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과 무오사화 ㅡ사초 한 줄이 불러온 피바람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8
ㅡ 연산군과 무오사화 ㅡ
(사초 한 줄이 불러온 피바람)
'사화(士禍)'는 조선시대 정치 과정에서 신하와 선비들이 왕이나 반대 정치세력에 의해 큰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조선은 특히 '성종'대에 이르러 관료지배체제가 안정되고 유교문화도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유학자와 벼슬을 원하는 선비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조정 관직까지 함께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한정된 관직을 놓고 기존 정치세력과 새롭게 중앙정계에 진출한 세력 사이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종'은 당시 중앙정계를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사림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시작했다.
사림은 성종 지원을 받으며 차츰 중앙정계에서 힘을 키웠고, 특히 삼사를 중심으로 훈구대신들의 비리와 전횡을 공격했다.
이때부터 '훈구'와 '사림' 갈등은 점점 커져갔다.
따라서 조선의 '4대 사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훈구와 사림이 어떤 세력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훈구파'는 '세조' 집권과정에서 공을 세워 공신이 되거나, 이후 중앙정계에서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한 고위관료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세력이었다.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훈구세력은 국가제도 정비와 각종 서적 편찬 등에 큰 역할을 했다. 현실적인 국가운영과 부국강병 에도 비교적 적극적이었고, 훗날 사림처럼 성리학적 명분론에만 깊이 빠져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랜 권력과 공신으로 받은 경제적 특권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일부 훈구대신들은 넓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각종 특권을 누렸으며 권력을 이용해 부를 확대했다. 성종 후기로 갈수록 사림이 끊임없이 훈구대신들 비리를 공격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반면 '사림파'는 지방에서 학문을 닦다가 중앙정계로 진출한 새로운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특히 영남에서는 '길재'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이 사림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제자 가운데 <김굉필·정여창·조위·김일손>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성리학을 정치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으며 요순시대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생각했다. 특히 세조의 왕위 찬탈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러면서도 이들은 세조가 만든 조선왕조의 관직에 나아가 녹을 받았다는 점이다. 훗날 '무오사화'가 벌어졌을 때 '연산군'도 바로 이 점을 공격했다.
세조 왕위계승을 비판하면서 어떻게 그 왕조 신하가 되어 벼슬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사림 입장에서는 왕조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정치행위를 비판하고 유교적 명분에 맞게 나라를 바로잡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성종시대까지만 놓고 보면 사림은 분명 기존권력을 비판하는 개혁세력이었다.
훈구대신들 부정부패와 권력독점 공격했고 언론기관인 삼사를 통해 왕과 대신을 끊임없이 비판했다.
그러나 사림 개혁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신분제 철폐나 백성 중심의 민주적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 목표는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도덕과 명분을 갖춘 사대부가 정치를 주도하는 슬롯였다.
따라서 훈구를 탐욕스러운 기득권 세력, 사림을 백성을 위한 정의로운 개혁세력이라고 단순하게 나누어 보는 것도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다.
사림 역시 훗날 정권을 장악한 뒤 다시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등으로 갈라져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인다.
나는 조선 후기 정치가 점차 성리학적 명분과 당파논리에 지나치게 매몰돼 간 것도 조선슬롯가 경직되는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것 하나 때문에 조선이 망하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고 단순하게 연결할 수는 없다.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어쨌든 성종 때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사헌부·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사림은 자신들이 성리학 올바른 학통을 이어받은 군자라고 생각했고, 세조 왕위찬탈에 협력하고 권력과 재산을 축적한 훈구세력을 소인배라 비판했다.
반대로 훈구세력 입장에서는 사림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들만 도덕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면서 현실정치는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사사건건 대신들과 왕을 공격한다고 여겼다.
겉으로는 도덕과 명분을 외치면서 결국 자신들도 권력을 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요즘 정치에서 서로 자기들만 정의롭다고 주장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결국 훈구와 사림 갈등은 정치적 이해관계뿐 아니라 학문과 정치관 차이까지 겹치면서 점점 타협하기 어려운 관계로 발전했다.
그리고 1498년부터 1545년까지 네 차례의 큰 사화가 일어난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다.
학창 시절 국사시험이나 각종 국가고시에 아주 잘 나오던 부분이다. 나도 학창 시절에는 네 사화 순서와 원인, 주도자와 피해자가 자꾸 헷갈렸다.
그래서 그냥 '무갑기을'이라는 사자성어 비슷한 말을 만들어 외웠다.^^
하지만 순서를 외우는 것보다 왜 이런 사화가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 네 번 가운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산군 시대에 일어났다.
첫 번째가 무오사화다.
