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입사 첫날 받은 서류에는 진짜 규칙이 없었다

회사에는 사규가 두 권 있고, 한 권은 아무도 인쇄해 주지 않는다.

by시선

"여기 사인 하시고요, 이건 가져가서 읽어 보세요."


총무 담당자가 서류 봉투를 밀어 주었다. 사원증, 바카라상 열쇠, 자리 번호가 적힌 쪽지, 그리고 스테이플러로 묶인 종이 한 뭉치. 취업규칙, 보안 서약, 복무 지침. 봉투가 제법 두꺼워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이 안에 다 있겠구나 싶었다.


자리로 안내받아 가는 길에 열 명 남짓한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누구에게는 목례를 했고 누구에게는 허리를 굽혔는데, 그 기준을 나는 아직 몰랐다. 바카라상에는 전화기와 필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랍은 비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봉투 속 서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전공이 전공이라 매뉴얼 읽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근무 시간, 휴가 산정, 결재 단계, 보고 문서의 보존 연한까지 밑줄을 그어 가며 외우다시피 했다. 컴퓨터는 적힌 대로 돌아간다. 나는 회사도 그럴 줄 알았다.


첫 주에 실제로 배운 것들은 조금 달랐다. 복사기에 종이를 채울 때는 아래 서랍부터 쓴다. 부장 자리 앞은 통화 중이어도 목례를 하고 지나야 했다. 점심시간은 오 분 전에 일어서면 눈치를 받고, 정각에 일어서면 늦는다. 어느 것도 서류에는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그런 게 사소한 곁가지인 줄만 알았다.


반년쯤 지난 어느 날의 일이다. 사흘을 매달려 만든 자료를 아침 일찍 팀장 자리에 올려 두고 왔다. 회의는 오후였고, 나는 자료가 알아서 말을 해 줄 거라고 믿었다. 회의가 끝나고 팀장이 지나가며 물었다. "이거 언제 올려놨어?"


결정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 있었다. 하루 전날 옆 팀 선임이 팀장과 커피를 마시며 꺼내 놓은 방향이었다. 그 사람은 문서를 만들지 않았고, 나는 문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회의록에 남은 건 그 사람의 문장이었다.


그날 퇴근길 지하철에서 나는 손잡이를 잡고 서서 계속 같은 자리를 곱씹었다. 자료가 부실했나. 표가 부족했나. 다시 열어 봐도 자료는 멀쩡했다. 그러니까 더 답답했다.


억울했다. 집에 와서 봉투 속 서류를 다시 꺼내 뒤졌다. 보고서는 회의 며칠 전까지 제출하라는 조항이 있었다. 언제 말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줄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런 건 원래 안 적힌다.


누구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규정은 규정대로 정직했다. 다만 규정은 자기가 다루지 않는 영역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뿐이고, 회사의 하루는 대부분 그 다루지 않는 영역에서 굴러간다.


규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대부분을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때 처음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첫날 받은 봉투에는 서류가 한 장 모자랐다. 없어서 못 넣은 게 아니라, 애초에 인쇄된 적이 없는 한 장이다. 그 한 장에는 회의 전날의 커피 같은 것들이 적혀 있다. 누가 어떤 표정으로 "알겠습니다"라고 했는지, 그게 승낙인지 유예인지도 거기 적혀 있다.


그 뒤로 나는 그 없는 한 장을 몇 년에 걸쳐 손으로 베껴 썼다. 아무도 불러 주지 않았으니 받아쓸 수도 없었다. 넘어지고, 눈치로 줍고, 며칠 뒤에야 아 그거였구나 하고 뒤늦게 한 줄을 채웠다. 그렇게 채운 종이가 봉투 속 서류보다 얇을 리 없다.


이상한 것은 그 한 장이 회사마다 존재하는데 어느 회사도 그걸 나눠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추려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래 다닌 사람들은 그걸 이미 몸으로 알고 있어서, 그게 배워야 할 무엇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이 균형 잡는 법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 한 장은 늘 복도에서만 오간다. 탕비실에서, 담배 피우러 나간 계단참에서, 야근하다 시킨 국밥 앞에서. 운 좋게 옆에 앉은 사람이 말이 많으면 몇 줄쯤 얻어듣고, 운이 나쁘면 삼 년이 지나도 백지다.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자리의 차이인데, 결과는 능력처럼 보인다. 그 점이 오래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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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종을 두 번 옮겼다. 옮길 때마다 공식 서류는 하루면 다 읽혔고, 그 한 장은 매번 다시 맨바닥이었다. 말투가 달랐고, 결재판이 도는 길이 달랐고, 회식 자리의 규칙도 달랐다. 처음에는 그게 억울했다. 이 나이에 또 신입처럼 헤매야 하나 싶었다.


