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선- 흰 코끼리
창고에서 꺼낸 상자는 아직 열려 있었다. 그는 바닥에 앉아 상자 속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마른 물감의 냄새와 색연필 가루가 손끝에 묻어났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둔 것은 없었다. 다만, 오래전의 시간이 이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마른 물감과 짧아진 색연필 사이에 낡은 그림바카라 한 권이 끼어 있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래있었고 그는 바카라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펼쳤다.
그 바카라에는 이불 위에 실수한 오줌 얼룩이 코끼리처럼 보였다는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바카라의 주인공은 그 얼룩 위에 붓으로 눈을 그리고, 코를 그리고, 입과 다리와 꼬리를 그려 넣었다. 실수였던 자리에 형상을 더해주자, 그것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그는 어린시절 그 바카라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던것을 다시금 기억해냈다.
마지막 장을 넘기려 했을 때, 종이 끝은 찢겨있었다. 그 코끼리가 세탁기로 들어갔는지, 다시 돌아왔는지 알 수는 없었다.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끝내 결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그 빈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카라 속의 어린 아이는 그 얼룩을 그냥 지워버리지 않고, 거기에 눈을 그려주었다.
그 사실이 그 사람에게는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위안이 되었다. 그는 상자에서 연필 하나를 꺼냈다. 바닥에 놓인 종이를 바라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무언가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우고 싶었던 것들,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 어쩌면 부끄러웠던 자리들. 그는 그것을 밀어내지 않았다.
종이 위에 선 하나를 그었다. 장난처럼 가볍게,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그 선은 생각보다 또렷했다. 그 위에 형상이 얹히기 시작하자, 이상하게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단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이 작은 움직임이 무시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그는 그 형상을 완성하려 애쓰지 않았다. 다만 선의 교차를 존재하도록 두었다. 지워버릴 수도 있었던 자리에, 이번에는 눈을 하나 더 그려 넣었다. 숨을 고르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흰코끼리는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거대한 몸집으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존재처럼. 그는 처음으로 느꼈다. 무엇을 바카라임진다는 것은 결말을 장담하는 일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도록 한 번 더 선을 긋는 일이라는 것을. 공허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위에 얹힌 벅차오름이 이번에는 더 또렷했다. 그는 종이 위의 형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온라인카지노북은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마음의 창에서 꺼내온 감각을 적어 내려간 기록입니다.
‘그 사람’을 따라가며 자신의 감각이 머무는 지점을 천천히 느껴보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