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은 짧을 때 사실이 되고, 길어지면 흥정이 된다.
안 된다고 해야 하는 자리에서 알겠다고 대답해 버립니다. 돌아서면 제가 미운데, 다음에도 똑같습니다. 거절하면 사이가 틀어질 것만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단체방 알림이 올라오면 먼저 숨을 멈춥니다. 어떻게 해야 관계를 해치지 않을까요?
지인 넷이 저녁을 먹던 자리였다. 자리를 파할 무렵, 모임 총무가 나를 보며 물었다. 다음 모임에 쓸 안내 바카라자를 하나 만들어 줄 수 있겠냐고. 간단한 거니까, 라는 단서가 뒤에 붙었다. 나는 물컵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요즘 일이 몰려 있다고 했고, 그래도 분량이 적으면 해 볼 수는 있다고 했고, 일정만 미리 알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세 문장을 늘어놓고 나서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 바카라자에 새벽이 두 번 들어갔다. 다 보내고 나서 서운한 마음이 남았는데, 그 서운함을 둘 데가 없었다. 맡긴 쪽은 내가 할 수 있다고 해서 맡긴 것이고, 나는 못 한다고 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 미운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저녁 자리의 내 세 문장이었다.
같은 부탁을 받은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사진을 찍는 지인이었다. 그는 겉옷을 입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내가 못 해. 그러고는 단추를 하나 잠그며 덧붙였다. 사진은 그날 가서 찍어 줄게. 두 문장이 끝이었고, 아무도 다시 묻지 않았다. 그가 두 번째 단추를 잠갔을 때 이야기는 이미 다음 모임 날짜로 넘어가 있었다. 그가 미안하다고 하는 말은 끝내 듣지 못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 장면을 되짚었다. 내가 길게 늘어놓은 것은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조건이었다. 일이 몰려 있다는 말은 그러니 분량을 줄여 달라는 뜻으로 들렸고, 분량이 적으면 해 보겠다는 말은 이미 반쯤 받은 셈이었다. 설명이 길어지면 듣는 쪽은 그 사이에서 흥정할 틈을 찾는다. 그는 그 틈을 주지 않았다. 단추 두 개가 잠기는 동안, 그것이 거절의 길이다. 그날 내가 알겠다고 대답하기까지 늘어놓은 말은, 그가 못 한다고 끊기까지 한 말보다 몇 배나 길었을까.
그 뒤로 못 한다는 대답을 앞에 두는 연습을 한다. 잘 되지 않는다. 지금도 그 뒤에 변명을 한마디 더 붙이고, 붙이고 나면 내 하루가 또 남의 일정으로 넘어간다. 다만 요즘은 그 한마디가 입에서 나오려 할 때 겉옷의 단추를 만지게 된다. 그 저녁의 지인이 그러고 있었다.
첫째, 못 한다는 대답을 한 문장으로 줄여 두고 소리 내어 읽어 본다. 까닭은 하나까지만 붙인다. 까닭이 둘이 되면 그중 하나는 반박을 당하고, 반박을 당한 자리에서 우리는 또 알겠다고 한다. 긴지 짧은지는 눈으로 읽어서는 모르고 혀가 먼저 안다.
둘째, 그 자리에서 답하기 어려우면 답할 때를 먼저 알려 둔다. 저녁까지 생각해 보고 연락하겠다는 한마디면 충분하다. 머뭇거리는 틈을 상대가 설득에 쓰지 못하게 되고, 무엇보다 답하는 시각이 내 쪽으로 옮겨 온다.
셋째, 거절한 뒤에 사과를 덧붙이지 않는다. 대신 할 수 있는 작은 것 하나를 남겨 두는 편이 낫다. 바카라자는 못 만들지만 인쇄소는 알아봐 줄 수 있다는 정도면 된다. 사과를 길게 하면 닫은 문이 다시 열리고, 건넬 것 하나를 남기면 그 문은 닫힌 채로 사이를 잇는다.
미안한 마음에, 한 번 거절해 놓고 다음 부탁을 더 크게 받아 주는 실수가 흔하다. 그러면 거절이 아니라 할부가 된다.
짧게 거절한 사이는 끊기지 않는다. 다음에 또 부탁할 수 있는 사이로 남는다.
▷ 오늘 하나만 : 못 한다는 대답 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