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로그

전쟁

by천시록

《신의 로그》

PART 4 — 〈헝가리〉


제21화 〈전쟁〉



전쟁은 새벽의 침묵을 찢고 시작되었다.


전날 밤부터 이어진 부쿠레슈티와의 협상은 날짜가 바뀐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헝가리는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최소 공급량만 열어달라고 요구했고, 관리권 일부를 국제기구에 맡기거나 이후 더 높은 가격으로 대가를 치르는 조건까지 내놓았지만, 루마니아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국에 필요한 전력과 가스를 줄여 헝가리에 보낼 수 없다.


새벽 2시 17분, 루마니아 서부의 이동식 방공체계가 기존 위치를 떠났다는 보고가 부다페스트 대통령궁 지하 작전통제실에 들어왔다. 뒤이어 전방 지휘소의 통신량이 급격히 늘었고, 국경 인근 공군기지에서는 무인전투기 일부가 분산 배치되기 시작했다.


루마니아군이 국경을 넘은 것은 아니었다.


헝가리의 정국과 군부 동향을 지켜보던 그들이 만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시작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국가전략 AI가 새로 들어온 방공부대의 이동 정보와 무인전투기의 분산 상황을 반영할 때마다, 화면 한쪽의 초기 작전 성공 가능성은 조금씩 떨어졌다.


81.6%.


79.8%.


78.9%.


대통령은 부쿠레슈티에서 도착한 마지막 문서를 끝까지 읽은 뒤 천천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공급 재개는 불가능하며, 헝가리군의 움직임이 계속될 경우 루마니아 역시 필요한 방어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총리가 맞은편에서 물었다.


“다시 연락하시겠습니까?”


대통령은 문서 위에 손을 얹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통역관의 목소리가 오가던 통신장치는 고요했고, 작전통제실의 어둠 속에서는 전략지도와 수백 개의 전력표시만이 푸른빛과 붉은빛을 번갈아 토해내고 있었다.


“저들이 먼저 공격한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의 말에 총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국경을 넘으면 침략입니다.”


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총리는 지도 위에서 이동 중인 루마니아 방공부대의 표시를 바라봤다.


“하지만 저들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더 많은 전력이 분산될 것이고, 그때는 지금과 같은 조건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대통령은 의자에 앉은 사람들을 차례로 바라봤다. 외교장관은 마지막 협상문서를 앞에 둔 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은 아직 승인되지 않은 작전계획을 화면에 펼쳐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먼저 실행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활주로에서는 무인전투기들이 이미 연료를 채우고 있었고, 국경 가까운 지하 격납고에서는 군사 임무에 편성된 안드로이드들이 수송차량에 올라가 진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은 창문도 없는 지하실에서 한동안 동쪽을 바라보듯 고개를 들었다.


지상에는 아직 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부다페스트의 아파트에서는 사람들이 잠들어 있고, 멈춘 공장에서는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작업대 위로 먼지가 내려앉고 있을 것이다. 루마니아의 국경도시에서도 사람들은 같은 어둠 속에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이 방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내려지는 명령은 잠든 사람들 모두에게 닿을 것이었다.


새벽 3시 49분.


대통령이 최종 승인 화면에 손을 올렸다.


생체정보가 확인되고 국가수반의 전략권한이 활성화되자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의 인증창이 차례로 열렸다. 두 사람의 권한까지 일치한 뒤에야 잠겨 있던 작전명령이 지휘통제망을 따라 공군기지와 국경부대로 퍼져나갔다.


총리는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봤다.


명령을 내린 사람은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총리도 반대하지 않았다.


───

헝가리 동부 군용 비행장.


활주로 양옆의 유도등을 따라 수십 대의 무인전투기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엔진이 토해낸 고열이 새벽 공기를 일그러뜨렸고, 기체가 하나씩 속도를 높여 땅을 떠날 때마다 활주로에 눌러붙어 있던 먼지와 마른 풀이 거센 후류에 휘말려 뒤집혔다.


기체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 세대 전이었다면 비슷한 임무를 맡은 전투기 안에 젊은 인간들이 앉아 있었을 것이다. 전투를 앞둔 두려움을 감추려고 농담을 주고받고, 살아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며, 누군가는 끝내 보내지 못할 메시지를 가족에게 썼을 사람들이었다.


