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의 흥미진진 이야기들

라시드 앗 딘이 짓고 김호동 옮기고 엮은 <몽골제국 연대기>

byJino

라시드 앗 딘의 <집사>를 처음 읽은 날로부터 벌써 40년이 흘렀다.
이 바카라은 여전히 나를 몽골제국의 역사로 끌고 간다


역자이자 저자 김호동 교수는 1371년 필사된 <집사>의 페르시아어 사본을 중심으로 러시아 교감본, 러시아 번역본, 영어 번역본을 교차 검토해 이 바카라을 집필했다.


라시드 앗 딘 일가는 1256년 시아파 ‘암살자단’의 근거지 알라무트 성채가 포위됐을 때 몽골군에 투항했다. 라시드 앗 딘은 가업으로 익혔던 의약 지식을 바탕으로 일 한국 아바카 칸 시대부터 일을 해오다 가잔 칸 시대에 재상으로 등용되었다. 그는 가잔 칸의 지시로 <몽골제국사>를 편찬했다. 라시드 앗 딘은 제1부 <가잔 축복사>, 제2부 <세계 민족지>, 제3부 <세계 경역지>로 구성된 <집사>를 완성했지만 지리서 성격의 <세계 경역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호동 교수는 20년에 걸쳐 몽골제국의 역사를 담은 <가잔 축복사>를 <집사>라는 다섯 권의 바카라으로 번역했고 이 바카라은 <집사>를 한 권의 바카라으로 읽기 쉽게 내놓은 것이다.


몽골의 고유 명사와 표현이 가득한 바카라은 처음에 적응이 좀 어려웠지만 읽다 보면 몽골의 단어, 표현만이 줄 수 있는 고유의 느낌들이 살아있어 오히려 좋았다. 바카라은 칭기스 칸( 최근에는 징기즈 칸으로 표기되지만 여기서는 바카라의 명칭을 그대로 옮긴다)의 조상 이야기부터 시작돼 제국의 태동과 세계제국의 탄생, 쿠빌라이 카안의 시대로 나뉘어 서술된다. 몽골이라는 인구 100만이 안되던 울루스(나라 혹은 부족)가 다른 울루스인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메르키트, 오이라트 등을 차례로 복속시키고 금나라를 정복하더니 그 기세로 서아시아, 유럽에 진출하기까지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다른 나라 이야기에서보다 눈에 띄는 건 몰살 개념. 몽골군은 그렇게 적을 몰살을 시켜 바카라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가슴이 서늘했다. 언젠가 이슬람 역사를 읽다가 후계자 때문에 가족을 죽이는 이야기들에 질려 바카라을 덮기도 했는데 (오스만 제국은 술탄 형제살해법도 있었다 ㅠㅠ) 이 바카라은 참고 적응하면서 읽었다. 오죽하면 칭기스 칸 시대 세계 인구의 11%가 줄어들었단 말이 나왔겠는가. 그런 몽골제국이 또 실크로드의 안전과 질서를 담보하며 팍스 몽골리카를 열었다는 아이러니!


이 바카라의 강점은 현대 역사서로 접하면 알 수 없을 옛날의 몽골로 우리를 데려가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몽골제국의 역사와 더불어 그 속에 담긴 몽골인들의 정서, 문화, 풍경을 자연스럽게 느끼면서 역사적 내용도 함께 알 수 있다. 대제국을 다스리면서도 쿠릴타이(대회의)를 열어 대소사를 의논하고 -중요한 사람이 도착하지 않아 쿠릴타이를 못 여는 대목도 종종 나온다-그렇게 많은 사람을 가차 없이 죽이면서 손자 무에투켄의 죽음을 차마 아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칭기스 칸의 모습,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또 필요에 따라 상대를 이용하는 장면들이 있다.


용감한 말과 기병으로만 알고 있던 몽골군은 한편으로 전술의 천재였고 정보가 발달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한 술탄은 한밤중에 말을 달려 도망쳤는데 불과 한 시간 거리까지 따라잡는 통에 하루에 220 킬로미터를 달리면서 도망친 일화가 있다. 1206년 호랑이해와 같은 연도 표기, 태양이 창 하나 정도 높이에 떠올랐을 때 같은 시간 표기, 눈보라를 부르는 마술 자다의 존재, ‘나는 결심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애정은 세습된다’ 같은 초원 생활의 쓸쓸함과 끈끈함을 보여주는 속담 등은 이 바카라에서만 만날 수 있는 13세기 몽골로의 찐여행이다.


