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그 세 마디에는 질문이 들어 있지 않다.
밥 먹었냐, 응, 들어가라. 통화가 늘 이렇게 끝납니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꺼내면 잔소리로 번질까 봐 삼킵니다. 부재중 전화를 보고도 한참 뒤에야 다시 겁니다. 이 세 마디를 어떻게 넘길 수 있을까요?
지난봄, 부모님 집에서 저녁을 먹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그 집으로 가는 동안 여쭤볼 것을 세 가지 골라 두었는데, 밥상에서는 하나도 꺼내지 못했다. 국이 식어 가는 동안 날씨 이야기를 했고, 숟가락 소리가 멈추자 다들 텔레비전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다음에 또 오겠다고 하고 돌아섰다. 현관 불은 내가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켜져 있었고, 아버지는 문이 닫힐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보고 계셨다.
한동안은 세 마디를 넘겨 보려고 애를 썼다. 수첩에 질문을 적어 두고 전화를 걸었다. 장은 누가 보시느냐, 냉장고는 바꾸셨느냐, 그 일은 어떻게 됐느냐. 세 번째 질문에서 어머니가 먼저 웃으셨다. 뭘 그렇게 캐묻느냐고. 그날 통화는 여섯 마디까지 갔지만, 끊고 나니 취조를 마친 기분이었다. 길이는 늘었는데 남은 것이 없었다.
그 뒤로 어머니의 말을 순서대로 다시 들어 보았다. 밥 먹었냐는 말에는 대답을 기다리는 기색이 없었다. 들어가라는 말에도 끝을 내자는 뜻이 없었다. 어머니는 묻고 계신 게 아니었다. 현관에 서 계셨다. 내가 신발을 신는 동안 아버지가 하시던 그 일을, 어머니는 수화기 너머에서 하고 계셨다. 배웅이다.
자식은 할 말을 찾았고, 부모님은 목소리로 얼굴을 보려 하셨다. 그러니 질문을 늘려도 통화는 길어지지 않는다. 길어지는 것은 양쪽의 피로다. 배웅하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의 등을 본다. 등을 바라보는 자리에서는 질문이 짧아지고, 들여보내는 인사가 먼저 나온다. 들어가라는 그 짧은 인사를, 우리는 몇 번이나 그저 끊자는 말로만 들었을까?
누나와 몇 해를 데면데면하게 지낸 적이 있다. 그때 모자랐던 것은 말이 아니라 같이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부모님께는 꺼낼 거리를 늘리는 대신 전화를 거는 때를 바꿨다. 집까지 걸어 올라가는 길에 건다. 숨이 조금 차고, 대화가 끊겨도 발소리가 그 틈을 메운다. 물론 지금도 끊고 나면 묻고 싶었던 말이 뒤늦게 떠오른다.
첫째, 안부에 내 이야기 하나를 얹는다. 밥 먹었냐는 물음에 네로 끝내지 않고, 오늘 있었던 시시한 일 하나를 덧붙인다. 계단을 오르는 길에 옆집 개한테 손등을 내밀었다는 정도면 충분하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면, 이번에는 부모님이 물을 차례가 된다. 그 개가 순하더냐는 물음 하나면, 통화는 애쓰지 않아도 몇 마디 늘어난다.
둘째, 전화는 앉아서 받지 않는다. 설거지를 하면서, 또는 걸으면서 받으면 말이 끊긴 자리에 물소리와 발소리가 들어선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에는 꺼낼 거리를 고르느라 애쓰지 않게 된다. 잠시 말이 멎어도 그 사이가 어색한 정적으로 남지 않는다.
셋째, 끊기 전에 다음 통화를 한 문장으로 정해 둔다. 주말에 또 걸겠다고 말해 두면 다음 전화는 용건이 없어도 시작할 수 있다. 주기가 정해지면 한 번의 통화가 그만큼 가벼워진다. 다만 세 마디를 넘기겠다고 질문부터 늘리지는 않는다. 질문이 넷을 넘어가면 통화는 안부가 아니라 면담이 된다.
세 마디로 끝난 통화도, 배웅으로는 이미 온전하다.
▷ 오늘 하나만 : 전화를 걸어 오늘 있었던 시시한 일 하나를 먼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