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자식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요

다 큰 자식에게는 물어 온 데까지만 말한다.

by시선
아이가 집을 떠난 뒤로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보내지 못하고 쓰다 만 메시지가 휴대폰에 두세 개 남아 있습니다. 정작 만나면 걱정부터 나오고, 아이 대답은 점점 짧아집니다. 부탁한 적 없는 조언을 하고 돌아서면 후회합니다.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서 멈춰야 할까요?


아들을 서울 기숙사에 들여보내던 날이다. 우리 집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작은 삼단 바카라장을 계단으로 내려 차에 실어야 했다. 나는 아들이 아래쪽을 다 잡기도 전에 번쩍 들어 올렸다. 아들 손가락이 모서리에 쓸렸다. 아들은 아프다는 말 대신 손을 바지에 쓱 문질렀다. 층계참에 내려놓고 보니 벽에도 긴 자국이 나 있었다.


다음 층에서는 아들이 먼저 말했다. "아빠, 제가 셋 셀게요." 하나, 둘, 셋에 같이 들었다. 같은 바카라장이 아까보다 가벼웠다. 숨도 덜 찼다. 그 뒤로 내려가는 동안 벽에는 자국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올려 보낸 지 반년이 넘었고, 아들은 1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다. 그사이 할 말이 늘었다. 만나면 끼니와 잠부터 묻는다. 묻지 않은 얘기를 두세 개 더 얹고 돌아서서 후회한다. 1학기 중간쯤 올라가 기숙사 앞에서 밥을 먹을 때는 자기 전에 휴대폰을 멀리 두라는 얘기를 한참 했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걸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받았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긴 찻길에서 생각해 보니 그날 아들이 한 말은 "네" 한 마디뿐이었다. 걱정이라는 이름만 붙이면 무슨 말이든 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날 계단에서 배운 건 힘이 아니라 박자였다. 혼자 먼저 들면 무게를 혼자 받는다. 셋을 세고 들면 반씩 나눈다. 말도 그렇다. 묻지 않았는데 꺼낸 말은, 셋을 세기 전에 든 손이다. 먼저 든 손에 상대 손가락이 쓸린다. 드는 쪽은 거든다고 생각하고, 받는 쪽은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바지에 손을 문지른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할 말이 많을까. 곰곰이 따져 보면 지금 쏟아내고 싶은 말은 대개 아들이 교복을 입던 시절에 했어야 할 말이다. 그때 나는 밤늦게 들어왔다. 할 말은 주말로 밀렸고, 주말이 오면 다음 주로 넘어갔다. 그렇게 밀린 말이 이제 와서 한꺼번에 나오려는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그때는 당부였고, 지금은 간섭이 된다. 말이 달라진 게 아니다. 그사이 아들이 묻는 아이에서 대답하는 어른이 됐다.


지금도 나는 기숙사 앞에 아들을 내려 주고 차창을 내려 한마디를 더 한다. 아들은 돌아보지 않고 손만 든다. 들었다는 뜻인지 그만하라는 뜻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쯤은 아들 쪽에서 먼저 전화가 온다. 과제할 때 어떤 AI 툴을 쓰는 게 나으냐고, 겨울방학에 친구들이랑 해외여행을 가려는데 어디가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그날은 내가 길게 말해도 아들이 끝까지 듣는다. 이상하게 그날은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첫째, 말하기 전에 그 말이 아이가 물은 말인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인지 한 번 가려 보는 편이 낫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면 하루 묵힌다. 하루가 지나도 하고 싶으면 그 말을 질문 하나로 바꾼다. "요즘 몇 시에 자니" 대신 "요즘 뭐가 제일 바쁘니"로 묻는 식이다.


둘째, 만나면 처음 몇 마디는 아이 얘기를 듣는 데 쓴다. 요즘 뭐가 재미있는지, 누구랑 어울리는지처럼 아이가 신나서 대답할 만한 것부터 묻는다. 끼니와 잠은 그 뒤로 미룬다. 걱정은 질문처럼 꺼내도 걱정으로 들린다. 듣는 시간이 길어지면 아이 쪽에서 먼저 꺼내는 날이 온다.


셋째, 조언 대신 할 수 있는 일 하나를 골라 둔다. 기숙사로 택배를 하나 부치거나, 아이가 지내는 동네 날씨를 휴대폰에 추가해 두는 정도면 된다. 부친 물건은 묻지 않아도 쓰이고, 쓰이는 동안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말로 하려던 것을 손으로 하면 서로 가볍다.


나도 참은 만큼 한꺼번에 쏟아 버린 날이 있었다. 아들은 끝까지 앉아 있었지만, 그날 내 말은 조언이 아니라 통보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 못한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가 물어 올 때까지 내 쪽에 맡아 둘 뿐이다.



▷ 오늘 하나만 : 이번 통화에서는 아이가 먼저 묻기 전까지 끼니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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