5권의 집사 시리즈를 읽고 나면 나도 몇 년은 몽골 제국 역사에 빠져들게 되지 않을까.


바카라 내용 중에서 인상적인 부분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미지는 자료를 찾거나 AI로 만들었다. 다만 이 바카라은 원 저자가 13세기에 집필한 것으로 보편적으로 알려진 역사와 다른 부분들이 있고 명칭 표기도 조금 차이가 있다.





몽골 칭기스 칸 조상의 계보를 따라가 보면 모든 몽골 종족은 아무르 강 상류 에르구네에 있던 네쿠즈와 키얀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부르테 치나라는 수령의 첫째 부인은 코아이 마랄이고 자식들 가운데 바타치칸이 있었다. 바타치칸의 아들 타마치가 후계자가 되었고 또 타마치의 아들 카이주 메르켄이 뒤를 이었다.

카이주 메르겐 아들 쿠잠 보코룰이 후계자가 되었고 아들 예케 니둔이, 예테 니둔 아들 셈 사우치가 뒤를 이었다. 셈 사우치 아들 칼리 카추에게서 도분 바얀이 태어났다.


도분 바얀은 코룰라스족 출신의 알란 코아라는 부인을 얻었고 둘 사이에서 벨구누트와 부구누트라는 아들이 태어났지만 안타깝게도 도분 바얀이 아들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다.

칭기스 칸 계보. AI 작성

그런데 알란 코아는 과부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게 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집 안에서 잠이 든 어느 날 천막 틈새로 한 줄기 빛이 들어와 그녀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출산할 때가 다가오자 남편의 형제와 친족들은 남편도 없는 부인이 임신을 한 연유를 따져 물으며 비난했다.


하지만 알란 코아는 자신이 매일 밤 꿈을 꾸었으며 그 꿈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한 빛이 아이들을 잉태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알란 코아는 자신의 배 속에 있는 아이들은 특별하며 그들이 장성해서 모두를 지배하는 군주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알란 코아와 세 아들

알란 코아에게서 카타킨족의 조상 부쿤 카타키, 카타킨족이 그의 후손이다. 살지우트족의 조상 부스킨 살지로, 수많은 종족의 조상이자 칭기스 칸의 조상 보돈차르 무카그가 탄생한다. 몽골에서는 이 세 아들의 일족을 알란 코아의 '순결한 허리'에서 나왔다고 해 '하늘의 빛'이라는 뜻의 니르운 집단으로 불렀고 그 외 종족은 두릴리킨으로 불렀다. 알란 코아와 도분 바얀의 두 아들도 두릴리킨에 속한다.


칭기스 칸의 증조부는 카불 칸이다. 카불 칸은 용맹함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그와 관련한 많은 일화가 있다. 언젠가 중국(바카라에서는 키타이라고 지칭한다)의 알탄 칸(황제-금나라 희종 추정)이 사신을 보내 그를 초청했다.

알탄 칸은 진수성찬을 대접했으나 몽골인들 사이에 키타이 사람들은 음식에 독을 타는 계략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를 우려한 카불 칸은 음식을 먹는 중에도 휴식을 취한다며 밖으로 나와 오랜 시간 잠수하면서 먹은 거을 토해낸 뒤 다시 음식을 먹곤 했다. 카불 칸은 수영 실력이 뛰어났으며 물에서 양 한 마리를 먹어치울 시간만큼 오랫동안 잠수가 가능했다고 한다.


카불 칸은 한 번은 술에 취해 알탄 칸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신하들이 카불 칸의 무엄함에 놀라 그를 없애려고 했으나 알탄 칸은 예우를 갖추어 돌려보냈다. 하지만 돌려보낸 뒤 신하들의 말을 듣고는 카불 칸을 데려오라고 했다. 사신이 와서 카불 칸을 데려가기로 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카불 칸은 일단 그들을 피했다.


사신들이 돌아가던 도중에 카불 칸을 발견해 붙잡았고 키타이 사신과 카불 칸이 살지우타이의 집에 머물렀는데 카불은 그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말을 얻어 도망쳤다. 사신들이 카불 칸을 쫓아왔지만 오히려 습격을 받아 몰살당했고 카불은 위기를 모면했다.

