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쳐 선 시간

2장. 선-잡상

by바다별다락방


몸의 감각은 기억을 불러온다. 오래된 향기가, 맛이, 촉감이 과거와의 통로를 잇는다. 연필을 쥐고 있던 오래전의 감각이 문득 스쳤다. 무엇을 그렸었는지, 무엇을 위해 그리도 애썼는지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종이 위에 선을 긋던 손의 압력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오래전에 치워 두었던 상자가 아직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천천히 창고 문을 열었다. 먼지가 얇게 내려앉은 상자들이 겹쳐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마른 물감, 굳은 붓, 짧아진 색연필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손에 쥐는 순간, 묘하게 공기가 달라졌다. 지금의 자신과 오래전의 자신이 한 자리에 겹쳐 선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아이는 처음 그림을 접했던 때와는 달리 언젠가부터 세상의 시선을 쫓았으며, 스스로에게 쉽게 만족하지 못했다. 그 기억이 스치자 가슴 한쪽이 조여왔다. 이루지 못한 것들, 멈춰버린 시간들에 대한 실망이 옅게 번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느낌을 밀어내지 않았다. 상자 위에 손을 얹은 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기억을 바라보았다.


높은 지붕 끝에 서 있는 형상처럼, 그는 자신의 과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삼켜지지 않는 거리. 압박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아이가 그만큼 애썼다는 사실, 여전히 그림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용한 안도감을 남겼다.


창고의 어둠은 무겁지 않았다.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잡상들은 과거로부터 와 그를 내려다보듯 소리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제는 자신의 오래된 시간까지 품고 있었다.




이 온라인카지노북은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마음의 창에서 꺼내온 감각을 적어 내려간 기록입니다.

‘그 사람’을 따라가며 자신의 감각이 머무는 지점을 천천히 느껴보셔도 좋겠습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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