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로그

아란

by천시록

《신의 로그》

PART 5 — 〈호라즘〉

제23화 〈아란〉


연기 사이로 수부타이의 얼굴이 보였다.

키이우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덕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무너진 지붕 너머로 솟은 불길이 겨울바람을 타고 옆 건물로 건너붙었고, 거리마다 피어난 검은 연기는 사람과 말, 뒤집힌 수레와 쓰러진 시체를 삼켰다가 불길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토해냈다. 데샤티나 교회 쪽에서는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는지 함성과 비명이 간간이 터졌으며, 어디선가 돌벽 하나가 무너질 때마다 묵직한 진동이 건물의 벽과 바닥을 타고 아란의 발밑까지 밀려왔다.

깨진 창틀 안쪽에 몸을 숨긴 아란에게도 그 모든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래쪽의 사내를 발견한 순간부터 귀가 이상할 만큼 먹먹해졌다.

저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조금 전 말에서 내리는 노장에게 다가간 병사가 그 이름을 불렀다. 거리의 소란 사이로 들려온 짧은 호칭 하나에 아란의 시선이 붙잡혔다.

수부타이 장군.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또 당신이군.”

호라즘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멀리 왔던가.

강을 건너고 산을 넘으며 살 만한 곳을 찾아다녔고, 이제는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할 때마다 다시 짐을 꾸려야 했다. 처음에는 몽골군을 피했고, 그다음에는 전쟁을 피했으며, 나중에는 동쪽에서 들려오는 소문만으로도 떠날 준비부터 했다. 어느 도시가 함락되었다거나 한 나라의 군대가 전멸했다는 이야기 뒤에는 이상하리만큼 자주 같은 이름이 따라붙었다.

수부타이.

처음 몇 번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넓고 몽골군의 장수도 많으니 같은 이름을 몇 번쯤 듣는다고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우연이 몇 해를 넘어 십 년이 되고, 새로 정착한 땅에서 다시 그 이름을 듣게 되면서부터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란은 수부타이를 찾아다닌 적이 없었다.

오히려 평생 그 반대였다.

저 인간이 있는 곳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했는데, 죽지 않고 살아남아 서쪽으로 갈수록 어느 순간 또 수부타이라는 이름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물론 아란도 알고 있었다.

수부타이가 자신을 쫓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 늙은 장군은 아란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그래서 더 지긋지긋했다.

자신에게는 인생이었지만 저 사람에게는 지나온 길에 불과했을 테니까.

창틀 아래로 몸을 조금 낮춘 아란은 다시 거리를 내려다봤다.

수부타이는 생각보다 늙어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지던 그는 언제나 거대한 존재였다. 성벽을 무너뜨리고 군대를 삼키며, 사막과 산맥을 지나가면 그 뒤에서 나라 하나가 사라지는 사람.

그런데 막상 눈앞에서 보니 머리와 수염에는 희끗한 빛이 내려앉아 있었고, 말에서 내려선 몸도 아란이 상상했던 것처럼 거대하지 않았다.

저 사람도 늙는구나.

당연한 사실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었다.

아란은 활을 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봤다. 거친 손등에는 햇볕과 추위가 남긴 주름이 있었고, 굵은 핏줄 아래로는 오래된 상처들이 희미하게 얽혀 있었다.

“나만 늙은 줄 알았더니.”

수부타이 곁에는 그보다 한참 젊은 중년의 장수 하나가 서 있었다.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라기보다 오랫동안 수부타이의 곁을 지켜온 사람처럼 보였다.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두 사람이 거의 함께 웃었다.

웃기도 하는군.

아란은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별걸 다 알게 되는군.”

더 볼 필요는 없었다.

화살통에서 화살 한 발을 꺼냈다. 창틀 아래에서 시위에 화살을 걸고 두 발을 단단히 고정한 뒤, 불길이 뒤틀어놓은 공기의 흐름과 창밖으로 스치는 바람을 살폈다.

활은 오랫동안 몸에 익힌 물건이었다.

이 거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스무 해가 넘도록 이름만 들어도 속에서 무언가가 뒤틀리던 인간이 지금은 자신의 화살 한 발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수만의 병사를 움직이는 장군과, 그 군대가 온다는 소식만 들리면 가족부터 챙겨 달아나야 했던 사람이 이렇게 만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만났다.

화살이 닿는 거리에서.

바람이 방향을 바꾸었다.

창밖에 엉겨 있던 연기가 옆으로 밀려나면서 아래쪽 거리가 선명해졌다. 수부타이 곁의 사내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란의 눈이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아란은 피하지 않았다. 놀라 몸을 숨기지도 않았다. 잠깐 그 사내를 바라본 뒤, 시선을 옆에 선 수부타이에게로 돌렸다.

