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인간, 이융 연산 1 ㅡ연산은 왜 폭군이 되었을까?
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사도 흐른다! 47
ㅡ 문제적 인간, 이융 연산 1 ㅡ
(연산은 왜 폭군이 되었을까?)
조선 왕조에 상상하기 힘든 돌연변이 같은 왕이 있었다.
'문제적 인간 이융', 바로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조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 전체에서도 최악의 군주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다. 약 12년 재위기간 동안 그가 벌인 일을 보면 그런 평가를 받을 만도 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연산군 시대는 나라 밖에서 보면 비교적 평온한 시대였다.
대규모 외침도 없었고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큰 전쟁도 없었다. 성종 때 완성된 국가체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물론 가뭄과 질병, 지역적 재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가의 존망을 흔들 만한 전쟁이나 대혼란은 없었다.
연산군이 왕 노릇만 제대로 했다면 성종 시대에 이어 태평성대를 이어갈 수도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 연산군은 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
연산군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 소설 단골 소재다.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연산군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 연산군에게 희생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금 시각에서 보면 연산군이라는 인물이 우리 역사를 훨씬 드라마틱하게 만들었고 수많은 문학적 상상력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세계사를 보아도 그렇다.
백성을 잘 먹이고 나라를 안정시킨 평범하고 현명한 군주보다 폭군과 문제적 군주들이 후세에 훨씬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태평성대를 이룬 왕들은 역사적으로는 위대하지만 이야기 주인공으로서는 의외로 존재감이 약하다. 세종 같은 위대한 왕조차 과거에는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극적인 인물보다 영화와 드라마 소재로 많이 활용되지 않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연산군 편에서는 우리가 영화와 드라마에서 흔히 보아온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미쳐버린 폭군'이라는 이야기에서 조금 벗어나 보려고 한다.
연산군은 도대체 왜 그렇게 폭군이 되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이라는 왕조에서 국왕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분명 왕조국가였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대권력자는 아니었다.
중국 황제도 관료들의 간쟁과 제도의 제약을 받았고 일본 천황 역시 시대에 따라 권력의 크기가 크게 달랐다. 따라서 단순하게 중국 황제는 절대권력자이고 일본 천황은 허수아비였으며 조선 국왕은 약했다고 비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 정치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국왕과 신하들의 끊임없는 긴장관계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조선 국왕은 대신들 의견을 들어야 했고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을 비롯한 언론기관 비판을 받아야 했다. 왕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대신을 죽이거나 정바카라을 밀어붙일 수만은 없었다.
신하들은 임금에게 끊임없이 잘못을 지적했고 때로는 왕명을 거부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왕은 신하들을 이용했고 신하들은 왕을 견제했다. 조선 정치는 바로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움직였다.
사실 이런 조선 정치 성격은 건국 초기부터 싹이 보였다. 조선은 고려 말 '정도전', '조준' 같은 신흥사대부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장세력이 손을 잡고 세운 나라였다.
왕은 이성계였지만 새 나라의 정치제도와 통치이념을 설계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는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왕 혼자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보다 유능한 재상이 국정을 이끌고 신하들이 왕의 잘못을 바로잡는 정치를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조선경국전'에서 "임금의 자질은 현명할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재상이 임금의 좋은 점은 따르고 잘못은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 임금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좋은 재상을 골라 그와 함께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의 '입헌군주제'와 같은 제도를 꿈꿨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도전이 왕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나라보다 재상과 관료의 역할이 강한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는 점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될 당시 태조 이성계는 이미 쉰을 훌쩍 넘긴 노장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당대 최고 무장이었지만 새로운 국가 복잡한 제도를 직접 설계하기보다 정도전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상당 부분 맡겼다. 말년에는 권력에 대한 집착도 이전보다 약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방석을 세자로 삼고 정도전에게 큰 힘을 실어준 것도 그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도전의 꿈을 한순간에 뒤집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이방원'이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을 제거하고 마침내 태종이 된 이방원은 사병을 혁파하고 왕족과 외척까지 가차 없이 제거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만들었다.
필요하다면 자신 처남들까지 죽였다. 조선 국왕 가운데 왕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왕 중 한 사람이 '태종'이었다.
그러나 아들 '세종'은 아버지와 조금 달랐다. 강력한 왕권을 물려받았지만 그것을 신하들을 찍어 누르는 데만 사용하지 않았다.
