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알고도 말하지 않는 연습

- 기다림과 믿음에 대하여

by진공

한 학생이 문제 하나를 붙들고 오래 골몰하고 있었다. 식을 썼다가 지우고, 다른 방법으로 시작했다가 다시 멈췄다. 교실을 오가며 들여다보니 생각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풀이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어느 부분에서 막혔는지 보였고, 어떻게 설명하면 빨리 풀 수 있을지도 알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곧바로 옆에 앉아 풀이를 시작했을 것이다. 정해진 수업 시간에 진도를 나가야 했다. 많이 설명하고 빨리 이해시키는 것이 좋은 선생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날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학생의 연필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혔다고 해서 생각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말을 시작하면 그 움직임은 잠시 멎고, 학생은 내 풀이를 따라오게 될 터였다.


기다리는 동안 여러 번 입을 열고 싶었다. 그쪽으로 가면 식이 더 복잡해질 텐데. 저 조건부터 쓰면 쉬울 텐데. 학생은 문제를 풀고 있었고, 나는 설명하고 싶은 마음을 붙들고 있었다.


그때 기다림에는 권한의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업을 멈추고 내 풀이를 제시할 수 있었다. 더 많이 안다는 이유로 상대의 생각을 중단시킬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 권한을 잠시 쓰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설명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학생이 필요한 개념을 모르거나 도움을 청하면 가르쳐야 한다. 혼자 버티게 두는 것이 언제나 배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날의 학생은 자기 힘으로 길을 찾고 있었다. 내가 들어갈 자리가 필요해서 끼어들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문제를 잘 풀어 주는 선생이고 싶었다. 복잡한 풀이를 간단하게 정리해 주면 보람이 있었다. 학생이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일 때면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마음에는 학생을 돕고 싶은 마음과 내가 잘 가르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었다. 둘은 겉으로 잘 구별되지 않았다. 설명을 많이 할수록 좋은 수업을 했다고 느꼈지만, 그동안 학생이 직접 생각할 시간은 얼마나 있었는지 묻게 되었다.


수학에서는 보조선 하나로 막혔던 관계가 보이기도 한다. 선생도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다. 다만 학생이 그어 보려는 선을 지우고 언제나 내 선부터 내밀 필요는 없었다.


나는 기다림을 받는 쪽에도 서 본 적이 있다. 병원 주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였다.


칼질이 서툴러 무 하나를 써는 데도 오래 걸렸다. 내가 맡은 일이 늦어지면 동료들이 자기 일을 하면서 내 몫까지 보태야 했다. 정해진 배식 시간은 그대로였으니 내 연습에는 다른 사람의 수고가 들어갔다.


그 시간을 지나 이제는 무를 제법 빠르고 반듯하게 썬다. 동료들이 농담처럼 ‘무 박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학위 논문은 없지만 도마 위에 연구 결과는 꾸준히 제출하고 있다.


손이 익숙해진 뒤에야 그때의 기다림을 달리 보게 되었다. 동료들은 가만히 서서 내가 끝내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늦어지는 부분을 메우며 일이 이어지게 했다. 내가 내 몫을 해낼 수 있을 때까지 자신들의 시간을 조금씩 내주었다.


지금의 속도 안에는 그 사람들의 수고가 들어 있다.


새로 온 동료의 손이 더딜 때면 이제 내 손이 먼저 나가려 한다. 내가 하면 빨리 끝낼 수 있다. 실제로 시간이 촉박하면 나누어 맡거나 도와야 한다. 안전을 놓쳐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언제나 대신해 버리면 그 사람의 손이 익숙해질 시간은 생기지 않는다. 도와야 할 만큼 돕고, 직접 해 볼 몫은 남겨 두는 일이 필요했다. 나도 그렇게 배웠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완성된 속도를 기대할 때가 있었다.


교실과 주방의 사정은 다르다. 학생의 풀이를 몇 분 더 볼 수 있는 때가 있고, 배식 시간이 닥쳐 손을 보태야 하는 때가 있다. 기다림은 무조건 개입하지 않는 규칙이 아니었다. 상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판단하는 일이었다.


그날 학생은 틀린 길로 들어섰다가 스스로 돌아왔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 지우고 다시 식을 세웠다. 마침내 내가 처음 생각한 것과 다른 방법으로 답에 도착했다. 계산은 길었지만 풀이가 성립했다.


그것은 학생의 풀이였다.


내가 몇 분 안에 설명할 수 있었던 답까지 학생은 더 오래 걸려 왔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잘못 보았는지 알아차렸고, 되돌아가 다시 시작했다. 정답만 받아 적었다면 거치지 못했을 과정이었다.


내가 하지 않은 설명이 그날 수업의 빈자리는 아니었다. 학생이 그 자리에 자기 풀이를 썼다.


답을 맞혔기 때문에만 기다림이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끝내 풀지 못했다면 함께 막힌 곳을 살펴야 했을 것이다. 그때도 학생이 이미 어디까지 생각했는지 아는 상태에서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잘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학생의 식이 길어지면 짧은 풀이를 말하고 싶고, 동료의 칼질이 느려지면 칼부터 받아 들고 싶어진다. 더 빨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개입할 이유를 쉽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먼저 살펴보려 한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인지, 내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인지.


학생의 연필 끝이 움직이고 있다. 잘못된 식을 지우고 다시 쓰고 있다. 아직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나는 답을 알고 있다.


지금은 조금 더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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