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는 바람이 셌다.
2월이었다. 코트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었다.
서영은 빌딩 앞에 서서 올려다봤다. 유리가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몇 층인지 세려다가 그만뒀다.
네 번째 회사였다. 아니. 프리랜서까지 치면 다섯 번째.
아침에 R이 물었다.
"긴장돼?"
"아니."
거짓말이었다. 이제 긴장되면 졸리다는게 그 때와 다를 뿐 회사를 몇 번이나 옮겨도 긴장은 가시질 않는다.
로비에 들어갔다. 빌딩은 늘 같은 온도였다. 밖이 영하든 영상이든.
출입증을 받았다. 사진이 마음에 안 들었다. 늘 그랬다. 이직이란 늘 갑자기 당하니까.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 문이 열렸다.
복도가 길었다.
유리 칸막이 너머로 사무실이 보였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화면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전화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디서든 본 풍경이었다.
새 회사에 들어갈 때마다 같은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좀 다를까. 달라야할텐데.
인사팀과 계약서를 작성하고 자리를 안내받았다. PM 자리라고 했다.
*PM(Product Manager): 제품의 기획부터 출시까지를 관리하는 역할.
창가에서 세 번째 줄. 모니터 두 개. 서랍장 하나. 이전 사람이 쓰던 메모지가 아직 붙어 있었다. "DB 확인", "김대리 전달". 떼지 않은 건지 못 뗀 건지.
서영은 메모지를 하나씩 떼었다.
이전 사람이 왜 나갔는지는 모른다.
노트북을 열었다. 사내 시스템에 로그인했다. 메일이 없었다. 메신저 대화방이 비어 있었다. 당연했다.
점심시간이 됐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서영은 1층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샀다. 아무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출입증이 목에 걸려 있었다. 다들 어딘가에 소속된 얼굴이었다.
삼각김밥을 다 먹고 커피를 샀다. 아메리카노. 얼음 많이.
전 회사에서도 첫날 점심은 혼자였다.
그 전 회사에서도.
그 전에서도.
오후에 팀 회의가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사람이 다섯 명 있었다.
한 명이 창가 쪽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펴고 있었는데, 화면을 보는 건지 창밖을 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윤서영님?"
그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네."
"임도현입니다. 앉아요."
그게 전부였다.
악수도 없었다. 환영 인사도 없었다.
서영은 빈자리에 앉았다.
회의가 시작됐다.
일정.
이슈.
담당자 배분.
서영은 노트북을 열고 적었다. 뭘 적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적었다. 새 회사에서의 첫 회의는 늘 그랬다. 단어가 먼저 들어오고, 맥락은 나중에 온다.
"데이터 정합성 이슈 어디까지 됐어요?"
"확인 중입니다."
"언제까지?"
"이번 주 안으로요."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ㅇㅇ."
그리고 다시 화면을 봤다.
회의는 20분 만에 끝났다.
사람들이 나갔다.
서영도 나가려는데,
"서영님."
팀장이 노트북을 접으면서 말했다.
"적응은 천천히 해요. 급한 거 없으니까."
"네."
"컨디션은 괜찮아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첫날에 물어볼 건 보통 경력이나 전 온라인 게임이었다. 업무 스타일. 잘하는 것. 기대하는 것.
"네, 괜찮습니다."
"ㅇㅇ."
팀장은 일어섰다.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추지 않고 말했다.
"전 회사 어디였어요?"
"AI 스타트업이요."
"그 전은?"
"플랫폼이요. 그 전은 또 다른 스타트업이고요."
팀장이 문 앞에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많이 다녔네."
판단이 없는 말투였다. 놀람도 없었다. 동정도 없었다.
사실을 확인하는 톤.
"네."
"고생했겠다."
문이 닫혔다.
서영은 빈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한참.
저녁 일곱 시.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영도 앉아 있었다.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 조직의 리듬을 아직 몰랐다.
먼저 가도 되는 분위기인지.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
전 회사에서는 여덟 시가 기본이었다. 그 전 회사에서는 열 시도 있었다.
서영은 사내 업무 시스템을 훑고 있었다. 이름과 직급과 부서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팀장이 가방을 챙겼다.
"나 먼저 간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팀장이 나간 뒤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눈치를 주지도 않았다.
누가 수군대지도 않았다.
이상한 팀이었다.
서영은 7시 반에 노트북을 접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여의도역에서 탔다. 여의도는 늘 사람이 많았다. 일반 한번, 급행 한번을 보내고 다음 열차를 탔다.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창밖을 봤다. 어두웠다. 유리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피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간만에 괜찮은 피곤이었다.
누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누가 바카라상을 내리치지 않았다.
누가 "이게 말이 돼?"라고 하지 않았다.
조용한 하루였다.
그게 이상했다.
집에 도착했다.
R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때?"
"조용해."
"좋은 거야?"
서영은 코트를 벗으면서 생각했다.
"모르겠어."
R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은 샤워를 하고 나와서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팀장 얼굴이 떠올랐다. 창가 쪽에 앉아서 창밖을 보던.
"컨디션은 괜찮아요?"
왜 첫날에 그걸 물었을까.
서영은 눈을 감았다.
오래간만에 금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