활을 들어 올렸다.

왼손 약지의 은제 인장반지가 창틈으로 스며든 겨울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뜩였다. 오른손이 뺨 가까이 돌아오면서 활대가 깊게 휘었고, 화살촉 끝에 수부타이의 가슴이 걸렸다.

숨을 내보냈다.

손가락 하나만 펴면 됐다.

“장군!”

사내의 외침과 함께 아란의 손가락이 펴졌다.

활대가 튕기는 감각이 손끝을 때렸고, 화살은 겨울 햇빛이 스며든 연기를 찢으며 날아갔다.

사내가 몸을 던져 수부타이를 밀어낸 것과 화살이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수부타이의 몸이 옆으로 밀려났고, 그를 가로막은 사내의 등이 아란의 화살 앞에 드러났다.

짧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깊숙이 박혔다.

사내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젠장.”

거리도, 바람도 틀리지 않았다.

저자가 대신 맞았다.

아란의 손은 이미 다음 화살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 아래에서는 몽골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찾고 있었고, 몇몇은 건물 위쪽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한 발을 더 쏜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바로 몸을 돌리지는 못했다.

수부타이가 쓰러지는 사내를 받아 안고 있었다.

한 팔로 몸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상처 쪽을 더듬었다. 주변 병사들에게 무언가를 다급하게 외친 수부타이는 다시 품 안의 사내를 내려다봤고,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노장의 얼굴에서는 여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란은 그 사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이름도 몰랐고, 수부타이와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으며, 화살을 걸던 순간까지 그가 죽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수부타이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란의 가슴속에 아주 짧고 불편한 무엇이 걸렸다.

자신이 겨눈 사람은 저 사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수부타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스무 해 동안 쌓여온 다른 얼굴들 아래로 눌려 내려갔다. 죽어가는 가족을 붙잡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 불타는 집 앞에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던 사람들,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채 길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그들 가운데 누구의 이름도 수부타이는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 저 사내의 이름을 자신이 모르듯이.

아란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심정이 어떤지…… 뼈저리게 느껴봐.”

수부타이를 죽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올 리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조금 전까지 속을 긁던 아쉬움 위로 이상할 만큼 뜨거운 통쾌함이 올라왔다.

그래.

당신도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군.

조금만 더 그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아래에서 고함이 터지고 병사 하나가 정확히 창문을 가리키는 순간 아란은 미련 없이 몸을 뒤로 뺐다. 거의 동시에 날아든 화살이 창틀을 뚫고 벽에 부딪치면서 돌가루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이제는 살아남아야 했다.

건물 안쪽으로 뛰어들자 아래층에서 올라온 연기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계단에서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울렸고, 뒤쪽 방에서는 불길이 목재를 타고 번지며 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계단은 안 된다.

아란은 복도 끝 방으로 뛰어들어 창문을 열어젖혔다.

무너진 지붕에서 떨어진 목재와 짚더미가 아래쪽에 쌓여 있었고, 그 너머로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골목이 보였다. 높이를 가늠한 아란은 잠깐 입술을 비틀었다.

스무 살 때라면 벌써 뛰었을 것이다.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별걸 다 시키는군.”

뒤에서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창틀을 넘어 몸을 던지자 겨울 공기가 얼굴을 후려쳤고, 곧이어 어깨부터 짚더미에 처박히면서 가슴속의 숨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아란은 충격을 흘리듯 옆으로 굴러 일어났고, 바로 그 순간 화살 하나가 얼굴 옆을 스쳐 땅에 박혔다.

떨리는 화살대를 힐끗 본 그가 중얼거렸다.

“잘 쏘네.”

이번에는 정말 웃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키이우는 더 이상 도시라기보다 거대한 함정에 가까웠다. 불길 때문에 막힌 길이 있는가 하면 무너진 집 때문에 사라진 길도 있었고, 살기 위해 달아나는 사람들과 죽이기 위해 쫓는 사람들이 같은 골목에서 뒤엉키면서 어디가 안전한 길인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아란의 몸은 머리보다 먼저 길을 골랐다.

기병이 속도를 낼 수 있는 넓은 길은 피했고, 고함이 가까워지면 좁은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으며, 연기가 목구멍을 긁는 냄새와 얼굴에 닿는 열기만으로 불길이 어디까지 번졌는지를 가늠했다.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리면 오히려 반대편의 틈을 살폈고, 말발굽이 돌바닥을 때리는 간격만 들어도 기병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짐작했다.

