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적 없는 것을 우리는 이미 지키고 있다.
"그건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신입 때 가장 자주 들은 문장이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대개 거기서 끝났다. 원래 그렇다는 말 뒤에는 아무것도 붙지 않았다.
첫 회사에서 화면 하나를 맡은 적이 있다. 명세서가 스무 장 넘게 나왔고 입력값과 예외 처리까지 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그 표대로 만들었다. 한 줄도 어기지 않았다.
검토 자리에서 선임이 모니터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마우스를 몇 번 굴리더니 짧게 말했다.
"이게 아닌데."
나는 명세서를 펼쳐 몇 쪽 몇 항목인지 손가락으로 짚었다. 선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면서도 표정은 그대로였다. "맞긴 맞아. 그런데 이건 아니야."
그 자리에서는 무엇이 아닌지 끝내 듣지 못했다. 자리로 돌아와 화면을 다시 띄워 놓고 한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글자도 규격대로였고 버튼 위치도 표에 적힌 좌표 그대로였다.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냥 앞이 캄캄했다.
그 뒤로 사흘 동안 나는 명세서를 세 번 더 읽었다. 형광펜을 색깔별로 그어 가며 읽었다. 놓친 내용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없었다. 스무 장 어디에도 답은 없었고, 답이 없다는 사실이 답이라는 것을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흘째 되던 날 알았다. 지난달 어느 회의에서 담당자가 지나가듯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이 화면은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쓴다고. 회의록에 없고 명세서에도 없는 그 한마디를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글자를 두 칸씩 키우고 버튼 사이를 벌려 놓았다. 나만 표를 보고 만들었다.
그때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경로였다. 그 사람들은 그걸 어디서 들었을까. 나는 왜 못 들었을까. 나중에야 답을 알았다. 아무 데서도 안 들었다. 그 방에 있었을 뿐이다.
억울함이 사그라들고 남은 감정은 조금 이상한 종류였다. 선임은 나를 골탕 먹인 게 아니다. 그에게 그 한마디는 '알려 줄 거리'가 아니었다. 공기 같은 것이었다. 공기를 마시는 법을 따로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흔히 이렇게 읽는다. 안 알려 주는 것은 텃세다.
실제로는 이렇다. 알려 줄 말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신입 시절에 배운 것들의 출처를 하나씩 되짚어 본 적이 있다. 결재판을 들고 갈 때 부장이 통화를 끊고 나서 삼십 초를 기다리는 것. 보고서 첫 장에 날짜를 오른쪽 위에 적는 것. 급한 건은 메일이 아니라 자리로 걸어가는 것. 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가르쳐 줬는지는 하나도 대답할 수 없었다.
수첩 뒷장에 한 번 적어 본 적이 있다. 열 줄쯤 적다가 손이 멈췄다. 배운 기억이 또렷한 것은 세 줄이었다. 나머지는 어느 날부터인가 그냥 하고 있었다.
배운 적 없는 것을 우리는 이미 지키고 있다. 신입 시절의 나는 스스로를 매뉴얼을 외운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정작 몸에 붙은 것의 절반은 매뉴얼 바깥에서 왔다. 옆자리 사람의 뒷모습을 곁눈질하다 따라 한 것들이다. 따라 하는 순간에는 따라 한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이상한 것은 그 절반이 훨씬 자주 쓰인다는 점이다. 근무 시간 규정은 일 년에 몇 번 들춰 볼까 말까다. 결재판을 언제 들고 갈지는 매주 정해야 한다. 자주 쓰는 쪽이 안 적혀 있다. 이 불균형이 신입의 하루를 그렇게 길게 만든다.
몇 년이 지나 반대편에 서 보고서야 이유를 알았다. 팀원이 만들어 온 자료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같은 말을 했다. "이건 아닌데." 그 사람이 무엇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나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종이를 다시 넘기며 답을 찾는 척했다. 실은 찾는 게 아니라 만드는 중이었다.
