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읽은 동화가 현실이 된다면?
른수야,
넌 온라인 게임생활 연차가 높아질수록 힘든게 뭐야? 회사 생활이 점점 어려울거란건 선배들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어. 그런데 회사생활이 무서워질 줄은, 그 속에 내가 나를 무서워하게 될 줄은 몰랐어. 어릴적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 기억나? 그림바카라의 벌거 벗은 임금님 그림을 보면서 깔깔 웃었던거 같은데, 며칠 전에 내가 벌거벗은 임금님과 다를바 없다는걸 깨달았어. 그 동화 속 임금님이 나라고 생각하니깐 호러물이야.
최근 1년간 나를 설명은 단어는 인플루언서야. 사실 요즘은 너도나도 다 인플루언서 시대이기도 해서 고작 1만명으로 무슨 인플루언서야 라고 생각했는데, 산 꼭대기에서나, 마라톤 주로에서나 "오! 배추님"이라면서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거나, 누군가가 나때문에 현실세계에서 '어머 배추님 아니냐고, 옷 따라샀어요'라고 말하는걸 종종 겪으면서, '와 내가 정말 설마 인플루언서?'라고 생각했어. 무엇보다 커리어 관련 에세이를 쓰기도 했고 그 글을 좋아해준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기도 했고, 좀 자부심도 있었어. 블로그, 온라인카지노, 인스타 등 다양한 플렛폼에서 글로 커리어를 쌓아왔고, 그걸로 응원과 공감의 댓글을 받았으니깐. 근데 취했나봐.
지금 회사에 취직을 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쉽게 일하고 싶다는 안일한 마음이 있음을 고백해. 30대 초반 이후 5년년 정도 영업, 마케팅을 하면서 매출을 만들어내고, 성과지표를 보고하고, 그 결과를 감내하는게 버거웠어. 캠페인 만들고 광고를 돌리면서 재밌는 나날이 더 많았지만, 어느 순간 지겨워졌고, 노력해야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고, 계속 더 큰 성장률을 요구하는 윗선의 요구에 부담과 불안함으로 일상을 가득 채우던 나날들. 회사 생활 내내 따라 다녔던 '가입자수', '유료 활성화 고객수', '리텐션,' 'ROAS' 이런 단어에서 벗어나고 싶고, 바카라임 지고 싶지도 않았어. PR 대행사로 이직하면서 그 단어들에서 벗어나서 좋더라. 대행사라서 매출이 안나와서 살벌한 표정짓는 CEO얼굴을 볼일도 없고, 영업팀장님 설득할 일도 없으니 일단 바카라임을 한다리 건너서 지는거 같더라고. 매출 압박도 없으니 숫자를 만들어내려고 발버둥 치는일도 없어 마음이 느슨해졌어. 회사에서 큰일이라고 하더라도, ‘매출 압박도 아닌데 뭐-’라는 안일한 마음도 생겼어.
근데 며칠 전,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고객사가 요청한게 있는데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고, 나와 일하는 외국인 상사랑 영어로 논의하다보니 얼렁뚱땅 ‘흠 안하는건가 보다’ 싶어서 넘어간 건이 있어.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았고, 고객사도 얼렁뚱땅 넘어갈거 같고, 무엇보다 직속 상사도 굳이 해야한다고 생각안하는거 같아서 알아서 하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어. 근데 고객사 보고를 하기 전, 디렉터가 상황을 체크하면서 그 건은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묻는거야. 외국인 상사는 한글 이메일을 못읽어서 '자기는 준비해야하는 지 몰랐다'고 말하는거야. 헉 했지만, 나는 ‘상사가 다른거랑 합치는 거로 생각해서 안했다고 말했어’ 그리고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고. 근데 퇴근 후 디렉터가 따로 전화해서 혼을 내더라고. 왜 변명 하냐고. 안 한거면 안한거지, 왜 상사탓하고 혼자 착각해놓고선 변명을 하냐고 말이야.
