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장
《신의 로그》
PART 4 — 〈헝가리〉
제22화 〈인장〉
부다페스트에는 국기가 늘어났다.
HLP의 수직이착륙기가 다뉴브강을 따라 고도를 낮추자, 강을 가로지르는 철제 교량과 오래된 아파트의 창마다, 광장을 에워싼 가로등마다 빨강과 하양, 짙은 초록의 삼색기가 바람 속에서 거칠게 펄럭이는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며칠 전까지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던 사람들이 가득 메웠던 거리였다.
이제 광장에는 국기를 망토처럼 어깨에 두른 군중이 모여 있었고, 군용 무인장갑차가 교차로를 지날 때마다 손을 흔드는 사람들도 보였다. 대로변의 대형 전광판에서는 자원입대 신청과 군수산업 긴급 인력 모집 안내가 번갈아 흘러나왔으며, 그 아래를 지나던 젊은 남녀들은 거리 어딘가에서 시작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현승은 말없이 창밖을 내려다봤다.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방음 처리된 비행 캐빈 안에서는 추진기의 낮은 진동만 좌석과 손끝을 타고 올라왔지만, 유리 너머에서 입을 벌려 노래하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과 세차게 흔들리는 국기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노라가 전면 화면에 비행경로를 띄웠다.
도시 중심부에 옅은 푸른 원 하나가 표시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헝가리 국립박물관과 국립기록보관소, 미술관과 몇몇 종교시설이 들어가 있었다. 전날 밤 HLP가 헝가리 정부의 요청을 검토하고 양측의 군사행동 중지 동의를 받아 지정한 전시 문화유산 국제보호구역이었다.
좌표는 헝가리와 루마니아 양측에 전달됐고, 군사 전술망에도 공격금지 구역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박물관 상공과 접근 항로에서의 군사행동은 중지됐으며, HLP 수직이착륙기가 보내는 국제보호 식별신호도 양국 방공망에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었다.
보호구역의 경계가 가까워지자 멀리서 선회하던 헝가리 군용드론이 기수를 돌렸다. 그 뒤로는 무기를 단 비행체가 따라오지 않았다.
현승이 푸른 원을 바라보다 말했다.
“화면에서는 선 하나인데, 저 선 안으로 들어오니까 도시가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네.”
키안이 창밖을 내다봤다.
“총을 든 사람들이 선을 존중해주는 동안은 그렇겠지.”
엘리즈가 그를 한번 바라봤지만 굳이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보호구역이 영원히 안전하다는 믿음이 아니라, 안전이 보장되는 동안 해야 할 일을 끝내는 것이었다.
수직이착륙기는 국립박물관 쪽으로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아무도 광장의 노래에 대해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
헝가리 국립박물관 정문 앞에는 관람객 대신 운송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고전주의 양식의 거대한 기둥 위로 삼각형 박공이 솟아 있었고, 넓은 계단에서는 박물관 직원들과 HLP 안드로이드들이 목상자와 완충재, 기후조절 장치가 달린 운송 케이스를 쉴 새 없이 나르고 있었다.
건물은 한 차례 전쟁의 손길을 가까이에서 겪은 뒤였다.
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 전, 몇 킬로미터 떨어진 통신시설을 향하던 무인공격기가 도심 상공에서 요격되면서 파편과 충격파가 이곳까지 밀려왔다. 서쪽 외벽의 석재에는 불규칙한 파편 자국이 남아 있었고, 깨진 창문마다 두꺼운 임시 차폐막이 덧대어져 있었다. 박공 아래의 기둥 하나에는 복구하지 못한 작은 균열이 지나갔으며, 그 옆으로 HLP 국제보호구역을 나타내는 청색 표식이 새로 붙어 있었다.
이제 박물관 주변의 공습은 멈췄다.