2050년의 새벽, 활주로를 떠나는 기체에서는 가족에게 보내는 마지막 통신도, 출격을 앞두고 흔들리는 숨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지정된 간격과 속도, 연료 잔량과 무장 상태만 지휘망으로 돌아왔다.


지하 격납고에서는 군사 임무에 편성된 안드로이드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수송차량의 적재함으로 올라갔다. 마지막 개체가 지정된 고정장치에 몸을 연결하자 차량의 전술망이 각 기체의 상태를 동시에 확인했고, 탄약과 전력 잔량, 관절 구동률이 중앙 지휘망 위로 일제히 떠올랐다.


옆 통로에서는 처음부터 전쟁을 목적으로 설계된 M계열 전투 머신들이 별도의 수송차량에 실리고 있었다. 낮고 육중한 몸체 양옆으로 임무용 장비가 접혀 들어갔고, 인간형 안드로이드들이 올라탄 차량보다 두꺼운 고정장치가 기체를 붙들었다.


두꺼운 철문이 닫히면서 격납고 안의 붉은 예비등이 꺼졌다.


첫 편대가 이륙한 지 28분 뒤, 루마니아 서부 국경지대의 핵심 방공 레이더 하나가 신호를 멈췄다.


첫 폭발을 시작으로 통신 중계시설과 무인기 관제시설, 전방 방공진지에서 거의 동시에 불길이 솟았다. 레이더 운용병들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두 번째 공격이 통신망을 끊었고, 첫 번째 무인전투기 편대는 이미 기수를 돌려 다음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 헝가리군이 국경을 넘었다.


───

첫 번째 목표는 국경 가까이에 자리한 압송·저장 복합시설이었다.


서부 루마니아의 가스망이 모이는 그곳에는 저장가스의 입출고를 관리하는 설비와 압송기, 여러 갈래의 분배관이 얽혀 있었고, 그중 하나가 국경 아래를 지나 헝가리 깊숙이 뻗어 있었다. 공급량이 줄어들다가 끝내 흐름이 멎은 헝가리의 동맥이었다.


루마니아군도 대비하고 있었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들판에서는 풀잎마다 이슬이 맺혀 있었고, 콘크리트 방벽과 참호 뒤에서는 인간 병사들이 대전차무기의 조준장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루마니아의 무장 안드로이드들이 섞여 있었으며, 육안으로는 새벽하늘의 작은 점에 불과한 높이에서 양측 정찰드론과 요격드론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 속에서는 이미 다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통신이 짧게 끊겼다가 되살아났고 위성항법 좌표가 흔들렸으며, 멀쩡하던 표적표시가 갑자기 들판 한가운데로 튀었다. 양측의 전술 AI는 들어오는 정보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상대가 흘린 거짓 신호인지 가려내느라 연산능력을 쏟아부었다.


헝가리 선발대가 사격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루마니아 진지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대전차미사일 한 발이 새벽의 어둠을 길게 가르고 날아와 선두의 무인장갑차를 정면으로 때렸다. 귀가 멎는 듯한 굉음과 함께 차체 앞부분이 들려 올라갔고, 끊어진 궤도와 장갑판 조각이 불붙은 흙 위로 쏟아졌다.


그러나 뒤따르던 차량들은 멈추지 않았다.


파괴된 차량의 감시장비가 마지막 순간까지 수집한 영상과 적의 발사 지점이 대열 전체에 공유되자 후속 차량들이 좌우로 갈라졌고, 상공을 선회하던 공격드론들이 낮게 기수를 숙였다.


루마니아 진지 앞에서 폭발이 연달아 일어났다.


축축한 흙과 콘크리트 조각이 검은 비처럼 쏟아졌고, 폭약 냄새와 타는 전선의 매캐한 냄새가 새벽 공기를 밀어냈다. M계열 전투 머신이 무너진 방벽을 넘어 진입로를 벌리자, 방호장비와 소총을 갖춘 인간형 안드로이드들이 그 뒤를 따라 먼지 속으로 들어갔다.