신하들과 토론하고 의견을 들었으며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꺾기도 했다. 왕권과 신권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좋은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왕이었다.
그래도 세종 시대까지는 왕권의 중심이 확실했다. 그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세종 이후였다.
세종의 큰아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어린 '단종'이 왕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김종서'와 '황보인' 같은 대신들에게 국정의 무게가 실렸다. 어린 왕을 대신해 대신들이 정치를 이끌게 되면서 신권은 커졌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수양대군'은 결국 왕권 회복을 명분 가운데 하나로 내세워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낸 뒤 자신이 세조가 되었다. 세조 역시 태종처럼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다.
하지만 세조에게는 태종과 다른 문제가 있었다. 왕이 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공신들에게 막대한 권력과 특혜를 주어야 했다. 세조 왕권은 강했지만 그 왕권을 함께 만든 공신들 힘 역시 강해졌다.
훗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을 흔히 '훈구파'라고 부른다.
세조 장남이자 훗날 '인수대비가 되는 소혜왕후 한씨' 남편 '의경세자'가 일찍 죽으면서 세조 둘째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예종 시대에는 이미 한명회와 신숙주를 비롯한 원로 공신들의 힘이 만만치 않았다.
예종도 이들을 견제하며 자신의 왕권을 세우려 했지만 불과 1년 2개월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왕위는 다시 흔들렸다.
예종에게는 어린 아들 '제안대군' 있었고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도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선택된 사람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었다.
바로 '성종'이다.
성종 즉위에는 '정희왕후' 결정이 가장 중요했고 한명회를 비롯한 원로대신들의 지지가 뒷받침되었다.
더구나 자을산군은 한명회의 사위이기도 했다.
어린 성종은 자신의 힘으로 왕이 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종을 평생 신하들에게 휘둘린 허약한 왕으로만 볼 수는 없다.
성종은 성장하면서 점차 자신의 정치를 시작했다.
훈구 대신들 힘을 견제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지방 사족을 기반으로 성리학적 명분과 도덕정치를 강조하던 새로운 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중앙정계에 등용했다.
이들을 훗날 '사림'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직'이었다.
처음에는 성종에게 사림이 꽤 쓸모 있는 존재였다. 오랫동안 권력을 누린 훈구 대신들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사림은 훈구보다 더 깐깐했다.
왕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따졌다. '사헌부'와 '사간원' 같은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왕에게 끊임없이 간쟁했다.
성종은 때로 짜증을 내면서도 상당 부분 이런 비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바로 그 모습을 어린 세자가 보고 자랐다.
훗날 연산군이 되는 '이융'이었다.
그런데 이융에게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있었다.
친어머니 '폐비 윤씨' 문제다.
윤씨는 성종의 후궁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었고 질투와 과격한 행동으로 여러 차례 문제가 되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성종 얼굴에 상처를 낸 일이었다. 그러나 폐비 윤씨 사건을 단순한 부부싸움 하나 때문에 왕비가 쫓겨났다고만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궁중에서는 이미 여러 갈등이 쌓여 있었고 윤씨의 행동을 둘러싼 여러 문제가 함께 제기되었다.
결국 윤씨는 1479년 왕비 자리에서 폐출되었다. 여기에서 끝났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482년 성종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세자의 친어머니를 죽인 것이다.
이 결정 역시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인수대비와 신하들이 성종을 몰아붙여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폐비와 사사 과정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성종 자신이 강경한 태도를 보인 측면도 있었다.
결국 성종 자신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훗날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 된다.
연산군이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지나치게 극적이다.
연산이 친어머니가 폐비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몰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어머니가 어떤 과정을 거쳐 폐위되고 결국 사약을 받아 죽었는지 그 구체적인 내막을 언제, 어느 정도까지 알았는가는 따로 살펴볼 문제다.
중요한 것은 연산이 폭군이 된 이유를 어머니 죽음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연산은 세자 시절부터 또 다른 장면을 보고 자랐다. 아버지 성종이 수많은 신하들에게 끊임없이 간쟁을 받는 모습이었다.
성종이 훈구를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인 사림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들은 왕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 따졌다.
오늘날 눈으로 보면 권력을 견제하는 건강한 장치였지만 왕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간섭받는다 느낄 수도 있었다.
어린 세자 이융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왕이 되면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겠다.'