카불 칸과 금나라 희종. AI 작성

칭기스 칸의 아버지 이수게이 바하두르는 용맹한 군주였다. 가장 큰 부인은 우엘룬 푸진 이며 이 부인에게서 중요한 네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큰 아들이 테무진, 둘째 아들이 주치 카사르, 셋째 아들은 카치운, 넷째 아들은 테무게 옷치긴, 다섯째 아들은 벨구테이 노얀이다.


칭기스 칸의 아버지 이수게이 바하두르는 타타르와 자주 전쟁을 해야 했다. 1155년 그가 타타르 원정에 나섰을 때 임신 중이던 부인은 이수게이가 타타르 군주 테무진 우게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칭기스 칸이 태어났다. 이수게이는 적장 테무진 우게에게 거둔 승리를 상서로운 징표로 여겨 아들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칭기스 칸이 열 세살이 될 때까지 이수게이는 여러 몽골 부족을 통치했다. 하지만 이수게이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칭기스칸 가족들은 큰 곤경에 빠지게 된다.


카불 칸의 손자인 타르쿠타이 키릴툭과 그의 사촌 이수게이의 친족이자 사촌 무리였던 타이치우트파가 강력해지면서 칭기스 칸은 몇 차례 붙잡히기도 했고 41세가 될 때까지 28년간 고난을 겪었다. 칭기스 칸은 타이치우트의 포로가 되어 형틀을 쓰고 감시받는 처지가 되기도 했었다. 그 당시에는 포로를 곧바로 처형하는 관습이 없었기에 칭기스 칸은 형틀을 쓴 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한 노파가 칭기스 칸을 측은하게 여겨 머리도 빗겨주고 상처에 헝겊을 대주기도 했다. 하루는 칭기스 칸이 형틀을 찬 채 도망쳤다. 그는 마침 근처에 있던 큰 호수에 들어가 코만 밖으로 내놓은 채 숨었다. 그때 소르칸 시라와 아들 칠라우칸의 천막이 근처에 있었고 소르칸 시라는 칭기스 칸에게 머리를 물속에 더 집어넣으라고 눈치를 주기도 했다. 소르칸 시라는 밤에 칭기스 칸을 물에서 꺼내 형틀을 벗기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양털 속에 그를 숨긴 뒤 다음날 암말 한 마리와 활과 화살 등을 챙겨주었다. 소르칸 시라의 아들 칠라우칸은 이런 인연으로 칭기스 칸에게로 오게 된다.


28년 간의 고난기를 보낸 칭기스 칸. AI 생성. 타이치우드->타이치우트의 오기.

안다(의형제)였던 자무카와의 패권 다툼


이 바카라에서는 자무카 세첸과 칭기스 칸의 관계가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칭기스 칸이 제국을 세우는 데 큰 경쟁자는 자무카였다. 둘은 어릴 적 ‘안다(의형제)’를 맺은 사이이다. 아내 보르테가 메르키트 부족에게 납치당했을 때 테무진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들은 세 차례에 걸쳐 중요한 전투를 치렀으며 1190년경의 코로칸 전투, 1201 혹은 1202년의 쿠이텐 (표에서는 코이텐 표기) 전투, 1204년의 차키르마우트 전투다. 결국 자무카는 칭기스 칸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죽게 되고 칭기스 칸은 자무카와의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몽골 초원 패권을 장악하는데 큰 동력을 얻게 된다.


(**이 바카라에서는 쿠이텐 전투 이후 칭기스 칸이 70개의 가마솥에 불을 붙여 포로들을 거기에 넣어 끓이라고 명령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적으로는 자무카가 그렇게 명령했으며 이로 인해 자무카의 잔인함에 질린 다른 많은 부족들이 칭기스 칸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카타킨과 살지우트 부족은 타이치우트 사람들 소식을 듣고 두르벤, 타타르, 쿵크라트 등의 부족과 연합했다. 이들은 연합 서약의식을 했는데 준마와 황소, 숫양, 수캐를 칼로 도살하고 “오, 하늘과 땅의 주여! 우리가 이렇게 서약하는 것을 들으소서! 이것들은 동물의 근본인 수컷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고 약속을 어긴다면 바로 이 동물들처럼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쿵크라트 부족의 데에 세첸이 이 사실을 은밀히 칭기스 칸에게 알렸고 칭기스 칸은 부이르 나우르에서 이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했다.


