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것들

기억은 눈치가 없다

bymaggie chae

누군가 가져다준 보리차를 마셨다.
차가운 컵을 이마에 댔다가 내려놓았다.


밤새 머릿속에서 나를 심문했다.
왜 그랬어. 그것도 못 해. 앞으로는 어쩔 건데.


피고도 나였고 판사도 나였다. 판사는 잠도 없었다.


탁자 위의 서류를 치우다가 오래된 노트가 떨어졌다. 펼쳐진 페이지에 내 글씨가 있었다.

수영.
혼자 여행 가기.
아무 쓸모없는 것 만들어보기.


맨 아래에는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


못해도 끝까지 해보기.


이 문장을 오래 봤다.

언제 쓴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쓸 때의 손은 알 것 같았다. 종이가 패일만큼 볼펜을 눌렀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저렇게 힘부터 들어갔다.


다음 장에는 사람인지 감자인지 모를 그림이 있었다. 팔 길이가 달랐다. 옆에 적혀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손이 안 따라줌.


웃음이 났다.

다음 장에도 같은 얼굴이 있었다.

이번에는 귀가 너무 컸다. 그다음 장에서는 귀를 포기했다. 대신 눈썹에 힘을 줬다.

몇 장을 넘기다 웃음이 멎었다.


그림 옆에 날짜가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그렸다.

잘되지 않는 것을 이렇게 오래 붙들고 있었던 내가 낯설었다.


뒤로 갈수록 그림은 작아졌다. 여백에 할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화하기.

000 자료 보내기. 수정하기. 어느 페이지부터는 그림이 없었다.


하고 싶던 일은 구석으로 밀려나다가 결국 종이 밖으로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그린 얼굴을 찾았다.
입이 없었다.


그 위로 다른 색 볼펜이 지나가 있었다.

이럴 시간 없음.


나는 그 말을 쓸 때의 마음을 기억했다. 바빴다. 쓸모 있는 일을 먼저 하고 나면 시간이 생길 줄 알았다. 그림을 못 그려서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못 그리는 데 시간을 쓰는 나를 견디지 못했다.


노트는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밤새 떠들던 판사가 여기까지 따라와 있었다. 나는 글자 위에 줄을 그었다. 종이가 조금 파였다.


앞장을 펼쳐 입 없는 얼굴에 입을 그려줬다. 너무 크게 그려져 웃는 얼굴이 됐다.


노트를 덮으려다 다음 페이지를 펼쳐두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였지만 내일 쓸 자리를 미리 남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