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식물
십일월이다. 구절초가 만개하던 음력 구월 구일이 지나고 어느새 만추에 접어들었다. 새벽 6시 30분. 해뜨기 전이라 창밖이 어스름하다. 외투를 걸치고 집에서 나왔다. 나뭇잎을 주워야 하기 때문이다. 길 위에 구르는 낙엽 보며 가을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 아침에 나가보면 쌓여있던 낙엽이 금세 사라져 버리고 없다. 부지런한 경비 아저씨들은 ‘부앙’ 하는 엔진 소리를 내며 어깨에 둘러맨 송풍기로 거침없이 낙엽을 쓸어버린다. 소음으로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피곤함이 밀려오고 잠시 후 긴 싸리 빗자루 소리가 들린다. 그쯤이 되면 청소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렇게 다 쓸어버리기 전에 온전한 낙엽을 주워야 한다.
이슬이 내린 가을 아침, 마른 잎에 묻은 물기 때문에 낙엽 냄새가 차가운 공기에 섞여 코에 닿는다. 일 년 만인 진한 가을 향기가 반가워 미소가 저절로 생긴다. 산바카라인 듯 일하는 듯 걸으며 진하게 물든 가을 잎을 주워 봉투에 담았다. 원예치료 프로그램에 어르신의 손에서 피어날 붉은색, 노란색, 주황색의 잎을 생각하며 작고 온전한 것들을 골랐다. 낙엽을 손으로 만져야 하므로 깨끗한 것을 주워야 한다. 특히 요즘 아파트에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이 많아 배설물이 묻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신경이 쓰였다. 한 번도 밟힌 흔적 없는 나뭇잎을 줍다가 안 되겠다 싶어 손에 닿는 나뭇가지를 흔들어 떨어뜨렸다.
원예치료의 효과 중 창조적 파괴가 있다. 창조적 파괴는 새로운 기술과 혁신적 아이디어가 기존 산업을 파괴하고 새로운 사업을 창조하는 경제학 용어이다. 살아있는 꽃들을 눌러 압화로 만드는 일이나 생화를 잘라 꽃 장식을 하는 것들이 그런 예이다. 새벽바람에 자고 있던 나뭇잎을 흔들며 생각했다. 미리 떨어지지만 쓸려가지 않고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해 어르신들의 마음을 물들일 것이라고. 미안한 마음을 낙엽과 같이 봉투에 담았다.
주간보호 센터에 도착하여 어르신께 봉투를 보여주며 가을을 가지고 왔다고 색색의 나뭇잎을 나눠드렸다. 낙엽을 만져보며 한결 같이 냄새를 맡으셨다. 아마 새벽에 내가 맡은 그 냄새를 찾고 있는 듯했다. 어린 시절 낙엽 줍던 이야기, 창호지에 붙이고 풀 바르던 이야기도 나누셨다. 일회용 접시의 가운데를 둥글게 뚫어 투명한 손코팅지를 붙였다. 코팅지의 끈적끈적한 부분에 낙엽을 이리저리 모양을 내며 붙였다. 잎의 모양과 크기가 다른 것을 붙여야 리듬감 더 있다. 미리 만들어 가져간 완성작을 보여주며 다양한 모습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회용 접시에 알록달록한 잎들을 붙이시며 콧노래를 부르셨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코스모스’ 노래이다. 낙엽을 만지는 동안 젊은 날 어디선가 맡았던 낙엽 냄새와 가을 어느 날 불렀던 노래가 가슴을 통과해 나온다. 새순에서 시작하여 찬란한 빛을 받아 온 잎이 낙엽이 되어 어르신 손에서 마지막 위로를 하고 있다. 나무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잎을 떨군다. 물기를 줄이며 변해가는 색을 보며 우리는 얼마나 즐거웠는지. 노란색, 빨간색, 갈색 같은 붉은색을 보이며 추워하는 우리를 따뜻하게 도와준다. 끝까지 주는 가을 나무를 보며 자연의 섭리에 고개 숙인다.
완성된 작품과 함께 어르신 사진을 찍어드리려 하는데 카메라를 보며 윙크를 하셨다. 어르신의 능숙한 애교에 요양보호사 선생님도 놀라 한 번만 더 보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어르신의 윙크도 놀라웠지만 지루한 표정의 요양보호사의 화들짝 놀라 즐거워하는 모습도 새로웠다. 낙엽이 모인 작은 접시가 우리 모두를 좋은 시절로 돌아가게 했다. 가을을 느끼고 집중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었다.
최근 들어 구월은 여름 같은 가을이고 시월은 겨울 같은 가을이 되어 가을을 즐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해 가을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기에 너무 짧은 가을을 줄여서 '갈'이라고도 한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어르신에게 ‘가을’이 '갈'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며 수업을 마무리하였다.
시월에서 십일월로 넘어가는 이번 주는 나무들의 마지막 축제 기간이다. 식물들이 우리를 위로해 주고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서두르는 모습을 놓치지 말자. 한 해 동안의 모습을 기억하고 마음껏 떠나보내는 시간을 가지자. 그렇게 하여 마지막까지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나뭇잎을 닮아 우리도, 어르신들도 품위 있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