총탄이 가슴과 어깨의 방호판을 때릴 때마다 둔탁한 금속음이 이어졌다. 피탄으로 균형을 잃은 개체가 무릎을 짚고 자세를 되찾는 동안 옆의 기체가 사격을 이어갔고, 바로 앞의 안드로이드가 폭발에 휘말려 허리 부분이 뜯겨나가자 뒤따르던 기체들은 쓰러진 몸을 우회해 진격했다.


맞은편 참호에서는 사람이 피를 흘렸다.


팔을 붙잡고 웅크린 병사를 동료가 끌어내는 동안 다른 병사가 그의 자리를 메웠고, 흙먼지 사이로 다시 대전차무기의 불꽃이 솟았다. 루마니아의 안드로이드들은 인간 병사가 물러나는 짧은 순간을 막아서며 헝가리 기계들을 향해 사격을 집중했다.


사람이 결정한 전쟁을 기계가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괴된 기계 뒤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었다.


압송시설 외곽의 마지막 저지선이 무너진 것은 해가 지평선 위로 붉은빛을 드러낼 무렵이었다. 헝가리 기술부대가 전투부대의 뒤를 따라 시설 안으로 들어갔고, 방탄복 위에 공구와 측정장비를 매단 기술자들이 배관과 압력조절장치, 지하 저장시설의 원격제어망을 차례로 확인했다.


루마니아 측은 철수 직전 중앙통제망을 잠갔지만 물리적인 배관과 압송기는 파괴하지 못했다. 기술자들은 차단된 중앙 제어계에서 설비를 분리한 뒤 현장 제어 상태를 확인했고, 저장시설에 남은 가스량과 헝가리 방향 관로의 상태를 대조했다.


한 시간 뒤 보고가 부다페스트로 올라갔다.


시설 손상 경미.


현장 제어권 확보.


연결 관로 점검 후 제한적 공급 재개 가능.


대통령궁 작전통제실의 화면 한쪽에 숫자가 떠올랐다.


1단계 작전 목표 달성률 78.4%.


그 숫자가 조금씩 올라가는 동안 시설 반대편 도로에서는 인간 부상자들을 가득 실은 구급차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후방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

아침 8시가 조금 지나자 전쟁은 헝가리의 모든 화면을 점령했다.


정부는 긴급 특별방송을 통해 루마니아의 에너지 공급 중단으로 국가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핵심 에너지 시설을 확보하기 위한 제한적 군사작전을 개시했다고 발표했다. 화면에는 압송시설 안으로 들어선 헝가리 기술진이 압력계와 배관을 점검하는 모습이 반복해서 나왔고, 그 아래로 ‘제한 공급 재개 준비 착수’라는 자막이 끊임없이 흘렀다.


며칠 전 공장에서 기약 없는 휴직 통보를 받았던 노동자도 그 영상을 보고 있었다.


굳게 잠긴 공장 정문 앞에는 동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전력 배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소식에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휴대기기의 화면을 펼치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주변으로 다가왔고, 작은 화면 위로 여러 개의 얼굴이 겹쳐졌다.


“압송시설을 잡았대.”


“관은?”


“파괴되지 않았답니다. 다시 열 수 있대요.”


사람들의 시선이 화면 속 굵은 강철관과 압력계에 붙었다.


“그럼 가스가 다시 들어오는 거야?”


아무도 확답할 수 없었다.


점령한 시설 너머에는 아직 루마니아의 분배망이 남아 있었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그 관이 온전히 유지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절망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사람들에게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관이 열리면 에너지가 들어온다.


에너지가 들어오면 발전소와 공장이 움직인다.


공장이 움직이면 다시 일할 수 있다.


누군가 박수를 쳤다.


처음에는 두세 사람뿐이었지만 ‘제한 공급 재개 준비 착수’라는 자막이 다시 화면 아래를 지나가자 손뼉 소리가 빠르게 번졌고, 마침내 공장 앞을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서로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어깨를 두드리고 끌어안았으며, 누군가는 집에 전화를 걸어 이제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며칠 전 공장장은 언제 다시 출근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아내는 밀가루와 아이가 마실 물을 구해달라고 했고, 마트에서는 사람들이 생수 한 묶음을 차지하려고 서로의 팔을 붙잡았다.


그런데 지금은 국경 너머의 강철관 하나가 다시 열릴 수 있다는 소식만으로 세상이 달라 보였다.


“우리도 다시 들어갈 수 있겠네.”


곁에 있던 동료가 말했다.


