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희한한 물건을 판다는 소문을 들었다. 일명 ‘며느리 명절 꾀병 깁스’다. 에이 설마, 그런 게 어딨어, 그냥 하는 소리겠지. 궁금해서 못 견딘 나는 바로 검색했다. 와, 진짜 있구나. 가짜 깁스를 사는 사람이 있구나. 깁스하고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가 일을 덜 시키지 않을까, 다쳤다고 하면 눈치 주지는 않을 거 같아 주부들이 많이 산다고 했다. 속으로는 나도 주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 소리야, 깁스 사겠다고? 남편의 대답이 상상된다. 나도 그 정도로 몸을 아끼고 싶지 않다. 막내며느리 좋아하는 콩 송편도 챙겨주시고 힘들면 쉬라고 하는데 그럴 수 있나 싶었다. 막상 처가에 가는데 남편이 가짜 깁스를 사겠다면 며칠을 바가지 긁지 않았을까. 연휴야 금세 가고 일 년에 두 번뿐인 명절인데 뭐 어렵겠나 싶었다. 그릇이 미끈거려서 설거지를 다시 했다는 말씀만 안 하면 되었다.
아파트 출입구에 한가위 현수막이 걸리고, 마트에 한복 입은 직원이 선물 세트를 판다. 동네 엄마들은 하나둘 언제 시댁에 가냐고 묻는다. 식탁 위 달력은 일정으로 빽빽해져 간다.
추석 한 달 전
큼직큼직 한 일거리를 해 치워야 한다.
양가 부모님 선물 알아보기, 차례 때 입을 남편 양복 손질하기, 미용실에 다녀오기.
자잘하게 신경 써야 할 게 남아있다.
은행 가서 현금 뽑기, 냉장고에 기한이 임박한 재료 먼저 쓰기, 화분에 물 주기, 혹시 모를 상비약과 화장품 파우치에 빠진 것 채워두기. 보조배터리 충전해 놓기.
여권만 빠졌지 해외여행 가는 수준이다.
할 일은 줄어드는데 나는 왜 쇠붙이를 든 것처럼 마음이 무거울까? 아파트 자모 모임에 나가 시댁과 남편 이야기로 실컷 웃다 왔는데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두통과 소화불량이 며칠째 계속되었다. 며느리 8년 차도 적응이 쉽지 않은 걸까. 앉아 있으면 불편하고, 서성거리면 불안했다.
추석 3일 전.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연휴가 다가와서 그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제안을 하나 했다.
“연휴 때 치킨집 갈래?”
“갑자기?”
나는 무슨 꿍꿍이로 그러는지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그 ‘극한 직업’인가, 영화 있잖아”
남편은 말을 이어갔다. 시댁에 가려면 길이 막힐 것이고 가는 길에 치킨집에 들르면 아이들도 당신도 덜 피곤하지 않겠냐고. 나는 그제야 눈치챘다. 치킨을 좋아하는 나와 아이들의 취향을 제대로 꿰뚫은 남편의 속셈이었다. 그럼 그렇지.
아이들이 아빠의 계획에 덩달아 들떴다.
갈비인가, 통닭인가.
남편은 틈을 놓치지 않고 분위기를 띄웠다. 나는 이미 수원 왕갈비 통닭집을 검색하고 있었다.
남편의 시나리오는 완벽에 가까웠다. 며느리 모드로 예민해진 날 위해, 불평불만을 들을 뻔한 자신을 위해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렇구나.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지턱이었다. 미리 ‘덜컹’ 한번 해 놓아야 과속을 막고 순탄하게 제 갈길을 가기에, 감정의 액셀을 밟기 전에 한번 쉬어가자는 의도였다.
차가 밀렸다. 휴가 떠나는 기분으로 노래하고 끝말잇기 게임도 하고 잠깐 눈을 붙이는 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육교 근처에 주차한 뒤 우리는 한눈에 봐도 손님이 꽉 찬 3층짜리 치킨집에 들어갔다. 양념과 프라이드치킨을 골고루 푸짐하게 즐겼다. 문득. 깁스한 채 닭다리를 뜯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 출발했다. 아이들은 잠들었고 긴장이 풀린 나는 조수석에 앉아 드라이브하는 기분이다. 부자연스럽고 민망했을 깁스 대신 모두가 좋아하는 치킨을 먹고 나니, 눈 깜짝할 새 시댁에 도착했다.
며느리로 산 지 십 년째
또 추석이 돌아왔다. 역시나 수원 왕갈비 통닭집 코스로 연휴를 시작했다. 지난해 그 맛, 그 감정이 입안에 버무려지는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웠다. 고속도로 같은 우리의 일상에서 한 번쯤 속도를 줄였더니 고부간에도 과속이 없었던 것 아닐까.
추석이다. 그동안 잊고 지냈으니 이번 추석은 어떤 방지턱이 있느냐고 남편에게 물어봐야겠다.
추석 연휴를 맞아 번외로 연재하는 글입니다.
[100일의 보통의 날들]의 연재를 끝낸 줄 알았는데
오늘에야 매듭을 짓습니다. 응원의 마음 보내주신 작가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가을다워지는 맑은 아침입니다.
마음 풍성하고 건강하시고 행복한 명절 보내세요♡
#방지턱 #명절 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