두 번째 회사의 첫 회의가 기억난다. 열 명이 앉은 방에서 누군가 짧게 한마디를 했고 모두가 웃었다. 나만 웃지 못했다. 단어는 전부 알아들었는데 왜 웃는지를 몰랐다. 경력을 인정받아 들어간 자리였고, 그날 나는 회의실에서 가장 나이 많은 신입이었다.


그런데 세 번째 회사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문장은 매번 새로 배웠는데, 목차는 늘 비슷했다. 어느 회사에나 말의 온도가 있었다. 어느 회사에나 조직도와 다른 길이 있었고, 평가가 평가 시즌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계절이 있었다. 표지만 다르고 목차는 겹치는 바카라이었던 셈이다.


목차가 같다면 옮겨 적을 수 있다. 회사마다 문장은 조금씩 고쳐 써야겠지만, 뼈대까지 새로 세울 필요는 없다. 그 생각이 이 글의 시작이다.


여기서 한 번 멈춰 보면 좋겠다. 우리가 회사에서 배운 것들을 두 칸으로 나눠 적는다면, 사규에서 배운 칸과 복도에서 배운 칸 중 어느 쪽이 더 길까. 그리고 복도 칸에 적힌 것들을 우리는 대체 누구에게 배웠을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여기서 내놓지 않으려고 한다. 각자의 칸에 적히는 것이 다를 테고, 그 다름이 이 바카라보다 정확하다.


나는 운이 나쁘지 않았다. 대신 시간이 많이 들었다. 몇 년을 헤매고서야 겨우 한 줄을 알아들은 적이 여러 번이다. 그 시간을 다시 겪지 않아도 된다면, 그 몫으로 다른 걸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늦게나마 손으로 적어 두기 시작했다.


한 가지는 미리 밝혀 두고 싶다. 이 글은 약아지라고 부추기는 바카라이 아니다. 회사를 이기는 법이나 사람을 다루는 기술 같은 걸 나는 모른다.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복도에서만 전해지던 말들을 문서로 옮겨 두려고 한다. 문서가 되면 뒤늦게 오는 사람도 첫날에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위로만 하는 바카라도 아니다. 힘들었겠다는 말로 끝나는 글은 다음 날 아침을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꼭지에는 표와 체크리스트를 붙였다. 오늘 저녁에 십오 분이면 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대단한 도구는 아니지만, 손에 쥐어지는 것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루지 않기로 한 것도 있다. 회사를 그만두는 문제는 이 안에 없다. 나가는 길에 대해서라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많고, 무엇보다 이 글의 자리는 거기가 아니다. 여기 적힌 것은 전부 다니는 동안의 규칙이다. 오늘 아침에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순서는 이렇게 잡았다. 먼저 회사의 말을 해독하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회사는 말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걸 모르면 다 듣고도 못 들은 게 된다. 다음은 문장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결국 보고서와 메일과 회의의 문장으로 평가된다. 억울하지만 사실에 가깝다.


그다음은 관계다. 사내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조직도 바깥에서 일이 실제로 흐르는 길을 본다. 그리고 평판을 다룬다. 고과와 연봉과 승진, 그리고 실수한 날의 스물네 시간. 마지막은 소유다. 회사를 다니되 회사에 살지 않는 방법, 그러니까 이 모든 규칙을 익히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다.


꼭지마다 끝에 짧은 조문을 하나씩 붙였다. 회사에는 사규가 두 권 있고, 한 권은 아무도 인쇄해 주지 않는다. 인쇄되지 않은 쪽을 대신 적어 본 것이 그 조문들이다. 스물여덟 개를 이어 읽으면 한 권이 된다. 물론 이건 내가 다닌 회사들의 사례라, 다른 회사에서는 몇 개쯤 다르게 적혀 있을 것이다. 다르게 적혔다면 고쳐 쓰면 된다. 원래 그런 바카라이다.


몇 해 전, 내 옆자리에 앉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아직도 그 사람이 사원증 줄을 목에 걸고 어색하게 서 있던 첫날의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일하는 법은 알려 주었는데, 그것 말고 정말 알려 줬어야 할 것들은 말로 옮기지 못했다. 몰라서가 아니라, 그게 말이 된다는 걸 그때는 몰라서다.


이 글은 그 사람의 바카라상 위에 올려 두려고 쓴다. 첫날의 봉투에 모자랐던 한 장을, 늦게라도 끼워 넣는 마음으로 쓴다.


당신의 첫날이 언제였든, 이 안에서 이미 알고 있던 것의 이름을 하나쯤 찾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이름 덕분에 내일 아침 회사가 조금은 덜 낯설기를.

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