노동자의 입가에도 천천히 웃음이 번졌다.


“그래…… 다시 일할 수 있겠지.”


그 기대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현실이 되었다.


───

전쟁이 시작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헝가리 정부는 군수산업 비상생산명령을 발동했다.


전선에서 소모되는 전투 머신과 무인장갑차, 공격드론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완성차와 기계·전자부품 공장마다 생산 가능한 군수품 목록과 전환 지침이 내려갔다. 전력 부족으로 멈춰 있던 공장들 가운데 일부가 국가 중요 군수시설로 재분류되면서 기존 전력망에 남아 있던 전기가 병원과 정수장 다음으로 그곳에 우선 배정되었다.


점령한 압송시설에서 새 가스가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은 부족한 전력을 어디에 먼저 보낼 것인지를 하루아침에 바꾸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둠에 잠겨 있던 생산동에 조명이 켜졌다. 멈춰 있던 모터가 처음에는 낮게 떨리다가 서서히 일정한 회전음을 되찾았고, 컨베이어벨트가 움직이자 작업대 위에 남아 있던 부품들이 다시 조립라인을 따라 흘렀다.


기술자들은 민간용 자동차 전장부품 라인의 일부를 비우고 기존 설비로 만들 수 있는 구동부와 전력제어장치부터 시험생산을 준비했다. 중앙 서버에는 새 설계도와 가공 조건이 올라왔고, 산업용 로봇팔들이 바뀐 부품의 규격에 맞춰 시험 동작을 시작했다.


노동자의 휴대기기가 울린 것은 오후가 되기 전이었다.


발신자는 공장이었다.


“내일부터 출근하십시오.”


그는 휴대기기를 귀에 댄 채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전력이…… 들어옵니까?”


“우선배정이 결정됐습니다. 생산라인도 전환됩니다. 내일부터 설비 조정과 시험생산에 들어갑니다.”


“무엇을 만듭니까?”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말했다.


“군에 납품할 안드로이드 구동부입니다.”


통화가 끝난 뒤에도 노동자는 휴대기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내일이면 다시 출근할 수 있었다.


월급을 받고 아이에게 물과 먹을 것을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만들게 될 관절은 국경 너머에서 사람을 향해 총을 들 기계의 팔과 다리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는 그 생각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부터 다시 일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이 더 급했다.


기묘한 구원의 소식은 그의 공장에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전선의 기계 손실이 늘고 보급 수요가 커지자 정부는 경찰과 공공기관, 산업현장에서 운용하던 안드로이드 일부를 전시 동원 대상으로 지정했다. 운반과 정비를 맡던 기체들이 후방 수송부대로 보내졌고, 동원 대상으로 확보된 생활용 안드로이드 가운데 일부 모델에도 물자 분류와 운송, 시설관리를 위한 임무 전환이 시작됐다.


운용 권한이 군 지휘망으로 넘어가고 새로운 프로그램이 적용되자, 어제까지 창고의 물건을 나르던 기계가 탄약 상자를 옮겼다. 산업현장에서 중량물을 들어 올리던 기체에는 군용 수송장비가 연결됐고, 정비용 안드로이드 앞에는 민간 차량 대신 파손된 군용차량이 놓였다.


과거의 전쟁이 젊은 인간들을 집과 일터에서 데려갔다면, 이번 전쟁은 먼저 기계들을 데려가고 있었다.


사람의 노동을 대신하던 안드로이드들이 빠져나갈 자리에 사람이 필요해졌다. 물류센터에서는 상하차 인력을 모집했고 운송회사들은 운전자를 찾았으며, 순찰 지원용 안드로이드의 동원이 결정된 경찰은 치안 보조인력 채용을 준비했다. 정비업체와 공공시설에서도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며칠 전까지 일할 곳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없던 고용센터 앞에 다시 긴 줄이 생겼다.


전쟁이 시작된 그날 오후.


사람들에게 일터로 돌아오라는 연락이 오고 있었다.


───

부다페스트의 거리도 달라졌다.


이틀 전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던 지하철역 계단에서 다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다뉴브를 건너는 다리 위에도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손에 들린 것은 달랐다.