직원들이 서두르는 이유는 당장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질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한 번의 우연한 파편만으로도 천 년을 견딘 물건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목재와 종이, 먼지가 뒤섞인 박물관 특유의 묵직한 냄새 사이로 새로 자른 목재와 포장재의 날카로운 냄새가 끼어들었다. 로비 한쪽에는 크기가 다른 운송 케이스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직원들은 전시실과 수장고를 오가며 반출 목록과 봉인번호를 대조하고 있었다.
작업은 분주했지만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하나의 유물이 케이스 안으로 들어가면 보존 담당자가 내부 온도와 습도, 진동 허용치를 확인했고, 등록 담당자는 유물의 현재 상태와 이동 목적지, 봉인시간을 HLP 국제 데이터망에 올렸다. 마지막 확인이 끝난 뒤 잠금장치가 낮은 소리를 내며 닫히면, 케이스는 운송대 위에 실려 다음 구역으로 이동했다.
관장은 현관까지 내려와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한 듯 눈 밑이 검게 내려앉아 있었고, 충혈된 눈에는 피로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엘리즈와 악수를 나눈 그는 형식적인 인사를 길게 이어가지 않고 안쪽 복도로 몸을 돌렸다.
“이쪽입니다. 보호구역 지정은 완료됐지만, 주요 유물은 예정대로 분산 보관할 생각입니다. 같은 건물에 전부 남겨둘 이유는 없으니까요.”
엘리즈가 그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가장 취약한 것부터 보죠. 이동 자체가 더 위험한 유물은 여기 남기고, 현 위치에서 보호 수준을 높이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어렵습니다. 옮기면 위험하고, 남겨두면 또 다른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박물관은 이미 소장품을 재질과 크기, 보존 상태에 따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수백 년의 시간이 쌓인 거대한 석조 건물과 방대한 소장품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았고, 반드시 옳은 일도 아니었다.
결국 무엇을 먼저 살리고, 무엇을 그 자리에 남겨 지킬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현승은 로비에서 이어지는 전시실로 들어갔다.
짙은 자줏빛이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
거대한 반원형의 천 위로 정교한 금실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다.
몇 걸음 떨어져 바라볼 때에는 자줏빛과 금빛이 하나의 장엄한 무늬로 뭉쳐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안에서 사람의 얼굴과 가느다란 손, 십자가와 오래된 문자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천을 메운 인물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듯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자세와 표정을 품고 있었고, 금실 사이의 어두운 선들은 오랜 세월을 견딘 얼굴에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헝가리의 대관식 망토였다.
관장이 유리 앞에 멈췄다.
“원래는 망토가 아니었습니다. 1031년, 이슈트반 1세와 기젤라 왕비가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봉헌한 제의였죠. 미사 때 사제가 입는 종 모양의 옷이었는데, 훗날 앞부분을 열고 형태를 바꾸어 대관식 망토로 사용하게 됐습니다.”
현승은 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쓰임까지 바뀌면서 천 년 넘게 살아남은 거네요.”
엘리즈가 유리 가까이 다가갔다.
정면의 그리스도와 사도들, 순교자와 성인들이 층을 이루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망토를 봉헌한 왕과 왕비의 모습도 금실 속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십자가와 인물들의 배치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지만, 신앙의 의미를 설명하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오른쪽 가장자리의 바늘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쪽은 나중에 망토로 고쳐 만들면서 손댄 부분이에요. 처음 제의였을 때의 흐름과 조금 달라요.”
현승이 몸을 기울였다.
설명을 듣기 전에는 하나의 금빛 면처럼 보이던 곳에서 바늘땀의 방향과 간격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수백 년 전 누군가의 손이 원래의 옷을 자르고 접어, 왕의 어깨를 감싸는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놓은 흔적이었다.
사진에서 보던 색과도 전혀 달랐다.
오래된 자줏빛은 어느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기 어려울 만큼 깊었고, 조명의 각도가 바뀔 때마다 검붉게 가라앉았다가 오래 묵은 보랏빛을 다시 드러냈다. 금실 역시 새 금속처럼 날카롭게 번쩍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광택을 조금씩 가져간 자리에는 낮고 부드러운 빛만 남아, 천의 굴곡을 따라 조용히 흘렀다.