물론 이것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연산의 말은 아니다.
하지만 훗날 연산의 행동을 보면 그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연산은 세자 시절부터 처음부터 미쳐 날뛰던 인물이 아니었다.
큰 문제없이 세자 수업을 받았고 1494년 성종이 죽자 스무 살을 앞둔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기 정치도 우리가 알고 있는 말년의 폭군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성종의 정바카라을 이어가며 비교적 무난하게 국정을 운영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하들 간쟁을 견디지 못했다.
특히 언관들이 왕의 행동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왕이 왕 노릇을 하는데 왜 신하들이 사사건건 간섭하는가.'
연산에게는 그런 불만이 점점 쌓였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 왕조 내내 왕권과 신권은 서로 충돌했다.
태종과 세조는 강한 왕권을 만들었고 세종과 성종은 신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왕권과 조화를 이루려고 했다.
그러나 연산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견제받는 왕권 자체를 참지 못했다.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비판하는 장치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의 사화가 일어난다.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수많은 신하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특히 갑자사화 이후 조정은 공포에 빠졌다. 연산은 마침내 자신을 거리낌 없이 비판할 수 있는 신하들을 거의 제거해 버렸다.
짧은 기간이지만 조선 역사에서 보기 드문 강력한 왕권을 손에 넣었다.
'그렇다면 왕권을 강화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왕조시대에 왕이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태종도 왕권을 강화했다.
세조도 왕권을 강화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태종은 강한 왕권을 국가체제 정비에 사용했고 세종에게 안정된 나라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연산은 달랐다.
신하들 견제를 없애고 손에 넣은 권력을 백성과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대신 점점 자신 욕망과 향락을 위해 사용했다.
이것이 연산의 진짜 문제였다.
왕권 강화가 목적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왕 개인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해버렸다.
사냥을 위해 백성들 집을 철거하고 전국에서 기생을 불러 모았다.
궁궐은 점점 왕 개인의 놀이터처럼 변해갔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한 사람은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몰랐다.
조정의 신하들은 입을 닫기 시작했다. 연산은 더 이상 신하들의 비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을 말릴 사람도 없었다.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권력을 막아줄 장치가 사라졌을 때 왕이 현명하다면 성군이 될 수 있지만, 왕이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그 권력은 그대로 폭정이 된다.
연산이 바로 그 길을 걸었다.
그에게는 태종처럼 강력한 정치적 기반도 없었고 세조처럼 자신과 운명을 함께한 거대한 공신세력도 없었다.
임사홍 같은 측근들은 있었지만 왕을 지탱하는 단단한 정치세력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연산은 공포로 신하들을 눌렀다.
피바람으로 절대권력을 향해 질주했다. 그러나 공포로 만든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신하들이 먼저 움직였다.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을 중심으로 군사들이 움직였다.
재위 중인 국왕을 신하들이 끌어내린 조선 최초의 성공한 반정, 바로 '중종반정'이었다.
연산은 하루아침에 왕에서 쫓겨났다. 왕비와 자식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연산의 아들들은 결국 사사되었고 연산 자신은 왕의 지위를 잃고 연산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불과 두 달 남짓 뒤 역질로 세상을 떠났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조선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왕 앞에서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모든 것이 사라졌다.
왕좌도 사라졌다.
권력도 사라졌다.
궁궐도 사라졌다.
마지막에는 교동의 유배지에서 병들어 죽었다.
인생무상.
권력무상.
연산만큼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조선 왕도 드물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보고 싶다.
'연산은 정말 처음부터 폭군으로 태어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왕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조선 정치구조 속에서 강한 왕이 되겠다는 욕망을 키웠고, 그 욕망이 어느 순간 견제를 없애려는 집착으로 변했으며, 마침내 아무도 자신을 막지 못하게 되자 권력과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는 폭군으로 변해간 것은 아닐까?
연산의 비극은 왕권을 강화하려 한 데 있지 않았다.
강해진 권력을 어디에 사용했느냐에 있었다.
백성을 위해 사용했다면 강력한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 권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 그래서 역사에는 강한 왕으로 남지 못했다.
폭군으로 남았다.
조선 제10대 왕.
문제적 인간 이융, 연산군.
그가 어떻게 조금씩 폭군의 길로 들어갔는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따라가 보자.
다음 편에서는 연산군 시대 첫 번째 피바람, '무오사화'로 들어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