식량 가격과 전력 배급을 비난하던 피켓 대신 빨강과 하양, 짙은 초록의 헝가리 삼색기가 수많은 사람의 머리 위에서 물결쳤다. 깃발이 바람을 때릴 때마다 마른 천이 연달아 펄럭였고, 압송시설 확보와 공장 재가동 준비, 긴급채용 소식이 대형 전광판을 지나갈 때마다 군중의 함성이 다뉴브강 위로 번졌다.


이틀 전 경찰의 방패를 향해 돌을 던졌던 공장 노동자도 그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날 같은 손에서 뜨겁고 거친 돌이 떠났다.


오늘은 그 손에 국기가 들려 있었다.


누군가 헝가리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까이에 있던 몇 사람만 목소리를 섞었지만 노래는 곧 옆 사람에게 번졌고, 광장 반대편에서도 같은 선율이 솟아올랐다. 수만 명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국회의사당의 벽과 다뉴브의 물결까지 낮게 떨리는 듯했다.


노동자는 국기를 더 높이 들었다.


아침까지도 자신에게 전쟁은 화면 속에서 기계들이 벌이는 일이었다.


이제 전쟁은 내일 다시 출근할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

대통령은 집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


전날과 같은 자리였다.


다뉴브가 보였고 그 너머로 국회의사당과 광장이 보였다. 창 아래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강을 건너 올라오는 것도 같았다.


이번에는 그 함성 사이로 노래가 들렸다.


전날 같은 도로에서는 차량이 불타고 검은 연기가 강변으로 번졌다. 대통령은 물러나라는 구호가 회의실까지 밀려들었고,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명령이 언제까지 이 도시에 닿을 수 있을지 묻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국기를 흔들며 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대통령님, 긴급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번 군사작전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68퍼센트입니다.”


대통령은 돌아보지 않았다.


“직무 수행 지지도도 크게 올랐습니다.”


“얼마나?”


“61퍼센트입니다.”


대통령은 한동안 광장의 노래를 듣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제는 나더러 물러나라고 했는데.”


비서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부가 몇 달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군수시설로 지정된 공장에는 다시 전기가 들어갔고, 일터에서 기다리던 전화가 왔으며, 구직 공고를 찾던 사람들 앞에는 새 일자리가 나타났다. 물 한 병을 놓고 서로를 밀치던 사람들이 같은 깃발 아래에서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기대에는 이유가 있었다.


대통령은 안경을 벗었다.


손에 쥔 안경 너머로 광장의 깃발과 사람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뒤쪽 화면에서는 작전 진행 보고가 갱신되고 있었다. 확보한 시설과 복귀한 무인기의 수 아래로 양국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 현황이 올라왔지만, 상당수 항목에는 아직 확인 중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광장의 노래는 끊기지 않았다.


대통령은 안경다리를 접었다가 다시 폈다.


그는 군사작전의 초기 성공 가능성을 물었다.


정부가 통제력을 잃을 가능성과 전쟁이 시작됐을 때의 피해도 물었다.


점령 이후 전쟁이 길어지거나 주변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경고도 들었다.


그러나 초기 목표를 달성한 다음, 그 성공이 무엇을 불러올지까지 끝까지 따져 묻지는 못했다.


아직은.


───

루마니아의 반격은 오후에 시작됐다.


새벽의 기습으로 타격을 받은 루마니아군은 살아남은 지휘시설과 무인전력을 분산한 뒤 국경 너머의 헝가리 군수기지와 보급시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선 가까운 목표에 타격이 집중됐지만, 헝가리가 후방의 무인기 발진기지까지 공격하면서 루마니아 역시 공격 범위를 넓혔다.


오후 2시 12분.


헝가리 동부의 군수물류시설을 향하던 루마니아 공격드론 한 대가 강한 전자전 교란에 휘말렸다. 위성항법 신호가 끊기자 전술 AI는 저장된 지형정보와 관성항법장치로 경로를 보정했지만, 곧 헝가리 요격드론의 파편이 기체 후미를 뚫고 들어가면서 방향제어 장치가 손상됐다.


기체가 급격히 기울었다.


목표까지는 아직 거리가 남아 있었고, 아래에는 아파트와 상점, 학교가 이어지는 주거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전술 AI는 남은 추력을 이용해 고도를 되찾으려 했지만 한쪽 날개에서 불길이 번졌고, 몇 초 뒤 통제력을 완전히 잃은 드론은 회색 건물들 사이로 떨어졌다.


