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에 남기는 투정

by블루문

살아가다가 유독 지칠 때가 있다.

젊은 날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풀기도 하고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할 때는 동료들과 맥주 한 잔 하며 상사의 험담을 하며 풀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서 나는 삶의 힘든 순간들을 남편과의 수다로 풀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화를 내고 즐거워하고 맞장구를 치며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수다를 떨었다.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고, 집에서 이야기를 하고, 산바카라을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랬던 그가 12년의 결혼생활을 끝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그가 떠나고 나는 한동안 아이를 돌보고 남은 자의 소임을 다하며 정신없이 지냈다.

그가 잊히는 날이 올까 봐 두려워하며 그의 목소리, 그의 웃음소리, 그의 체온까지 모두 기억하며 지냈다.

내가 원하는 건 함께 늙어가는 것뿐이었는데, 고작 그거 하나 지켜 주지 않는 신을 원망하며 그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 모든 시간들 중 가장 힘든 건, 이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온전히 나를 이해하고 또는 이해하려 애쓰던 단 한 사람.

남편이 사라진 빈자리에서는 이별 이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음소거였다.


그가 있던 자리, 그의 컴퓨터, 그가 응원하던 야구팀, 냉동실에 남아 있는 그가 좋아하던 마른오징어까지.

모두 그대로인데 이상하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삶은 음소거 상태가 되었다.


그는 내게 고요를 남기고 떠났던 것이었다.




한 동안, 그의 카톡에 이야기를 했다.

날씨 이야기, 아들 이야기, 야구 이야기, 농구 이야기, 가족들 이야기 등등.

나는 마치 그에게 전달되는 것처럼 온갖 이야기를 그곳에 썼다.

그렇지만, 1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휴대폰 번호를 없애던 날 이후 나는 다시 음소거 상태로 돌아갔다.


대략 3년이 흐르고, 나는 비로소 그가 정말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드라마에서처럼 혹시나 영혼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까?

아니면 신이 실수했다면서 그를 돌려보내주지는 않을까?

허황된 어린아이 같은 상상으로 자꾸만 현관문을 보곤 했었던 나였지만, 중학생이 된 아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쳐갔지만 지치고 있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실에 없는 그를 찾는다는 것이 무의미했지만, 도무지 그의 그림자를 지워낼 수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걸 애써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일기를 썼다.

매일 쓰는 것은 아니지만 사는 게 버거울 땐 일기장을 펼쳐서 그에게 편지를 썼다.

이 일기장은 내가 그에게 가는 날 꼭 가지고 가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가 자라는 과정도 남기고, 내가 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지도 남기곤 했다.

내 삶에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남편을 일기장이 대신해 줄 수는 없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마치 어딘가 출장을 떠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편지를 썼다.


별별 투정이 그 안에 담기기 시작했다.

다음 생에도 만나자는 우리들의 농담을 왜 마지막 순간에 받아주지 않았는지 묻기도 하고

왜 고작 49년의 생을 살다 가버렸는지 화를 내기도 하고

너는 마지막 순간에 '사랑해.'가 아니라 '미안해.'라고 했는지 원망하기도 하고

대체 너의 영혼은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지 궁금해하다고 쓰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돈 벌기가 힘들고 자면서도 걱정이 가득인데, 너는 이제 자유로워서 좋겠다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일기장엔 남편이 있었다.

매일 보면서 사느라 권태기가 올 걱정 없이,

보고 싶을 때만 볼 수 있는 남편이 일기장 안에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기도 했다. 난 얼마나 편리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며 자신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기장에 투정을 부리고 나면

나는 그래도 잘 살아야다는 다짐이 꼭 생겨나곤 했다.


나중에 너를 만나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꼭 자랑하겠다는 의지가 생겨나곤 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마음 깊은 곳에 일기장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일기장이 데스노트가 되건, 버킷리스트로 채워지건

가슴속에 담긴 쓰디쓴 상처와 괴로움이 빼곡히 적히는 일기장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 사람들이 가진 은신처일 것이다.

나 역시 나 자신을 이겨내도록 돕는 일기장을 비로소 찾은 것이다.


내가 쓰고 있는 일기장, 그 안에 담긴 투정. 그리고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

참는 것이 아니라 글로 옮겨 두는 나의 고요를 비집고

그와 함께 걷던 억새 가득 한 남쪽 언덕의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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