이런 일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문득 지긋지긋했다.

“별걸 다 배웠군.”

골목을 꺾는 순간 뒤집힌 수레 하나가 길의 절반을 막고 있었다. 부러진 바퀴 아래로 사람의 다리가 튀어나와 있었고, 장화가 벗겨진 맨발은 이미 움직이지 않았다. 그 곁에 무릎을 꿇은 여자가 두 손으로 수레를 들어 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묻어나는데도 여자는 몇 번이고 허리를 펴며 수레를 들었다 놓았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향해 같은 이름을 되풀이해 부르고 있었다.

아란은 걸음을 늦추지 못했다.

조금 더 가자 무너진 집 앞에 엎드린 남자 하나가 맨손으로 돌을 헤집고 있었다. 손톱이 깨지고 손가락마다 피가 흘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돌더미 아래에서는 작은 손 하나가 손목까지 빠져나와 있었다. 남자가 돌을 하나씩 던져낼 때마다 그 손도 미세하게 흔들렸으나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란의 시선이 잠시 그 손에 붙잡혔다.

그가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조금 전 화살을 대신 맞은 이름 모를 사내가 순간 그 작은 손 위로 겹쳐졌다가, 뒤에서 가까워지는 발굽 소리에 밀려 사라졌다.

멈추면 안 됐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아란은 너무 오래전에 배웠다. 손을 내밀었다가 함께 죽는다고 세상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나쳤다.

그렇다고 눈길까지 거두지는 않았다.

저런 광경마저 아무렇지 않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자신에게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앞쪽에서 몽골 기병 둘이 나타났다.

아란은 곧바로 옆길로 몸을 틀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불붙은 수레가 골목을 가로막았다. 뒤에서는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고, 오른쪽으로 사람 가슴 높이의 돌담이 보였다.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달려가 두 손을 걸었다.

몸을 끌어올리는 순간 발밑의 돌 하나가 빠졌다. 왼손이 거친 모서리를 긁으며 미끄러졌고, 약지의 은제 인장반지가 돌에 세게 부딪치면서 날카로운 통증이 손등을 타고 팔꿈치까지 치고 올라왔다.

지금은 손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가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몸을 끌어올려 담 너머로 굴러 떨어진 아란은 무릎을 짚자마자 다시 일어났다.

몇 개의 골목을 더 빠져나가고, 무너진 집과 달아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성 밖으로 쏟아지는 혼란 속에 몸을 섞었다.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뒤에도 멈추지 않았고, 키이우의 성벽이 건물과 구릉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한참을 더 달렸다.

───
숲으로 들어선 뒤에도 처음에는 키이우의 소리가 따라왔다.

사람들의 비명과 말발굽, 무너지는 건물의 굉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나무 사이까지 밀려왔지만, 구릉 하나를 넘고 얼어붙은 개울을 건너자 소리는 차츰 멀어졌다.

가장 오래 따라온 것은 연기 냄새였다.

옷과 머리카락에 밴 냄새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끝으로 올라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도시가 아직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무 사이를 살피며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 포위망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숲으로 빼두었던 말이 아란을 알아보고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 풀렸다.

“너라도 기다려주는군.”

말의 목덜미를 몇 번 두드린 뒤 고삐를 풀고 다리에 상처가 없는지 살폈다. 안장에 묶어둔 물통과 작은 식량주머니까지 그대로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온몸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짚더미에 부딪친 어깨와 옆구리가 욱신거렸고, 숨을 깊이 들이마실 때마다 허리까지 묵직하게 당겼다. 왼손에는 어느새 피가 말라붙어 있었으며, 손가락을 움직여보니 돌담을 넘을 때 부딪친 은제 인장반지 한쪽에 전에 없던 깊은 흠집이 패여 있었다.

엄지로 문지르자 거친 자국이 손끝에 걸렸다.

“너도 하나 얻었구나.”

반지에는 이미 눈과 바위, 무기와 부딪치며 생긴 수많은 흠집이 남아 있었지만 이번 것은 유난히 깊었다. 아란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 반지를 왼손 약지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 한쪽이 붉었다.

키이우가 있는 방향이었다.

수부타이는 살아 있을 것이다.

화살을 놓는 순간만큼은 정말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컸으니 아쉬움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된 사내를 끌어안고 있던 수부타이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 아쉬움도 조금씩 다른 감정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팠겠지.”

말은 눈 속에 코를 박고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아란이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오늘은 그걸로 됐어.”