폭발은 군수물류시설이 아니라 아파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한쪽 동의 외벽이 안으로 무너지면서 거대한 회색 먼지가 도로를 집어삼켰다. 수십 개의 창문이 한꺼번에 깨졌고, 충격에 밀린 차량들이 서로 부딪치며 경보음을 토해냈다. 잘린 전선이 파열된 수도관에서 흘러나온 물 위로 떨어져 푸른 불꽃을 튀겼으며, 찢어진 도시가스관에서는 역한 냄새가 분진 사이로 퍼져나갔다.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주민들이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누군가는 맨발이었고, 누군가는 품에 안은 아이의 얼굴을 계속 두드리며 이름을 불렀다. 조금 전까지 사람의 집이었던 곳에서는 철근과 콘크리트, 찢어진 커튼과 부서진 가구가 한 덩어리가 되어 쏟아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드론과 소방 임무를 맡은 안드로이드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무너진 콘크리트 아래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중량 작업용 기체 하나가 구조물을 받쳤고, 인간 구조대원이 그 아래로 몸을 밀어 넣었다. 다른 개체는 2차 폭발을 막기 위해 도시가스 배관을 차단했으며, 또 다른 안드로이드는 앞이 보이지 않는 분진 속으로 들어가 생체신호를 탐색했다.


국경에서는 같은 계열의 몸과 구동장치를 지닌 안드로이드들이 무장을 갖추고 진격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살리고 있었다.


기계가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명령이 달랐다.


도로 한쪽에는 파괴된 식료품점에서 쏟아져 나온 생수병들이 굴러다녔다. 찢어진 포장에서 빠져나온 병 하나가 콘크리트 조각에 눌려 터졌고, 새어 나온 물은 먼지와 피, 검은 재를 적시며 배수구로 흘렀다. 누구도 그것을 주우려 하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서로의 팔을 붙잡고 빼앗던 물이었다.


───

저녁 뉴스의 첫 화면은 무너진 아파트였다.


사망자의 이름과 나이가 하나씩 공개되면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낮의 흥분이 서서히 사라졌다. 대형 전광판에 구조현장 영상이 나타나자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고, 공장 노동자도 국기를 든 채 화면을 올려다봤다.


누군가 욕설을 내뱉었다.


“민간인 지역이잖아.”


조금 전까지 압송시설을 확보했다며 환호하던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저놈들이 우리 사람들을 죽였어.”


“군수시설로 가던 드론이 요격당해 떨어졌다는 보도가 있어.”


“그래서?”


남자는 화면 속 무너진 아파트를 가리켰다.


“실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


주변에서 거친 목소리가 하나둘 올라왔다.


공장 노동자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바라봤다. 죽은 사람 가운데 아는 사람은 없었고, 자신이 사는 동네도 아니었다.


그런데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공장이 다시 돌아간다는 기대 때문에 쥐었던 국기였다. 지금 그의 손은 같은 깃대를 훨씬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어디선가 외침이 터졌다.


“우리 사람들을 죽였잖아!”


또 다른 목소리가 받았다.


“끝까지 가야 해!”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이 따라 외쳤다.


자신들이 먼저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너진 아파트 앞에서는 그 사실보다 눈앞의 시신이 더 가까웠다.


───

루마니아에서도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헝가리의 첫 공습으로 파괴된 국경 방공시설 주변에서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수습되고 있었고, 헝가리군이 새벽에 국경을 넘어 에너지 시설을 장악했다는 소식은 전국으로 퍼졌다.


부쿠레슈티 중심광장에도 루마니아 국기가 올라갔다.


한 젊은 여자는 첫 공습으로 죽은 남동생의 사진을 가슴에 안고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사진 속 남자는 군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방공진지 가까운 통신시설에서 일하던 기술자였고,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야간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여자는 사람들의 구호를 따라 외치지 않았다.


다만 사진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누른 채, 헝가리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라는 목소리 속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의 군 지원창구에는 긴 줄이 생겼다.


그들에게 이 전쟁은 자신들이 선택한 전쟁이 아니었다. 새벽에 국경을 넘어온 적으로부터 가족과 땅을 지키는 전쟁이었다.