현승의 시선이 자수 한구석의 작은 바늘땀에 머물렀다.
“이걸 만든 사람은 알았을까.”
옆에서 운송 계획을 확인하던 노라가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자기가 놓은 바늘땀 하나가 천 년 뒤에도 남아 있을 거라는 것. 나라와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뀐 뒤에도 사람들이 이걸 지키려고 다시 옮길 거라는 것.”
노라는 망토와 기록화면을 번갈아 바라봤다.
“알았다는 증거는 없어.”
현승이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몰랐다고 단정할 증거도 없지.”
뜻밖의 대답에 현승이 그녀를 돌아봤다.
노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화면을 확인했다.
“적어도 오래 남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이만큼 공들여 만들지는 않았을 거야.”
현승은 다시 망토를 바라봤다.
누가 처음 바늘에 금실을 꿰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왕의 이름과 왕비의 이름은 남았지만, 수없이 많은 바늘땀을 놓은 손들의 이름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런데도 손은 남아 있었다.
조금 뒤 보존 직원들이 진열대의 내부 지지대를 천천히 분리했다. 망토를 직접 들어 올리는 대신, 천 전체를 받치고 있던 맞춤형 수평 지지대를 기후조절 운송 케이스 안으로 그대로 옮기는 방식이었다.
모든 고정점이 풀렸는지 확인한 엘리즈가 연결부 하나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여기는 장력이 다르게 걸려 있어요. 저 상태로 기울이면 오래 수선한 부분부터 당겨집니다. 수평을 유지한 채 이동하고, 외곽 지지대를 한 단계 더 넓히는 편이 좋겠어요.”
담당자가 위치를 확인한 뒤 지지대 설정을 바꾸었다.
천 년 전 누군가가 숨죽여 놓았던 바늘땀들이 다시 한번 사람의 손에 맡겨지고 있었다.
───
다음 전시실에서는 차갑고 무거운 은빛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의 상반신을 거의 가릴 만큼 거대한 은제 접시의 표면 위로 사냥꾼과 말, 달아나는 짐승과 숲의 나무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천육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도 은판 위에서는 사냥이 아직 끝나지 않은 듯 사람과 짐승의 몸짓이 살아 있었고, 둥근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지는 장식에는 은을 두드리고 끌로 파냈던 장인의 손길이 촘촘히 남아 있었다.
세우소 보물.
키안이 접시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이 친구들도 참 많이 돌아다녔지.”
현승이 웃었다.
“천육백 년 된 은그릇하고 언제부터 친구였어?”
“나보다 조금 먼저 태어났다고 무조건 어른 대접을 해줄 필요는 없잖아.”
키안이 거대한 접시 앞에서 두 팔을 느슨하게 벌려 크기를 가늠해보더니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 누군가의 연회장에서 음식과 술을 받치다가 땅속에 숨었고, 다시 세상에 나왔더니 이번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로 자기 것이라고 다퉜어. 첫 일곱 점과 그것을 감췄던 구리 가마솥이 2014년에 먼저 돌아왔고, 나머지 일곱 점이 2017년에 뒤따랐지. 겨우 한자리에 모였더니 이제 전쟁을 피해 다시 짐을 싸고 있고.”
관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국경을 넘기지 않습니다. 보호구역 안의 다른 보존시설로 옮기는 것뿐입니다.”
“그래도 여행은 여행이죠.”
키안의 손가락이 은판 위의 사냥 행렬을 따라 움직였다.
“어쩌면 여기 있는 우리보다 이 접시가 인간 욕심을 더 많이 봤을 겁니다.”
사냥에서 돌아오는 사람과 말, 죽은 짐승들이 은빛 표면 위에서 둥글게 이어져 있었다. 그 장면을 둘러싼 가장자리에는 잎과 덩굴이 정교하게 얽혔고, 오목한 부분마다 낮은 그림자가 고여 조각된 사람들의 움직임을 더 깊게 만들었다.