내 안에 답은 있었다. 다만 그것이 문장의 모양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오래 반복해서 몸에 붙은 것은 대개 그렇다. 균형 잡는 법을 물으면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일수록 한참 머뭇거린다. 그는 그것을 아는 게 아니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날 나는 결국 "느낌이 좀 다르다"는 말로 넘겼다. 지금 생각하면 그 팀원이 사흘을 헤맸을 자리다. 내가 예전에 형광펜을 그으며 앉아 있던 그 자리와 같다.
그러니까 아무도 안 가르쳐 준 게 아니라, 가르칠 수 있는 형태로 아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사무실 문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손잡이 위쪽 한 뼘쯤이 유독 닳아 있었다. 아무도 거기를 잡으라고 써 붙이지 않았는데 수백 명의 손이 같은 데를 지나갔다. 회사의 두 번째 사규도 그런 식으로 남는다. 회사의 규칙은 인쇄되지 않고 닳아서 남는다.
닳은 자리
아무도 표시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같은 데를 밟아 생긴 자국. 인쇄되지 않고 닳아서 남는 규칙.
닳은 자리는 설명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눈을 요구한다. 오래 다닌 사람은 자국이 보이니까 자연스럽게 그 위를 걷고, 새로 온 사람은 자국이 안 보이니 멀쩡한 바닥을 밟는다. 멀쩡한 바닥을 밟은 게 무슨 잘못인가. 잘못은 아니다. 다만 회사는 그것을 눈치 없음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신입 시절의 고생은 대체로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자국이 보이기까지 걸리는 시간의 문제에 가깝다. 그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흐른다. 옆자리에 말 많은 사람이 앉으면 반년이면 되고, 다들 조용한 팀에 떨어지면 삼 년도 짧다. 운이 실력처럼 보이는 구간이 여기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와 밥을 먹다가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쪽 회사에서는 보고할 때 결론을 맨 뒤에 붙인다고 했다. 앞에 붙이면 성급해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젓가락을 놓고 되물었다. 우리 쪽에서는 결론을 뒤에 두면 준비가 덜 된 사람으로 읽힌다.
둘 다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십 년 넘게 살았다. 그날 우리는 각자의 회사에서 아주 성실하게 반대 방향으로 닳아 왔다. 자국은 발밑에만 보인다. 한 걸음 옆으로 옮기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여기서 잠깐 손을 멈춰 보면 좋겠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업무 습관 중에 배운 기억이 분명한 것은 몇 개나 될까. 그리고 그중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문장으로 옮겨 준 것은 몇 개일까.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오래도록 부끄러웠다. 받은 적 없다고 억울해했던 시간은 길었는데, 건네준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은 저녁 한 끼였다.
봄에 아들이 학교 팀 과제 이야기를 꺼냈다. 자료를 다 만들어 갔는데 조원들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정해 놓았다고 했다. 언제 정했냐고 물으니 아무도 정한 적 없다고 했다고 한다. 아들은 그게 제일 이상했다고 말했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뭐라고 답해 줄지 몰라서 국을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그 저녁에 나는 스무 해 넘게 회사를 다니고도 그 말을 문장으로 갖고 있지 않았다. 몸으로는 매일 쓰면서 입으로는 못 꺼내는 것이 그렇게 많다.
자국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바카라을 쓰기 시작했다. 대단한 비법을 알아서가 아니라, 닳은 자리를 손으로 더듬어 이름이라도 붙여 보려는 마음에 가깝다. 이름이 붙으면 건넬 수 있다. 건넬 수 있으면 다음 사람은 삼 년을 덜 헤맨다.
우리가 신입 때 배운 것의 절반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렇게 전해지고 있다. 탕비실에서, 계단참에서, 야근하다 시킨 국밥 앞에서. 옮겨 적는 사람이 없어서 매번 처음부터 다시 닳는 중이다. 한 줄이라도 적어 두면 그 자리는 조금 덜 닳아도 된다.
오늘 아침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오면서, 나는 손이 늘 같은 데를 잡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몇 년째 그 자리다. 그 손자국을 누가 나에게 알려 준 적은 없다. 다만 이제는 그것이 알려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 차이가 이 바카라의 전부다.
두 번째 사규 제1조 회사에는 사규가 두 권 있다. 한 권은 서류철에, 한 권은 복도에 있다. 월급은 첫 권이 주고, 기회는 둘째 권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