헝가리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고 믿었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침략당했기 때문에 싸운다고 믿었다.


두 믿음은 같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

전쟁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처음 계획했던 선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헝가리는 확보한 압송·저장시설을 지키기 위해 주변 도로와 철도, 교량을 통제해야 했다. 루마니아는 그 보급로를 끊으려고 교량과 물류시설을 공격했고, 헝가리가 공격드론 발진기지를 타격하자 루마니아는 헝가리의 무인전력 통제시설을 공격했다.


통제시설을 보호하려면 방공망을 넓혀야 했고, 넓어진 방공망은 다시 상대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공격할 이유가 생길 때마다 상대에게는 보복할 이유가 하나씩 늘었다. 양국의 작전지도 위에서는 새로운 목표를 뜻하는 붉은 점들이 계속 나타났고, 처음에는 국경 가까이에 모여 있던 표시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도시와 산업시설 쪽으로 번져갔다.


전선은 국경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전쟁은 지도 위의 선을 지키지 않았다.


해가 기울 무렵, 부다페스트에도 공습경보가 울렸다.


───

헝가리 국립박물관의 석조 건물이 흔들린 것은 도심 전역에 사이렌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공격 목표는 박물관이 아니었다.


몇 킬로미터 떨어진 국가 통신 중계시설을 향해 날아오던 루마니아 무인공격기가 박물관 인근 상공에서 헝가리 방공미사일에 요격됐다. 공중에서 터진 탄두와 기체 파편이 불붙은 비처럼 넓게 흩어졌고, 충격파가 창문을 때리는 사이 일부 파편이 박물관 서쪽 외벽과 인근 도로에 꽂혔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유리 파편, 석재 조각, 회색 석고가루가 전시실 안으로 쏟아졌고,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크게 흔들리면서 몇 차례 빛을 깜빡였다. 오래된 석조 벽 안쪽에서는 금이 번져나갔고,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던 보존장비가 전압 이상을 감지하자 수장고 곳곳에서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관람객과 직원 대부분은 이미 지하로 대피한 뒤였다.


박물관장은 지하 대피공간에서 연결된 수장고로 향했다. 이동 가능한 주요 유물은 안전구역으로 옮기는 중이었지만 공간은 빠르게 차고 있었고, 운송상자와 완충재, 포장을 기다리는 유물들이 통로 양쪽에 층층이 쌓여 있었다.


박물관이 품고 있는 것은 몇백 점의 물건이 아니었다.


수천 년 동안 이 땅을 지나간 사람들이 남긴 시간이 층층이 눕혀져 있었다.


모든 것을 옮길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관장은 수장고 입구에 쌓여가는 운송상자와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소장품 목록을 번갈아 바라봤다.


“긴급 등록 작업은 어디까지 됐나?”


젊은 학예연구원이 손에 든 패드를 확인했다.


“기본 소장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HLP와 UNESCO의 전시 문화유산 긴급보호 체계에 올리려면 개별 식별정보와 현재 상태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분산보관 장소와 이동기록도 함께 등록해야 하고요.”


“얼마나 걸리지?”


연구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록은 화면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머리 위에서는 보존장비의 경고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그때 다른 직원이 통신기기를 들고 급히 다가왔다.


“관장님! 문화부에서 긴급 연락입니다. HLP 현장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국제 긴급보호 등록과 반출 우선순위 검증, 유물 봉인과 분산보관 절차까지 지원할 수 있답니다.”


관장이 고개를 들었다.


“HLP가 들어올 수 있나?”


“정부가 보호구역 지정과 안전통로 확보를 요청하겠답니다. 루마니아 측과도 군사행동 중지를 협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현장 장비와 안드로이드 지원부터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멀리서 또 한 번 폭발음이 울렸고, 천장의 미세한 석고가루가 운송상자 위로 흩어졌다.


이번에는 아무도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관장은 철문 너머로 끝없이 이어진 수장고를 바라봤다.


“당장 요청해.”


직원이 움직이려 하자 그가 덧붙였다.


“우리 박물관만 올리지 마. 국립기록보관소와 미술관, 보호가 필요한 종교시설까지 전부 확인해서 함께 요청하라고 해.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파괴된 뒤에는 무엇이 사라졌는지조차 증명할 수 없어.”