히워트가 접시 옆에 놓인 다른 은기들을 바라봤다.
“실제로 쓰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워 보여요.”
“그래서 더 잘 보였겠지.”
키안이 대답했다.
“손님이 들어오면 주인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내가 이런 은을 이만큼 가지고 있다고.”
현승이 말했다.
“주인 이름은 남았는데,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릇을 보고 짐작해야 하네.”
“그 이름도 이 접시에 새겨져 있어서 남은 거야.”
키안이 접시의 명문 쪽을 가리켰다.
“자기 은그릇이 후손들에게 오래 쓰이기를 바랐던 모양이지. 이렇게 먼 후손들까지 들여다볼 줄은 몰랐겠지만.”
키안의 말에 히워트가 웃었다.
직원들과 안드로이드들이 거대한 접시의 전용 지지대를 운송대와 연결했다. 노라는 한쪽에서 케이스의 무게 중심을 계산하다가, 고정장치가 잠기기 직전 손을 뻗어 접시가 기울지 않도록 지지대의 하중을 받아냈다.
사람 둘이 밀어도 쉽게 움직이지 않던 구조물이 그녀의 팔 아래에서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현승은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그럴 때마다 네가 사람처럼 생겼다는 걸 잠깐 잊게 된다.”
노라가 접시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보통은 잊고 있었어?”
“아니, 반대인가.”
“나중에 정리해서 알려줘.”
잠금장치가 맞물리며 낮고 단단한 소리를 냈다.
은판 위를 흐르던 빛이 차단되면서 사냥꾼과 말, 숲과 짐승이 한꺼번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키안은 닫힌 케이스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참 오래 걸려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빨리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좋겠군.”
───
금빛은 그다음 전시실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현승이 생각했던 왕관의 모습과는 달랐다.
머리에 그대로 얹을 수 있는 둥근 관이 아니라 크기가 서로 다른 반원형 금판 일곱 점과 작은 메달 두 점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각 금판 위에서는 화려한 예복을 입은 인물들이 천 년의 시간을 건너 관람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날 모노마코스 왕관이라 불리는 금판군이었다.
현승이 유리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왕관이라고?”
엘리즈가 금판들의 배열을 살폈다.
“그렇게 불리지만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됐는지는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어. 지금은 하나의 관처럼 배열해 보여주지만, 애초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왕관 형태였는지는 논의가 남아 있고.”
금판 위에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와 황후 조이, 테오도라가 남아 있었다. 그 곁으로 춤추는 여인들과 진실과 겸손을 나타내는 인물들이 이어졌고, 두 개의 작은 메달에는 성인들의 흉상이 새겨져 있었다.
금판의 홈을 메운 칠보는 오랜 세월에도 붉고 푸른 빛을 잃지 않았다. 자줏빛 옷자락과 초록빛 장식, 희고 붉은 얼굴들이 금빛 테두리 안에서 선명하게 떠올랐고,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과 지위를 후세가 잊지 않으리라 믿는 사람들처럼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히워트가 유리 앞에서 허리를 조금 숙였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금이 먼저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까 얼굴부터 보여요.”
“황제하고 황후니까 얼굴을 남긴 거겠지.”
현승이 말하자 히워트는 조이와 테오도라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봤다.
“이름을 지우고 보면 누가 황제이고 누가 황후인지 알 수 있을까요?”
키안이 옆에서 대답했다.
“가장 화려하게 차려입고 가장 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을 고르면 확률이 높겠지.”
“틀리면요?”
“그럼 천 년 전에 죽은 황제에게 사과해야지.”
히워트가 웃었지만 시선은 금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권력을 보여주려고 금 위에 얼굴을 남겼을 텐데, 지금은 권력보다 얼굴이 먼저 보여요. 이상하네요.”
