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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비아에서 나는 DI(Development Instructor)로서 Child Aid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치봄보의 Child Aid 프로젝트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 Child Aid 1과 Child Aid 2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두 지역에는 각자 프로젝트 리더가 있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일했다. 어떤 날은 Child Aid 1 지역에서, 또 어떤 날은 Child Aid 2 지역에서 활동하는 식이었다.
그 아래에는 열두 명에서 열다섯 명 남짓의 에어리어 리더(area leader)들이 있었다. 숫자가 많다 보니 솔직히 나는 그들을 전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나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퐁고를 맡고 있던 에어리어 리더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지난 유치원 교사 워크숍에서 나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가물가물했지만,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봤다.
이퐁고에 도착하고 며칠 후, 나는 그녀와 함께 이퐁고에 하나밖에 없는 학교를 찾았다. 목적은 학생들에게 간단한 위생 교육을 실시하고, 함께 Tippy Tap을 만들어 보는 것이었다. 이퐁고 같은 시골 학교에도 학생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보통은 멀리서 걸어와 등교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묵던 숙소 옆집은 이퐁고 클리닉에서 일하는 간호사 할머니의 집이었는데, 그 집에 살던 조카와 매일 나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던 할머니의 손녀도 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퐁고 중심부에 사는 아이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문제는 더 깊숙한 곳에서 걸어오는 아이들이었다. 집에 화장실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용변을 본 뒤 손을 씻는 기본적인 위생 관념조차 생활 속에 자리 잡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날 우리는 학교를 찾아 학생들에게 위생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Tippy Tap을 함께 만들어 보기로 했다. 학교에는 얼마 전 DAPP의 도움으로 화장실이 생겼다고 했다. 하지만 화장실이 생겼다고 해서 위생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작 손을 씻을 세정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녀 화장실 앞에 Tippy Tap을 하나씩, 학생들과 함께 만들어 보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손을 씻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그것이 따로 교육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화장실에 가면 세면대(handbasin)가 있고, 비누가 있고,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온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도, 화장실을 다녀온 뒤 손을 씻는 것도 특별한 결심이 필요한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 잠비아의 시골 오지마을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곳에서는 물이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 멀리서 물을 길어 와야 했고, 당연히 아껴 써야 했다. 손 씻기에 따로 쓸 만큼 넉넉하지도 않았다. 화장실 옆에 세면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손을 씻는다는 것은 단순히 위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로만 “손을 씻어야 한다”라고 설명하는 건 쉽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생활 안으로 끌어들이느냐였다. 바로 그 지점에서 Tippy Tap 같은 장치가 의미를 가졌다. 적정기술로 만든 이것은 거창한 시설이 아니었다. 수도관을 깔 필요도 없고, 비싼 부품도 필요 없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나무와 줄, 그리고 작은 물통(water container)만 있으면 만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물을 아주 적게 쓰면서도 손을 씻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물이 귀한 시골에서는 그 단순함이 곧 장점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나무는 주변에서 어떻게 구한다고 치더라도 물통을 구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Tippy Tap을 만들어 놓아도, 물통만 훔쳐가는 일도 적지 않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그냥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 같은 것도, 이곳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자원이 되곤 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바로 비누였다. 한국에서 비누는 귀한 생필품이 아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비누조차 늘 부족했다. 물론 비누가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비누 대신 사용하는 것이 바로 재(ash)였다. 시골에서는 보통 요리를 하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잘라 와 불을 피웠다. 그러다 보니 재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손에 재를 묻혀 비비고 물로 씻어 내리면, 나름대로 손을 씻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부족한 조건 안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들 방식의 해답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만든 Tippy Tap은 아주 소박한 구조였다. Y자 모양으로 갈라진 나무 두 개를 기둥처럼 세우고, 그 위에 가로대를 하나 얹은 뒤, 줄에 물통을 매다는 방식이었다. 