“알겠습니다.”


직원이 통신기기를 들고 돌아섰다.


관장은 다시 수장고를 바라봤다.


밖에서는 누가 이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불길과 파편은 어느 쪽의 역사인지 묻지 않았다.


───

이스탄불 HLP 본부의 상황실에도 하루 종일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지도가 떠 있었다.


처음에는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여러 분쟁지역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오후부터 부다페스트와 국경지역의 문화유산 시설들에 표시된 위험등급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해가 질 무렵 헝가리 정부의 공식 긴급보호 요청이 접수되자 국립박물관과 기록보관소, 미술관, 종교시설의 위치가 지도 위에 한꺼번에 나타났다. 각 시설 위에는 주변 폭발 횟수와 건물 손상도, 전력 공급 상태, 화재와 약탈 위험을 나타내는 수치가 겹쳐졌다.


엘리즈는 요청서를 읽다가 부다페스트 지역을 확대했다.


“헝가리 국립박물관 서쪽 외벽과 전시실 파손. 수장고 보존시설 일부 불안정.”


현승이 의자를 끌어 화면 가까이 다가왔다.


노라는 이미 헝가리 측이 전송한 소장품 자료와 박물관 건축도면, 손상된 구역의 영상을 대조하고 있었고, 키안과 히워트도 빠르게 늘어나는 위험지역을 함께 바라봤다.


“전시 문화유산 긴급보호 등록 요청이야?”


“그것만이 아니야.”


노라가 목록을 띄웠다.


“기본 소장기록은 있는데 전쟁 전 상태와 지금 상태를 다시 확인해야 할 유물이 너무 많아. 무엇이 어디로 옮겨졌는지 이동 경로와 봉인정보도 남겨야 하고, 건물이 추가로 손상될 경우 무엇부터 반출할지도 정해야 해.”


엘리즈가 요청서의 마지막 부분까지 읽었다.


긴급보호 등록을 위한 현장 검증, 유물 식별, 반출 우선순위 결정, 분산보관 계획과 이동기록 관리까지 지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보내온 영상과 목록만으로는 부족해. 유물의 균열이나 오래된 수리 흔적을 확인하려면 현장에 정밀 장비부터 들어가야 해. 잘못 옮기면 폭격을 피하려다 운송 중에 망가질 수도 있어.”


키안은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공습경보 구역을 바라봤다.


“지금 저기는 전쟁터야.”


“알아. 위험구역 작업은 안드로이드와 드론이 맡아. 인간 연구진은 보호구역과 접근 항로의 안전이 확인된 뒤에 들어가고.”


현승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준비는 지금 시작해야겠네. 안전해진 다음 장비를 모으기 시작하면 늦을 테니까.”


상황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전쟁은 막 시작됐다. 부다페스트의 공항과 주요 이동로는 아직 완전히 끊기지 않았고, 헝가리 정부가 HLP의 현장 접근을 지원하겠다는 공식 문서도 함께 보내왔다.


그러나 헝가리의 약속만으로 보호구역을 만들 수는 없었다. 접근 항로와 작업구역의 좌표를 양국에 전달하고, 그 안에서 군사행동을 중지한다는 확인을 받아야 했다. 건물의 구조 안전과 대피 경로도 따로 점검해야 했다.


엘리즈가 화면을 HLP 이동통제망으로 넘겼다.


“현장 대응팀 편성해. 보존 장비와 운송 케이스부터 준비하고, 보호구역 협의는 양쪽에 동시에 요청해.”


키안이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즈는 부다페스트 위에 떠 있는 붉은 경고표시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통로가 확보되면 바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해. 오늘 열려 있다고 해서 내일도 열려 있다는 보장은 없어.”


현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라는 현장 투입용 안드로이드와 정밀 조사 장비의 가용 목록을 불러왔다. 상황실 한쪽에서는 헝가리 정부와 연결된 통신창 옆으로 루마니아 측에 보낼 보호구역 좌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엘리즈가 목적지를 지정했다.


“헝가리 국립박물관.”


상황실의 대형 화면 위에서 이스탄불과 부다페스트 사이에 하나의 이동경로가 그어졌다.


아직 승인되지 않은 경로였다.


그 선의 끝에는 공습경보가 꺼지지 않은 도시가 있었다.


제2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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