다시 수부타이를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찾아다닌 적도 없었다. 남은 인생을 그 사람 하나 죽이겠다고 써버릴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오늘 밤을 살아서 보내고 내일 아침 다시 눈을 뜨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쟁이 오지 않는 곳을 찾아 이번에는 조금 오래 머무는 것.

아란이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무를 짚고 일어나 말에 오르자 충격을 받은 옆구리와 어깨가 동시에 항의했다. 얼굴을 찌푸린 아란은 안장 위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스무 살 때는 하루 종일 말을 타도 멀쩡했는데, 창문 한 번 뛰어내렸다고 이러는군.”

말의 목덜미를 두드리자 녀석이 귀를 한 번 털었다.

“너까지 늙으면 큰일이야. 둘 중 하나는 멀쩡해야 하지 않겠어?”

말이 고개를 돌려 아란의 다리를 한번 쳐다봤다.

“그래, 알았다. 너는 아무 죄 없지.”

고삐를 잡은 아란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키이우의 불빛은 숲과 구릉에 가려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저 너머 어딘가에는 수부타이가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질긴 인연이었다.

아란이 원해서 만들어진 인연은 아니었다. 자신은 늘 반대편으로 갔고, 멀어지려고 할수록 세상은 이상하게 같은 이름을 등 뒤에서 보내왔다. 수부타이는 자신을 모르는데 자신은 수부타이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나.”

말하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수부타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란도 알고 있었다. 저 인간은 자신을 따라온 적이 없고, 오늘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

자신에게는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이었다.

수부타이에게는 지도 위를 지나온 수많은 길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원한이라면 차라리 쉬웠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자신을 미워해서 쫓아오는 것이라면 맞서 싸우든 숨어버리든 언젠가는 끝을 볼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부타이가 아란을 쫓는 게 아니었다.

전쟁이 서쪽으로 오고 있었다.

아란은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제발…… 이제 그만 따라와라.”

말이 걸음을 옮겼다.

앞에는 다시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호라즘을 떠난 뒤 몇 번이나 같은 방향으로 말을 돌렸는지 이제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산을 넘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믿었고, 강을 건너면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 집을 얻고 아는 얼굴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이번에는 정말 이곳에서 살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 믿음은 번번이 틀렸다.

그래도 아란은 또 서쪽으로 갔다.

숲을 벗어나자 나무 사이에 갇혀 있던 시야가 한꺼번에 열렸다.

멀리 서쪽 지평선 위로 겨울 해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낮게 깔린 구름의 가장자리가 불붙은 듯 붉게 물들었고, 그 아래에서는 황금빛이 긴 띠가 되어 눈 덮인 들판을 가로질렀다. 바람에 눕던 마른 풀들은 빛을 받을 때마다 물결처럼 번쩍였다.

아란은 고삐를 늦췄다.

등 뒤의 하늘을 물들이는 것은 도시를 태우는 불이었다.

눈앞의 하늘을 물들이는 것은 해였다.

같은 붉은빛인데도 전혀 다른 색처럼 보였다.

키이우의 연기 냄새는 아직 옷과 머리카락에 배어 있었고, 왼손 약지의 반지는 상처 난 피부를 눌렀으며, 창문에서 뛰어내릴 때 다친 어깨도 말의 걸음을 따라 욱신거렸다.

그런데도 아란은 서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빛 너머에는 있을지도 몰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은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곳. 저녁이 되면 불타는 성벽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를 볼 수 있는 곳. 몇 달 뒤에도, 몇 해 뒤에도 같은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내일도 그들이 그 자리에 있으리라 믿으며 잠들 수 있는 곳.

왕의 땅도, 이름 높은 도시도 필요하지 않았다.

누구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작은 집 하나와, 그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자신을 알아보는 얼굴 몇이면 충분했다.

이번에는 있을 것이다.

아란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서쪽으로 내려앉던 해가 지평선에 닿았다. 황금빛이 한순간 더 짙어지며 들판 끝까지 길게 번졌고, 마치 세상 저편으로 이어지는 길 하나가 빛 속에서 열린 것처럼 보였다.

아란은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가자.”

말이 흰 입김을 길게 내뿜었다.

아란은 고삐를 느슨하게 잡은 채 서쪽으로 향했다. 지친 말의 발굽이 눈 위에 하나씩 자국을 남겼고, 석양은 사람과 말의 긴 그림자를 그들이 떠나온 동쪽으로 밀어냈다.

아란은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앞에는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 너머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몰랐다.

더는 떠나지 않아도 되는 곳.

내일도 그곳에 있을 수 있는 곳.

아란은 그렇게 믿으며 해가 지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제23화 끝

월, 화, 수,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