상사와 전화를 하면서 당황했고, 솔직히 ‘착각한걸 어쩌라는거야’라고 억울한 마음도 들었어. 상사가 전화로 계속 혼내다가 저녁에 이렇게 모진 소리해서 미안하다며 전화를 끊었는데. 잠시 씩씩거렸어. 근데 좀 생각해보니깐 상사말이 맞더라고. 비겁하고 주어진 일을 작고 안일하게 대했잖아. 프로젝트 운영자로서 다른 팀원들이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해도,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확인하는게 분명 월급의 대가인데, 그냥 얼렁뚱땅 한건 맞잖아. 정말 너무 부끄러웠어. 바쁘게 일하고 있으니깐, 이래저래 경력을 인정받기도 하고, 회사밖에서 다른 콘텐츠를 만들면서 성과도 있고, 좋은 댓글이나 이야기만 들으려고 했고, 그말에 취했나봐. 근데 누가 ‘너 벌거 벗고 있어’ 라고 말해주니깐. 부끄러운건 잠깐이고 내 모습을 보니깐 아찔하더라고. 따로 전화해서 사실을 말하고, 꾸짖어 준 상사에게 감사하고 죄송했어.
근데 이 일이 있고 나서도 새로운 사람과 프로젝트 합을 맞추는데, 내가 쓴 글을 보고 ‘이 글 별론데요?’라고 말하는거야. 알잖아. 글쟁이한테 ‘네 글 이상한데?’라는 말은 발작버튼이라는거. 나름 정성들여서 보냈고, 무엇보다 뭐 글에 대해서 자부심도 있어서. 그 피드백을 받고 '참 뭘 모르고 말하네'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어. 근데 월급이 내 스타일대로 하고 받는 돈 아니잖아. 내 역할은 파트너가 원하는 형식의 글과 스타일로 써주는거란 걸. 상대가 글에 대해서 뭘 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파트너가 이해 못하겠다면 다시 그 스타일대로 써줘야 하는게 임무잖아. 내 역할을 알고 나니 피드백도 그냥 팩트를 말한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다시 질문하고, 새로운 글을 두세번 보내면서 글이 내 맘에 드는 것을 떠나서 파트너와 맞춰가고, 원하는걸 만들어주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요즘 제일 힘들지만 동시에 제일 즐거운 프로젝트야. 무엇보다 까칠하지만 마지막에 꼭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말하는데 정말 진심으로 그게 느껴졌거든. 그리고 얼마전 따로 전화 와서 결과물이 맘에 든다며 정말 고맙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자리에서 울컥하더라.
잘 생각해보니, 입사 초반에 도와주려고 조금 오지랖 부렸다가 한 후배가 ’도와주는건 고맙지만, 사실 일이 더 꼬이고 도움이안된다’고 말한적이 있거든. 그때도 서럽고 수치스럽고, 또 그 후배가 나에게 악의의 감정이 있나 생각했어. 근데 그때 말해줘서 지금은 어느정도 R&R을 지켜가거나 동료와 공유하면서 해 나가고 있어. 상대와 발맞춰 협업하는걸 덕분에 배웠어. 한동안 후배에게 꿍해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할수 있는 용기도 닮고 싶고, 그때 그렇게 해말해줘서 정말 고맙고, 또 뭔가 조언을 받고 싶을땐 그 후배를 찾아가. 그리고 이제 보여,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냥 팩트를 말한거구나'란걸.
벌거벗은 임금님은 꼬마 아이의 팩트 폭격을 받고 그다음 어떻게 국정을 운영했을까. 그 동화의 열린 결말, 마지막 마침표 뒤에 문장을 30년이 훌쩍 지나 오늘의 내가 쓰기 시작했어. 팩트를 받아드리고 개선하고, 누군가의 말을 들을지, 그렇지 않으면서 그냥 그 아이의 말을 무시할지에 따라서 이야기는 참 달라지겠지. SNS덕으로 누구나 주인공으로 살기 쉬운 시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기 쉬운 시대. 나또한 어떤 콘텐츠를 다시 보면, 가끔은 왜 사람들이 나를 못알아봐주냐고, 나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라고 투정부리고 그에 위로하는 따뜻한 말들만 들으려고 하고,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거야. 괜찮아 잘 하고 있어 라는 사탕발림 말들만 들으려고 했더라고. 하지만 언제부턴가 커리어도 인생도 잘못돼 가고 있는건 알겠는데, 어떻게 해쳐가야할지 방법도 몰르겠는데 따끔하게 팩트를 말해주거나 혼내주는 사람이 잘 없었거든. 그리고 나도 어쩌면 그 말을 들을 준비가 안됐었던거 같고. 그래서 안일한 마음으로 선택했던 이회사에서 따끔한 팩트들이 더 감사해.
그래서 일까. 올해는 정말 기대돼, 계속 안들리던 말이 들리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갈수 있을테니깐. 이 챕터에서 른수도 잔소리 많이 해줘.
2025년 2월 팀과 함께 숫자와 매출을 만들어내던 시절이 그리워진 배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