1498년, 연산군 4년에 '김일손'을 비롯한 신진사류가 큰 화를 입었다.
그리고 무오사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사초'(史草)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초는 쉽게 말하면 실록을 만들기 위한 원자료다. 사관은 왕과 대신들의 말과 행동, 정치적 사건 등을 기록했다. 이런 사초와 시정기, 각종 관청문서 등을 모아 왕이 죽은 뒤 다음 왕 때 편찬한 최종 국가기록이 실록이다.
비유하자면 사초는 기자의 취재수첩과 원고에 가깝고, 실록은 여러 자료를 검토해 완성한 공식 역사바카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초 가운데는 춘추관에 제출해 '시정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도 있었고, 인물에 대한 평가나 민감한 내용을 따로 적어 사관이 보관했다가 실록을 편찬할 때 제출하는 '가장사초(家藏史草)'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사초를 왕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왕이 사초를 본다는 사실을 사관들이 알게 되면 누가 왕의 잘못을 솔직하게 기록하겠는가?
그래서 사초의 비밀은 철저하게 보장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다면 사관이 자기가 작성한 사초를 제출하기 전에 자기에게 불리한 내용을 지워버리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기가 쓴 기록 때문에 훗날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해 내용을 삭제하거나 고쳐 쓴 사관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관 가장 중요한 의무인 직필, 즉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원칙을 어기는 일이었다.
'김일손'은 오히려 반대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성종 때 춘추관 사관으로 있으면서 훈구대신들 여러 비행을 사초에 기록했다. 그 가운데 실록편찬을 맡게 된 '이극돈'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이극돈은 자신의 비행을 기록한 부분을 빼달라고 요구했지만 김일손은 이를 거절했다. 김일손은 자기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록을 그대로 남긴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김일손을 무조건 정의로운 직필 사관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그의 사초에는 자신이 직접 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실록편찬 과정에서도 김일손 사초에는 기록하지 않아야 할 내용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김일손 장점인 강직함과 직필정신이 어떤 면에서는 지나칠 정도의 과감함으로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사초에 김일손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 (弔義帝文)이 들어 있었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1457년 세조 때 쓴 글이었다. 내용은 중국 초나라 '의제'에 관한 이야기다.
'항우'에게 죽임을 당해 강물에 버려진 의제가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김종직이 그를 슬퍼하며 제문을 지어 바친다는 형식이었다.
문제는 이 글을 다른 의미로 읽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의제를 '단종'에, 의제를 죽인 '항우'를 '세조'에 빗대어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일을 비판한 글로 해석할 수 있었다.
김일손은 이 조의제문을 자신의 사초에 기록했다.
여기서 한 가지 정확하게 짚어야 한다.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세조실록'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성종 때 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자신이 작성한 사초에 넣은 것이다.
성종이 죽은 뒤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여러 사관의 사초를 모으는 과정에서 이 글이 드러났다.
1498년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있던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조의제문을 발견했다.
대부분 역사서 설명에서는 이극돈이 김일손 사초에 자신 비행이 기록된 것에 앙심을 품고 이 문제를 '유자광'에게 알렸다고 한다.
유자광 역시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김종직은 과거 유자광을 남이를 무고해 죽게 만든 사람이라며 좋지 않게 보았고, 함양군수로 있을 때는 유자광의 시가 적힌 현판을 철거하기도 했다. 그러니 유자광 입장에서도 김종직과 그 제자들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극돈을 단순히 부패한 악당 한 사람으로만 그리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극돈은 전례와 행정에 밝고 문장에도 능한 관료로 평가받았으며 실제 여러 관직에서 행정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무오사화에서 바카라임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김일손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고 조의제문 문제를 유자광에게 알리면서 사태가 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극돈과 김일손 갈등에는 정치적 대립과 개인적 감정이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극돈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세조 왕위 찬탈을 비판한 글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연산군에게까지 올라갔다.
연산군은 크게 분노했다.
연산군은 김일손에게 대략 이런 취지로 몰아붙였다.
"세조의 후손이 다스리는 조정에서 벼슬하고 녹을 먹으면서 어떻게 세조를 비방하는 글을 역사기록에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건은 단순한 사초문제를 넘어 김종직과 그 제자들 전체의 정치적 충성심을 묻는 사건으로 확대됐다.
흥미로운 장면도 있다.
사건이 커지면서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 전체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극돈을 비롯한 실록청 대신들조차 왕에게 반대했다. 왕이 사초를 직접 보면 후세에 누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관련 부분 일부만 뽑아 왕에게 올렸다. 이는 조선에서 사초의 독립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연산군이 자신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에 관한 내용을 알고 싶어 사초를 보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확인되는 기록만 놓고 보면 사초 사건이 이미 불거진 뒤 김일손의 사초를 요구한 흐름이 보다 분명하다.
