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라도 여유

이유 있는 허세

by달난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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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계단처럼 한 학년씩 오르는 레벨업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어느 한 젊은시점에는 다음 칸으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이 중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살아갈수록 인생은 높이 오르는 사람보다 스펙트럼을 넓히는 사람이 더 멋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외향성과 내향성을 고루 품고, 계획적인 면과 즉흥적인 면도 두루 거느릴 수 있는 사람.

언제나 씩씩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마음껏 무너질 줄도 알고, 혼자서 잘 지내면서도 누군가에게 기꺼이 기대는 사람.

어느 한쪽의 성질만 골라내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반된 것들을 자기 안에 함께 데리고 살아가는 일이 성숙한 인간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요즘 나는 자주 행복하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아직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궁리한다. 문득문득 찰나의 삶이 꽤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행복함을 느낄수록 노란 해바라기 가운데 검은 그림자처럼, 그 행복 한가운데에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이 함께 섞여 있다.


오늘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하루를 제대로 살지 않은 것 같고,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는 날에는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게 불면의 밤을 견디다 못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실패를 끌어오고, 내가 나에게 가장 아파할 말을 골라 스스로에게 건넨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나를 꽤 성실하게 괴롭힌다.


아마도 내게 여유란 단순히 시간이 남는 상태가 아닌가 보다. 나이를 먹는다고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도 아닌 거 같다.

여유는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믿는 힘에서 나온다.

잠시 멈춰 있어도 나는 사라지지 않고, 오늘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어도 내가 쌓아온 것들이 아무 의미 없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어쩌면 넓은 스펙트럼의 사람이 그토록 부러운 건 여유롭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게는 그 믿음도, 여유도 충분하지가 않다.


여유인 척 허세라도 부리고 싶다.


잘될 거라고 큰소리쳐보고 싶다. 남들보다 더디게 가도 결국에는 내 자리를 만나게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니, 사실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고, 그래도 나는 오롯이 나로 잘 살았다고.


대단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아.. (사실은 괜찮지 않아.)


그저 나라도 괜찮다고 그렇게 허세라도 부려보고 싶다.

나는 여전히 앞보단 위를 쳐다보고, 다리에 피가 나도록 계단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철부지라 이토록 괴로운가.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