현승도 잠시 황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금빛과 이름이 없었다면 그 역시 오래전에 살았던 한 사람의 얼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눈과 굳게 다문 입술만 남아, 자신을 바라보는 후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할지 모른 채 유리 안에 서 있었다.
보존 직원들이 금판을 하나씩 중성 지지대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후는 서로 다른 작은 케이스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의 왕관으로 전시되어 있던 인물들이 운송을 위해 잠시 떨어졌고, 마지막 금판 위의 얼굴까지 덮개 아래로 사라지자 진열장에는 금빛 대신 인물들의 이름을 적은 안내판만 남았다.
───
엘리즈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훨씬 가느다란 왕관이었다.
마르기트섬 왕관.
1838년, 다뉴브강의 마르기트섬에 있던 도미니코회 수도원의 왕실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이었다. 이슈트반 5세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있었고, 왕관 자체는 프랑스 고딕의 영향을 받아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거대한 보석과 두꺼운 금판으로 권력을 과시하는 물건과는 전혀 달랐다.
가느다란 금속 줄기 위에 백합과 장미를 닮은 작은 꽃들이 이어져 있었고, 잎과 꽃잎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손가락 사이에서 찌그러질 것처럼 얇았다. 왕의 머리에 실제로 힘과 권위를 더해주는 관이라기보다, 죽은 사람의 이마 위에 조심스럽게 얹어주는 금빛 레이스 화관에 가까웠다.
엘리즈가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시선이 작은 꽃들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예쁘다.”
현승이 웃었다.
“그게 끝이야?”
엘리즈가 곁눈질했다.
“왜? 고고학자는 예쁘다는 말부터 하면 안 돼?”
“팀장님 입에서 연대도, 양식도, 보존 상태도 아닌 말이 먼저 나와서.”
“그러니까 좋은 거야. 모든 걸 연대와 양식으로만 볼 필요는 없잖아.”
“팀장님께 그런 인간적인 면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엘리즈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스쳤다.
“계속 그러면 네가 들고 가.”
“취소.”
곁에 있던 히워트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나 보존 담당자가 맞춤형 운송 트레이를 가져오자 엘리즈의 표정은 곧 달라졌다. 그녀는 가느다란 금속 연결부와 오래된 수리 흔적을 차례로 살핀 뒤 작은 꽃줄기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 연결부가 생각보다 약해요. 장례용으로 만든 물건이라 반복해서 쓰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을 겁니다. 일반 기준으로 고정하면 이쪽에 하중이 몰려요.”
담당자가 확대화면을 열었다.
“지지점을 더 늘릴까요?”
“꽃잎을 직접 받치지 말고, 줄기 아래에 미세기포 보존재를 맞춰 넣어주세요. 운송 시간이 조금 늘어도 괜찮습니다. 빨리 옮기다가 팔백 년을 망가뜨리면 아무 의미 없으니까요.”
현승이 작게 웃었다.
“역시 예쁘다는 말로 끝날 사람은 아니네.”
엘리즈는 대답 대신 작업용 장갑을 건넸다.
“말할 시간에 이것부터 잡아.”
현승은 순순히 장갑을 받았다.
왕관이 전용 트레이 위로 내려앉는 동안 엘리즈는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
시간이 흐를수록 박물관은 조금씩 낯선 공간으로 변했다.
아침까지 유물이 놓여 있던 자리에는 빈 받침대만 남았고, 조명을 받던 진열장 안에는 유물의 이름과 연도를 적은 작은 안내판이 덩그러니 놓였다. 운송차량 한 대가 출발할 때마다 몇백 년, 때로는 천 년을 버틴 물건들이 보호구역 안의 다른 보존시설로 흩어졌다.
박물관 밖은 조용했다.
공습경보도, 가까운 폭발음도 들리지 않았다. HLP의 푸른 보호표식이 붙은 창문 너머로 평소와 다름없는 햇빛이 들어왔고, 계단 아래에서는 다음 운송차량이 천천히 후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깨진 창문을 가린 차폐막과 외벽의 파편 자국은 이 평온이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남겨두고 있었다.
