만났을 때, 오른손을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손을 심하게 다치고 출혈도 많아서 매일 고비를 넘기고 있다는 말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한마디 인사도 나누지 못했는데 남편은 내가 병원에 간 그날 저녁 세상을 떠났어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그때까지 버틴 것도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그 며칠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남편 떠나보내고 슬퍼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당장 저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 둘을 키워야 했으니까요. 남편 떠나고 슬퍼하기보다 원망하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혼자 갔느냐고 있지도 않은 남편에게 하소연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혼자 묵묵히 힘든 일 도맡아 하던 남편에게 그러면 안 되었는데 후회도 남아 있습니다. 남편 가는 길 발걸음 너무 무거웠던 것은 아닌가 후회도 있어요.


뭘 할 수 있을지 몰라서 막막했지만, 첫째는 집에 두고 둘째 업고 인쇄소 공장에서 남은 일을 했습니다. 처음 일 시작할 때 같이 일을 배워서 일은 알지만, 손에 익지 않아서 실수도 잦았습니다. 인쇄 기계 돌아갈 때마다 큰 소리 때문에 둘째가 경기하듯이 울어서 속도 많이 상했습니다. 둘째는 귀가 약간 안 좋은데, 너무 어린 나이에 시끄러운 곳에서 키워서 난청이 생긴 것 같아서 제 가슴에도 못이 박혀 있습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고, 지나간 행복한 날은 꿈속에서 있던 일인가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평소 남편에게 일을 주던 거래처에서 일을 끊지 않고 맡겨주셨어요. 남편이 평소 입버릇처럼 공장 하는 동안에는 일감 꼭 맡겨 달라고 해서 약속했는데, 그 약속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 들은 날 처음으로 남편이 떠났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어요. 그렇게 고마운 사람인데 원망한 내가 밉고 싫었습니다. 원망할 때는 덜 슬펐는데, 미움이 사라지고 나니 슬픔만 그 자리에 남아 있었어요. 한심스럽고 바보 같은 내가 아이 둘을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절망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든 아이들과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다행히 일이 바빠서 며칠 아픈 뒤부터는 공장일 하느라 더는 슬플 여유 없이 지냈습니다. 몇 달을 그렇게 지내고 나니 일이 손에 익숙해져서 힘들다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일했어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둘째가 학교 다니기 시작할 때까지 공장일 하면서 버텼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큰비가 왔어요. 곧 납품을 마쳐야 하는 주문이 있어서 빗속에 아이 둘을 집에 남겨놓고 공장문을 열러 갔는데, 반지하에 있던 공장에 물이 가득 차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공장 마지막입니다. 납품 못 한 것은 물론이고 일주일 동안 반지하 공장에 가득한 뻘 같은 흙을 퍼내고 퍼내고서야 공장을 더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공구 일하는 분에게 어떻게든 일할 수 있게 살려달라고 빌기도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물과 뻘 속에 있던 기기들은 이미 사용 못 하게 되어서 결국은 고철값에 처분하고 공장문을 닫았습니다.


제가 중졸이에요. 집안 사정 때문에 중학교도 조르고 졸라서 겨우 졸업했거든요. 그래서 글은 읽고 쓰고 하지만, 전문적인 일을 배우지는 못했어요. 결국, 공장문을 닫고서 다시 시작한 일은 식당일이었습니다. 식당일은 둘째가 중학교 입학하던 즈음까지 했는데, 식당과 떡집을 같이 하던 사장님이 성실한 저를 잘 보았는지, 아니면 더 힘든 일을 할 사람이 없어서였는지 모르지만, 떡집으로 이직을 했습니다. 떡집은 훨씬 더 힘들고 일찍 일을 시작해야 했지만, 벌이는 나아졌습니다. 몇 년을 그렇게 지내고 나니 전세로 살던 작은 집에서 조금 큰 옆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고 다시 몇 년 뒤에는 그 집을 제 이름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나이가 들고 아이들도 모두 자기 가정 꾸려서 살게 되고 나니 남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이제는 몸이 힘들어 일을 못 하고 시간이 많아지니 추억어린 과거 기억만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작 이후로는 시간이 더 많아졌어요. 그리고 세상이 너무 조용해졌어요. 몸이 좋지 않아서 문 앞을 나서는 일이 많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아파트 계단, 골목길이 너무 조용해졌어요. 오십 년 가까이 살아온 곳이라고 하기에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우리동네는 이렇게 조용하고 적막한 곳은 아니었는데 참 낯선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열어 놓은 창문 너머로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렸어요. 아이들 뛰노는 소리, 무언가를 찾는 소리, 그리고 누군지 알지 못하지만, 노랫소리까지 들립니다. 가까운 이웃에게 듣고서야 마을 축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가만히 방에 누워 눈을 감고 그 웃음소리를 따라가니 처음 남편과 이 마을 이사 오고 함께 걷던 그 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골목에 아이들 떠드는 소리, 어디선가 와장창 소리와 ‘이놈아’ 하는 불호령 같은 왁자지껄한 소리 가득한 그 마을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었어요. 아이들 웃음소리가 흘러넘치는 그 시간 동안 저는 저만의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축제하는 그곳에 갈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제 인생에서 가장 밝고 행복한 그 날로 돌아가 제가 가장 보고 싶었던 남편과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마을 축제를 준비한 고마운 분들이 모두 이웃이라고 하더군요. 고맙습니다. 수십 년 시간을 돌고 돌아 오늘에서야 웃음소리 속에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고생스러운 마음이 위로받는 기분이었어요. 제 기억 속에 있던 마을 그대로를 다시 선물 받은 고마운 마음입니다. 웃음소리 있는 마을을 지켜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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