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번 생은 길고 긴 회상씬이야

나를 이륙시키는 것도 착륙시키는 것도 모두 나다.

by정안

나를 이륙시키는 것도 착륙시키는 것도 모두 나다.



모자무싸에서 추운 겨울 따끈한 술자리 장면에서, 고윤정이 사실 우린 모두 죽었고 이건 죽기 전의 회상이라고 말한다. 그 장면이 오래 남는다. 사실 나는 오래 전에 죽었고 이번 생은 길고 긴 추억이라고. 그러면 삶과 죽음은 무엇이 그리 다를까? 고통스러운 날과 기쁜 날이 다르게 애틋할까?



입찰에 업체 열일곱개가 들어왔다. 어젯밤 아홉시에 평가장을 준비하며 노트북 어댑터를 뽑았다. 파밧, 스파크가 튀고 콘센트들이 내려갔다. 당장 열두시간 뒤 심사. 억장이 무너질 뻔 하다가 그냥 어딘가 차단기가 내려갔으려니 하고 집에 갔다. 억장이 무너진들 내가 엑스맨도 아니고 염력으로 차단기를 올릴 수는 없다.오늘 일찍 가서 상황실에 연락했다. 다시 전원이 올라오는 데는 삼 분도 걸리지 않았다.



한창 심사를 진행하는데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또 모든 조명이 내려갔다. 국가적 에너지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점심시간 소등. 스위치를 찾아 조명은 올렸는데 프로젝터가 먹통이 되었다. 억장이 무너질 뻔 했으나 일찍 식사를 마치고 온 팀원들이 도와주었다. 전기 공사를 하며 어딘가 다른 방의 스위치랑 프로젝터 전기를 물려두었다고 한다. 여차저차해서 방탈출 하듯이 프로젝터 전원을 올렸다.



심사가 끝나갈 때 쯤엔 참관 온 다른 기관의 과장이 끼어들었다. 업체끼리 점수의 표준편차다 이상하다며. 하도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해서 머리가 차게 식었닼 점수 구간이 균등할거면 평가회를 왜 얄고 괜히 입찰 규칙에 최고점 최저점은 빼고 평균 내는 규칙이 있겠냐고요… 노트북을 던지고 싶었지만 침착하게 그건 지방계약법 위반이라고 말하고 인쇄를 하러 갔다.



빡치는 순간들이 많았지만 순간이 아니고 장면이라고 바라보니, 별로 빡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죽었고 이건 내가 살았던 삶의 한 장면이라고.



문득문득 9채널 연습을 하다보면 내가 여기있을지도 혹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만질 수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존재. 빛도 소리도 촉감도 말도 그냥 가능성 같다. 난 아주 오래 전에 죽었을지도 아주 오래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면 빡치는 것은 간지럽지도 않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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