쿵크라트 부족은 원래 칭기스 칸에게 복속하려 했으나 주치 카사르가 쿵크라트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이 생겼고 이로 인해 쿵크라트 사람들은 칭기스 칸에게 불신을 가지게 됐다. 닭해인 1201년 쿵크라트는 자무카에게 의지했다. 자무카는 이 해에 이키레스 , 코룰라스, 두르벤, 카타킨, 살지우트 등의 부족들 사이에서 군주 ‘구르 칸’으로 추대된다. 자무카는 여기서 바로 칭기스 칸 공격 계획을 세웠는데 이 소식은 곧바로 칭기스 칸에게 알려졌고 칭기스 칸은 코로칸에서 자무카에게 승리했다. 쿵크라트 부족은 칭기스 칸에게 복속했다.


자무카 세첸의 친족 테구 다차르가 칭기스 칸 목지 사리 케헤르 부근으로 말을 훔치러 왔다가 잘라이르 부족 이자 칭기스칸 부하 타르말라의 말을 훔쳤다. 타르말라는 이를 발견하고 활로 쏘아 살해했는데 친족의 죽음에 분노한 자무카가 타이치우트 지파와 연맹하고 이키레스, 코룰라스와도 연맹해 칭기스 칸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칭기스 칸은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 나기도 했다. 타이치우트가 3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3개의 쿠리엔(1000여 가호가 둥글게 원형으로 둔영을 친 모습을 '바퀴'를 뜻하는 쿠리엔으로 불렀다)을 꾸려 집결해 타이치우트 군대를 격파했다.

1201년 코이텐 전투. AI 생성 이미지.

칭기스 칸에게는 서서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칭기스 칸은 다른 부족과 함께 사냥을 하게 되면 더 많은 사냥감을 나눠주곤 했다. 타이치우트에 속해있던 부족들은 하나 둘 칭기스 칸에게 복속했다. 카타킨과 살지우트 부족은 타이치우트 사람들 소식을 듣고 두르벤, 타타르, 쿵크라트 등의 부족과 연합했다. 이들은 연합 서약의식을 했는데 준마와 황소, 숫양, 수캐를 칼로 도살하고 “오, 하늘과 땅의 주여! 우리가 이렇게 서약하는 것을 들으소서! 이것들은 동물의 근본인 수컷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고 약속을 어긴다면 바로 이 동물들처럼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쿵크라트 부족의 데에 세첸이 이 사실을 은밀히 칭기스 칸에게 알렸고 칭기스 칸은 부이르 나우르에서 이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했다.


칭기스 칸에게는 거의 500명의 부인과 후궁들이 있었다. 첫째 부인 부르테 푸진은 네 아들과 다섯 딸을 두었다. 큰 아들은 주치로 부르테가 메르키트 부족에게 잡혀갔을 때 임신했던 상태였고 칭기스 칸에게 돌아오는 도중 길에서 낳았다. 둘째 아들은 차가다이, 셋째 아들은 우구데이, 넷째 아들은 톨루이다.


첫째 아들 주치는 킵착 초원에 있는 모든 군주와 왕자들의 조상이 되었고 차가다이는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얻는다. 셋째 아들 우구데이는 칭기스 칸 사후 ‘카안’, 황제가 되어 13년간 보위에 있었다. 구육 칸이 그의 아들이다. 넷째 아들 톨루이는 아버지 칭기스 칸이 ‘벗’이라고 부를 정도로 사랑했고 아들로는 뭉케,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 부케가 있었다. ‘톨루이’는 원래 몽골어로 ‘거울’이라는 뜻인데 톨루이의 사망 이후 몽골에서 거울을 이 단어대신 튀르크어 ‘쿠즈구’라고 불렀다.


‘세습된 애정’ 옹 칸과의 관계


칭기스 칸의 부친 이수게이와 케레이트 부족 옹 칸은 서로 이웃한 곳에 살면서 오래전부터 화목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수게이는 옹 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돕고 나락에 빠졌을 때 구해주었다. 그들은 서로를 의형제라고 불렀고, “애정은 세습된다”라는 속담처럼 칭기스 칸도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칭기스 칸과 옹 칸도 서로를 어려움에서 구해주고 쿠이엔 전투에서는 연합해서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 대척점에 서게 된다.


1199년 옹 칸은 칭기스 칸과 함께 나이만족의 부이룩 칸을 치기 위해 출정했다. 나이만 지방 바이타락 벨치레라는 곳에서 전투를 벌이던 둘은 어느 날 밤 동이 트면 전투를 재개하기로 약속하고 잠을 잤다. 근데 옹 칸은 자신이 주둔하는 군대에 횃불을 밝혀놓은 채 밤중에 산 너머로 철수해 버렸고 상대편에서 군대와 영지를 되찾는 사건이 발생했고 칭기스 칸은 자신을 버리고 혼자 도망친 옹 칸에게 분노했지만 그해 옹칸이 어려움에 처하자 도와주었다.