관람객들이 보던 화려한 유물들은 이 박물관이 품고 있는 것의 일부에 불과했다.
비상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자 지상의 우아한 전시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긴 복도 양쪽으로 수장고가 이어졌고, 그 안에는 이동식 밀폐 선반과 철제 보관함이 천장 가까이까지 들어차 있었다.
손바닥만 한 토기 조각과 녹슨 버클, 깨진 유리병과 오래된 뼈, 이름 없는 사람들의 작은 장신구가 저마다의 등록번호를 달고 빽빽하게 놓여 있었다.
누군가 평범한 저녁 식사에 사용했던 그릇의 조각도 있었고, 옷깃을 여미던 금속 핀과 말에 달았던 낡은 장식도 있었다. 역사바카라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 쓰다가 버렸거나 잃어버렸고, 어떤 것은 죽는 순간까지 몸에 지니고 있었을 물건들이었다.
히워트는 위층에서보다 이곳에서 걸음이 자주 느려졌다.
왕과 황제의 얼굴 앞에서는 멀리 떨어져 유물 전체를 바라보던 그녀가, 작은 뼛조각과 닳은 장신구 앞에서는 몸을 숙여 등록표와 마모 흔적을 오래 들여다봤다.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먼저 보는지는 분명했다.
현승과 키안은 백색 보존등 아래에서 중세 유물군의 등록기록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발굴이나 분석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물마다 붙은 등록번호와 출토지역, 추정연대와 재질, 과거 보존처리 기록을 HLP의 긴급보호 목록과 맞추고, 전쟁 전 상태를 기준자료로 남기는 작업이었다.
키안이 작은 서랍식 보관함 하나를 열었다.
얇은 중성 받침 위에 오래된 은화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조금 전까지 거대한 은제 접시와 황제의 금판을 보고 내려온 뒤라서인지 검게 변색된 작은 동전들은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어떤 것은 표면의 글자가 거의 사라졌고, 어떤 것은 가장자리가 닳아 원래의 둥근 형태조차 흐트러져 있었다.
키안이 등록번호를 따라 기록을 확인하다 손을 멈췄다.
“현승, 이리 와봐.”
현승이 곁으로 다가갔다.
키안의 장갑 낀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작은 은화 한 닢이 놓여 있었다. 검고 탁하게 변한 표면 사이로 희미한 아랍 문자와 문양이 남아 있었고, 가장자리는 수많은 손가락을 거친 듯 부드럽게 닳아 있었다.
키안이 등록자료를 돌려 보여주었다.
“이 이름 읽히지?”
현승의 시선이 화면에 멈췄다.
“잘랄 앗딘.”
“그래.”
키안이 은화를 내려다보며 입가를 올렸다.
“호라즘의 마지막 술탄 이름이 다뉴브 옆까지 왔군.”
“이 은화가 헝가리에서 나온 거야?”
“출토기록은 그래.”
현승이 은화와 기록을 번갈아 바라봤다.
“멀리도 왔네.”
“돈은 원래 사람보다 여행을 많이 해. 상인의 주머니에서 군인의 품삯으로 건너가고, 약탈품이 되었다가 다시 말값이나 빵값으로 다른 손에 들어가지.”
키안은 은화를 빛에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니까 은화 하나가 여기까지 왔다고 술탄의 부하 한 사람이 호라즘에서 헝가리까지 걸어왔다고 생각하면 안 돼.”
현승이 웃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네가 말하기 전에 막은 거야. 얼굴에서 벌써 한 사람이 대륙을 건너고 있거든.”
현승이 반박하려는 순간, 옆에서 다른 보관함을 확인하던 히워트가 두 사람을 돌아봤다.
“키안 말이 맞아요. 지금 표정은 벌써 말까지 태웠어요.”
키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람을 볼 줄 아는군.”
현승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다시 기록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때 키안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잠깐.”