발로 줄과 연결된 나무를 건드리면 물통이 앞으로 기울면서 물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수도꼭지를 손으로 만질 필요도 없고, 필요한 만큼만 물이 흘러내리게 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보면 별것 아닌 장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단순한 구조 안에는 이 마을의 조건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전기가 없어도 되고, 수도가 없어도 되고, 복잡한 장비도 필요 없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고, 고장 나면 스스로 고칠 수도 있다. 그게 바로 이런 적정기술의 힘이었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땅을 파고 나무를 세우고, 줄을 묶어 물통의 높이를 맞췄다. 아이들은 처음엔 조금 어색해했지만, 금세 가까이 다가와 하나씩 손을 보탰다. 누군가는 기둥을 잡았고, 누군가는 땅을 팠고, 누군가는 줄을 당겼다. 어떤 아이는 물통이 제대로 기울어지는지 눈을 반짝이며 지켜봤고, 또 어떤 아이는 자기가 먼저 발로 눌러보겠다며 앞에 나섰다.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발로 줄이 연결된 나무를 밟았다. 그러자 물통이 앞으로 기울며 물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다들 웃었다. 설명만 들을 때보다, 자기 손으로 만들고 직접 작동시키는 순간 훨씬 더 빨리 이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손 씻기 교육이면서 동시에 작은 성공의 경험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자기 손으로 구조물을 세우고, 그 장치가 실제로 작동하는 걸 보는 일. 그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꽤 큰 흥미였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위생 교육이라는 것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조금 더 분명하게 느꼈다.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 손을 씻어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생활 속에서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사람들은 먼저 그 행동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눈앞에서 확인해야 했다.
Tippy Tap은 바로 그런 점에서 강했다.
물론 그것 하나가 마을의 위생 문제를 전부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여기서는 안 된다”를 “이렇게 하면 된다”로 바꿀 수 있었다. 물이 부족한 곳에서도 손을 씻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꼭 돈과 장비가 많은 곳에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그런 가능성을 손에 잡히는 형태로 보여주는 데에는 충분했다.
학생들과 같이 만들며 나 역시 그 점을 더 또렷하게 봤다. 가르친다기보다 함께 해보는 일. 설명한다기보다 먼저 만들어 보는 일. 결국 변화는 말보다 경험에서 더 빨리 시작된다는 것을, 그 작은 장치 하나가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느낀 것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더 잘 맞는다는 점이었다. 어른들은 대체로 말을 오래 듣는 데 지쳐 있었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 연결되지 않으면 금방 시큰둥해지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직접 만지고, 세우고, 발로 눌러보고, 물이 나오는 걸 보면 몸으로 먼저 반응했다. 어쩌면 새로운 습관은 늘 그렇게, 다음 세대의 손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Tippy Tap을 함께 만들고 난 뒤, 나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이것을 다시 만들어 볼 수 있겠느냐고. 아이들은 꼭 집에 가서 만들어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 말이 모두 그대로 실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아이들의 눈빛이 진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중에 돌아보면 Tippy Tap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커다란 우물도 아니고, 눈에 띄는 건물도 아니고, 거대한 프로젝트라고 부를 만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오래 남았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둘러서서 나무 기둥을 붙잡고, 줄을 묶고, 물통이 기울어지는 걸 보며 웃던 순간. 그 풍경은 내가 이퐁고에서 본 많은 장면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선명하다.
아마도 그 안에는, 그곳에서 내가 배워야 했던 태도가 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잠비아에 왔을 때 나는 무언가를 알려주고, 설명하고, 돕는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다. 현장에서는 내가 먼저 배워야 하는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을.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어떤 방식이 이곳 사람들에게 실제로 맞는지를 외부자의 관점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함께 지내며 먼저 몸으로 익혀야 했다.
Tippy Tap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단순한 손 씻기 장치가 아니라, 이곳의 현실에 맞춘 작은 해답이었다.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생활 속으로 스며들 수 있는 것. 적정기술이라는 말을 굳이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 장치 하나면 충분했다. 그곳 사람들이 직접 만들고, 직접 고치고, 계속 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일이었다.
그날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든 것은 물통 하나 매단 나무틀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작은 가능성 하나를 세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작은 장치를 만들던 시간은, 내가 이퐁고에서 “무엇을 가르쳤는가”보다 “무엇을 함께 배웠는가”에 더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 역시, 아주 조금씩 잠비아 시골의 삶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