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달토끼 식당'

오늘, 마음이 쉬어갑니다

by심월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곡 가운데 리스트의 ‘Consolation’이 있다. 우리말로는 ‘위로’라는 뜻이다. 마음이 힘들거나 몸이 지친 날 가끔 이 곡을 찾아 듣는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들떠 있던 마음이 가라앉고,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도 느슨해진다. 음악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는 걸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느낀다.


사람마다 위로받는 방법은 다 다를 테다.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힘을 얻고, 어떤 사람은 훌쩍 여행을 떠난다. 술 한잔이나 맛있는 음식 한 끼에서 위안을 얻는 사람도 있고, 혼자 고요히 머무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무엇이 더 좋고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위로에도 저마다의 취향이 있을 테니까.


박두순 시인은 「상처」에서 이렇게 썼다.


흔들린 만큼

시달린 만큼

높이와 깊이를 가지는 상처


생각해 보면 누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 하나쯤 품고 살아간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보여도 오래 참고 있는 마음이 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피치 못할 사정 한둘은 있다. 살아오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때로는 이유를 묻거나 설명하기보다 먼저 위로가 필요하다.


백희나 작가의 신작 그림바카라 《구멍청》을 읽었다. 이 바카라에는 보름달이 뜬 밤, 어디엔가 나타나는 달토끼 식당이 등장한다. 달토끼들은 진귀한 재료를 찾아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었을 때만 손님을 맞는다.


어느 날 토끼들은 깊은 산속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훌륭한 ‘자연산 구멍’을 발견한다. 그 구멍을 커다란 솥에 넣고 여드레 밤낮 정성껏 달여 마침내 ‘구멍청’을 완성한다.


늦은 밤, 식당을 찾아온 곰돌이. 곰돌이는 아기를 돌보는 중이다. 아기가 잠들어, 자신이 잠깐 집을 비워도 되는 이유를 길게 설명한다. 엉킨 털만 보아도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아기를 돌봤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곰돌이는 구멍청에 떡을 듬뿍 찍어 정신없이 먹는다. 한참을 그렇게 먹고 나서야 표정이 풀린다. 따뜻한 구멍차를 받아들었을 때는 서두르지 않고 후후 불어가며 천천히 마신다. 그러고는 한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을 떠올린다. 겨울잠, 야생의 포효, 벌꿀을.


곰돌이는 아기를 사랑하지 않아서 지친 게 아니다. 오히려 열심히 돌보았기 때문에 지쳐 있다. 누군가를 바카라임지고 자신의 몫을 다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을 잊고 있었던 것.


우리도 그렇지 않던가. 해야 할 일을 하느라, 누군가를 돌보느라, 맡은 바카라임을 다하느라 자신이 지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때가 있다. 조금 힘들어도 “이 정도쯤이야” 하고 지나가고, 쉬고 싶어도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자신을 다그친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가도 다른 사람이 더 힘들 거라며 마음을 접기도 한다.


자기돌봄에서 중요한 건 무엇을 먹고, 어디를 여행하고,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내가 지금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일지 모른다. 몸이 자꾸 무겁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날 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유난히 그리울 때가 있다. 어쩌면 그런 순간이 마음이 보내는 작은 신호일 테다.


‘나도 좀 돌봐줘.’


그 신호를 외면하면 지쳤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살아가게 된다.


곰돌이에게 달토끼 식당이 있었듯 우리에게도 그런 곳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일 수도 있고, 마음 편히 앉아 있을 수 있는 단골 카페의 창가 자리일 수도 있다. 자주 걷는 산바카라길이나 오래 바라보는 나무 한 그루, 따뜻한 국 한 그릇이나 좋아하는 음악 한 곡일 수도 있다.


그곳에 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곰돌이가 구멍청을 먹었다고 돌봐야 할 아기가 사라지는 것도, 삶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듯이.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곰돌이의 표정은 전과 다르다. 한 뼘쯤 더 커진 것 같다. 아마 위로란 이런 것이 아닐까. 삶의 문제를 없애주는 게 아니라, 다시 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친 마음을 잠시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


나는 언제 위로가 필요할까. 그때 무엇이 나를 위로해 주는가. 그 대답을 이는 것도 나를 돌보는 한 가지 방법일 테다.


[작은 명상]


잠시 눈을 감고 요즘의 나를 살펴본다.

몸과 마음이 가장 지쳤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때 나는 무엇을 필요로 했을까.

한 사람의 따뜻한 말이었을까.

잠깐의 쉼이었을까.

맛있는 음식 한 끼였을까.

혼자 걷는 시간이었을까.

오늘 나에게 필요한

나만의 ‘달토끼 식당’을 하나 떠올려본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