잘랄 앗딘의 은화와 같은 층위의 가까운 위치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함께 표시되어 있었다. 토기편과 작은 철제 버클, 동물의 뼈가 차례로 나타났고, 그 아래에 반지 하나가 있었다.
은제 인장반지.
추정연대는 13세기 전반.
현승이 화면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양식은?”
키안이 상세기록을 열었다.
“이란 동부에서 중앙아시아 서부로 이어지는 문화권과 닮았어. 인장면에 문자도 있는데 기존 기록에서는 마모가 심해서 판독 불명으로 처리됐고.”
노라가 둘 사이로 들어와 등록영상을 불러냈다.
“보호 목록에 올리려면 현재 상태를 다시 촬영해야 해. 실물을 보자.”
박물관 직원이 등록번호를 확인한 뒤 작은 보존함을 가져왔다. 뚜껑이 열리자 무산성 중성 트레이 위에서 은제 인장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층에서 보았던 세우소의 거대한 은그릇이나 모노마코스의 금판과 비교하면 처음부터 눈길을 끌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왕의 머리 위에 놓였다는 기록도, 어느 위대한 사람의 손가락에 끼워졌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그저 이름 모를 누군가가 끼었던 작은 반지였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자 그 작은 고리에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두꺼운 은제 고리는 완전한 원을 잃고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고, 손가락 바깥쪽에 놓였을 타원형 인장면의 테두리는 오랜 마찰을 견딘 끝에 부드럽게 닳아 있었다. 거의 지워진 문자 사이에는 검은 변색이 스며 있었으며, 고리 바깥쪽 한곳에는 주변의 잔흠집과 확연히 다른 깊은 충격흔이 사선으로 패여 있었다.
히워트가 먼저 몸을 숙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인장면에 모여 있는 동안 그녀는 반지를 옆으로 기울여 고리 안쪽을 살폈다.
“여기 안쪽을 봐요.”
현승이 시선을 옮겼다.
“마찰흔?”
“한두 번 의식 때만 꺼내 쓴 물건은 아닌 것 같아요. 안쪽이 고르게 닳았고 미세한 흠집이 여러 방향으로 겹쳐 있어요.”
키안도 가까이 들여다봤다.
“손가락에 오래 끼고 일했다는 뜻일 수 있겠군.”
노라가 말했다.
“가능성은 있지만, 마모만으로 착용기간이나 사용 빈도를 확정할 수는 없어. 손가락 크기와 작업환경, 반지의 순도에 따라서도 달라지니까.”
히워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누군가 자주 끼었다는 쪽이 더 자연스럽죠?”
“현재 흔적으로는 그래.”
노라는 반지를 이동식 촬영대 위에 올렸다.
백색광이 먼저 표면을 훑었고, 이어 서로 다른 각도의 사광과 다중분광 영상이 겹쳐졌다. 표면의 미세한 굴곡을 재구성한 화면 위로 육안으로는 거의 사라진 획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키안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는 확대된 획을 오랫동안 따라가다가 손가락으로 화면의 일부를 짚었다.
“이쪽 획이 맞다면…….”
현승이 기다렸다.
“바라카.”
“이름이야?”
“이 경우에는 이름보다 말에 가까워.”
키안은 복원영상의 각도를 바꾸어 다시 살폈다.
“축복. 좋은 기운과 은총이 삶에 머물기를 바라는 말이지. 다만 획 일부가 너무 닳았어. 그렇게 읽힐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기록해야 해.”
노라가 분석결과를 등록자료에 덧붙였다.
“추정 판독. ‘바라카’ 가능성. 확정 불가.”
현승의 시선이 잘랄 앗딘의 은화로 옮겨갔다가 다시 반지로 돌아왔다.
“둘은 같은 층위에서 나왔고 위치도 가까웠지?”
“맞아.”
“연대도 겹치고?”
“그래.”
현승이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엘리즈가 보호 목록을 확인하며 다가왔다. 그녀는 두 유물의 출토기록을 한 번씩 살핀 뒤 물었다.