연산군은 결국 김일손 등을 심문했고 사건 바카라임을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까지 돌렸다. 김종직은 죽은 지 여러 해가 지난 뒤였지만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베이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김일손·권오복·권경유·이목·허반 등은 사초 사건에 연루돼 죽음을 당했고, 김굉필·정여창을 비롯한 김종직 문인과 관련자들도 귀양이나 파직 등 큰 처벌을 받았다.
무오사화로 모두 52명가량이 처벌됐으며 그 가운데 사형을 받은 사람은 6명 정도였다.
훗날 갑자사화에 비하면 숙청의 규모 자체는 적었다.
하지만 조선 정치사에서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오사화는 도대체 누가 일으킨 것일까?
옛 역사서 대부분은 단순하게 훈구파 유자광과 이극돈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이용해 사림파를 공격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뒤에는 여러 갈등이 한꺼번에 얽혀 있었다.
첫째는 훈구와 사림의 정치적 세력다툼이었다.
성종 때부터 삼사를 장악해 가던 신진사림은 훈구대신들의 비리와 권력독점을 계속 공격했다.
훈구 입장에서는 자신들 정치적 기반을 위협하는 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개인적인 원한이었다.
유자광과 김종직 사이에는 오래된 악연이 있었고, 이극돈과 김일손 사이에도 사초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셋째는 연산군과 삼사 사이의 갈등이었다.
즉위 초기부터 연산군에게 삼사의 언론과 간쟁은 몹시 성가신 존재였다.
경연에 나오라고 하고, 술을 줄이라고 하고, 사냥과 향락을 삼가라고 하고, 왕의 인사와 정바카라에도 계속 문제를 제기했다.
성종은 이런 언론기능을 정치에 활용했지만 연산군은 이를 왕권에 대한 간섭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김일손의 사초사건은 연산군에게도 좋은 기회가 됐다.
연산군이 처음부터 무오사화를 치밀하게 설계해 덫을 놓았다고 단정할 근거는 부족하다.
그러나 사건이 터지자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자신에게 끊임없이 간섭하던 사림과 삼사를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나는 무오사화를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훈구와 사림 사이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치적 긴장이 쌓이고 있었다.
유자광과 김종직, 이극돈과 김일손 사이에는 개인적인 악연까지 있었다.
여기에 삼사의 간섭을 싫어하던 연산군의 왕권강화 욕구가 결합했다.
그리고 김일손의 사초에 들어 있던 조의제문이 불씨가 됐다.
마른 장작이 잔뜩 쌓여 있는 곳에 불씨 하나가 떨어진 셈이었다.
일부 훈구세력은 그 불씨를 키웠고 연산군은 그 불길을 이용했다.
그 결과 아직 중앙정계에서 뿌리를 완전히 내리지 못한 사림이 큰 타격을 입었다.
굳이 오늘날 정치에 비유한다면 반대세력 약점을 잡아 대대적으로 털어내는 '기획사정'과 비슷한 면도 있다.
하지만 지금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정치에서 밀려나거나 감옥에 가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왕정시대의 정치보복은 목숨까지 빼앗았다.
심지어 이미 죽은 사람의 무덤까지 파헤쳤다. 그것이 왕정시대 권력투쟁 무서움이었다.
무오사화 이후 당장은 훈구세력이 정치적 우위를 더욱 굳힌 듯 보였다. 그러나 사림의 뿌리까지 뽑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에서 밀려난 사림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서원과 향약 등을 통해 학문과 지역슬롯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중앙정계로 돌아왔다.
그렇게 조선 정치의 중심은 결국 훈구에서 사림으로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연산군 시대의 피바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오사화로부터 불과 6년 뒤인 1504년, 더 참혹한 '갑자사화'가 일어난다.
이번에는 무오사화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큰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이 있었다.
후대에 이른바 '금삼의 피' 이야기로 극적으로 전해진 바로 그 사건이다.
무오사화가 훈구와 사림의 정치적 충돌에 연산군의 왕권강화 욕구가 결합한 사건이었다면, 갑자사화에서는 연산군 개인의 분노와 복수심이 훨씬 더 무섭게 폭발한다.
이제 연산군은 더 이상 신하들과 권력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무오사화가 폭군으로 가는 첫 번째 큰 문이었다면 갑자사화는 그 문을 완전히 열어젖힌 사건이었다.
다음은 '연산군과 갑자사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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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갑기을!'
이제 순서 정도는 안 헷갈리겠죠?
윗글 읽고 보니 참 쉽죠?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