“둘을 직접 연결할 증거는?”
노라가 대답했다.
“없어. 같은 층위와 가까운 출토 위치가 전부야.”
엘리즈는 현승을 바라봤다.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한 사람의 것이었다는 건 아직 이야기야.”
현승이 두 손을 가볍게 들었다.
“궁금할 수는 있잖아.”
“그건 네 일이야.”
엘리즈가 반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궁금증을 증명하는 것도 네 일이고.”
현승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남았다.
히워트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은 채 다시 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층에서 본 왕관과 금판에는 누구의 물건인지부터 적혀 있었고, 이름을 따라가면 그 사람이 누구와 결혼했고 어느 해에 죽었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
이 반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고리 안쪽을 닳게 만든 수많은 움직임과, 바깥쪽에 깊게 패인 한 번의 충격, 거의 지워진 축복의 말만 남아 있었다.
“이상하네요.”
히워트가 말했다.
“뭐가?”
현승이 묻자 그녀는 왕관이 있는 지상층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다 남았잖아요. 그런데 나는 이 반지를 낀 사람이 더 궁금해요.”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현승의 시선도 반지의 안쪽으로 내려갔다.
무언가를 움켜쥐고, 문을 밀어 열고, 말의 고삐를 잡고, 거친 옷을 입고 벗는 동안 조금씩 쌓였을 법한 흔적들이 은제 고리 곳곳에 겹쳐 있었다.
왕관에서는 먼저 왕의 이름을 보게 됐다.
이 반지에서는 먼저 손이 보였다.
박물관 직원이 잘랄 앗딘의 은화와 인장반지에 각각 새로운 보호번호를 부여했다. 가까운 곳에서 출토됐다는 사실은 기록에 남겼지만, 두 유물의 소유관계는 미확정으로 두었다. 은화는 먼저 개별 보존함에 들어갔고, 반지는 마지막 확인 촬영을 위해 촬영대 위에 남았다. 그 옆에는 같은 운송 묶음으로 옮길 별도의 보존함이 준비되어 있었다.
키안은 은화의 기록을 닫았고, 엘리즈는 남은 작업량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수장고 밖으로 나갔다. 히워트도 다음 보관함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노라는 촬영자료를 국제보호망에 전송하기 시작했다.
현승도 그 뒤를 따라가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작은 반지가 차가운 보존등 아래 남아 있었다.
타원형 인장면의 문자는 절반 가까이 닳아 있었고, 둥글어진 가장자리와 고리 안쪽에는 오랜 시간 사람의 몸과 부딪치며 생긴 잔흠집이 촘촘하게 남아 있었다.
차가운 흰빛이 그 굴곡을 따라 미끄러졌다.
빛은 깊게 패인 충격흔 안으로 들어가 잠시 머물렀다가, 거의 지워진 문자의 홈을 타고 다시 은빛 표면 위로 올라왔다.
───
그 은빛 위로 붉은 빛이 흔들렸다.
은제 인장반지가 굵은 왼손 약지를 감싸고 있었다. 인장면에는 아직 획이 남은 축복의 말이 새겨져 있었고, 고리에는 오래 착용하며 생긴 작은 흠집들이 겹쳐 있었다.
그 손은 나무 활을 움켜쥐고 있었다.
해진 소매가 손목을 덮었고,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 왼팔은 검게 그을린 창틀의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다. 오른손이 뺨 가까이까지 시위를 끌어당기자 활대가 깊게 휘었으며, 시위 위의 화살촉이 창밖에서 흔들리는 불길을 받아 차갑게 번뜩였다.
깨진 창 너머에서는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겨울바람에 휩쓸린 검은 연기와 붉은 불티가 잿빛 겨울 하늘로 솟구쳤고, 멀리서 무너지는 돌벽의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여 들려왔다. 불길이 흔들릴 때마다 어둠 속의 어깨와 얼굴이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졌다.
활을 든 한 사내가 창가에 서 있었다.
제2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