1201년 쿠(코)이텐 전투에서 옹 칸과 칭기스 칸은 함께 싸워 성과를 냈지만 1203년 옹 칸의 아들 셍군은 칭기스 칸을 붙잡을 계획을 세우고 칭기스 칸이 이전에 요청한 자신의 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 차우르 베키의 혼인을 수락한다는 뜻을 거짓으로 알렸다. 이에 칭기스 칸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옹 칸에게 향했는데 도중에 옹 칸의 계획을 우연히 알게 된다. 이에 칭기스 칸과 옹 칸의 군대는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칭기스 칸은 수세에 몰렸는데 셍군의 얼굴에 화살이 박히면서 케레이트는 공격을 멈췄다.


”수레는 두 바퀴 중 하나가 부서지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만일 수레를 끄는 소가 병들었다고 해서 수레꾼이 소를 수레에서 풀어놓으면 도둑이 그것을 훔쳐갈 것입니다. 만일 풀어놓지 않고 수레에 그대로 매놓으면 그 소는 죽을 것입니다. 만일 수레의 두 바퀴 가운데 하나가 부서지면 소가 그것을 끌려고 해도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바퀴가 부서진 수레를 언덕 위로 억지로 끌고 올라간다면 소의 목에서 상처가 생기고, 그래서 날뛰다가 힘이 빠져 쇠잔해 질 것입니다. 내가 바로 당신 수레의 바퀴였습니다. “

칭기스 칸은 옹 칸에게 이렇게 절절한 표현까지 써서 자신이 베풀었던 일곱 가지 은혜를 상기시키며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으나 옹 칸은 아들 셍군의 입장 뒤에 숨었다. 셍군은 칭기스 칸을 굴복시키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다리타이 옷치긴과 바아린족 일부, 케레이트 부족의 지파 사카이트, 눈친 부족 등은 칭기스 칸에게 귀순했다.


1203년 여름 칭기스 칸은 옹 칸 부대를 공격해 옹 칸을 격파하고 케레이트 군대와 왕국을 빼앗았다. 옹 칸은 셍군과 함께 도망쳤다. “내가 이 모든 역경, 재난, 비탄, 고통, 방황, 절망을 겪은 것은 얼굴을 부은 녀석(아들)때문이다.”며 한탄했다. 옹 칸은 나이만의 지방에 이르렀는데 나이만의 장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1204년 나이만의 군주 타양 칸은 “지상에 어떻게 두 사람의 군주가 한 왕국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옹구트족 군주 알라쿠시 티긴 쿠리에게 연합해 칭기스 칸을 공격하자고 제안했지만 알라쿠시는 칭기스 칸에게 복속하며 상황을 알렸다. 칭기스 칸은 이들을 먼저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이 전투에서 두르벤, 타타르, 카타킨, 살지우트 부족들이 칭기스 칸에게 귀순했다. 메르키트 족은 전투할 생각이 없다며 복속하는 듯했다가 칭기스 칸이 출정한 사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칭기스 칸의 즉위


1206년 호랑이 해 초봄 칭기스 칸은 ‘아홉 개의 다리를 지닌 흰 깃발’을 세우고 쿠릴타이를 열고 축복을 받으며 보좌에 앉았다. 콩코탄 출신 뭉릭 에치게의 아들이자 ‘텝 텡그리’라고 불리던 무당 쿠케추가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를 정했다. ‘칭’은 강하고 단단하다는 뜻이며 ‘칭기스’는 그 복수형이다.


칭기스 칸은 금나라 원정에 나선다. 여러 도시를 함락해 나가던 칭기스 칸은 닭해인 1213년 알탄 칸 (중국 황제)가 있던 중두 교외에 진을 쳤다. 알탄 칸은 자신의 딸 공주 카툰을 칭기스 칸에게 보냈고 칭기스 칸은 복속을 받아들이고 몽골로 돌아갔다. 하지만 넉 달 뒤 알탄 칸은 남깅(남경)으로 도읍을 옮겨버렸다.


1217년에는 반란을 꾀한 메르키트족을 격파하고 메르키트족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같은 해 투마트족이 반란을 꾀하자 칭기스 칸 대신 보로굴을 보내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보로굴은 전사했다. 칭기스 칸은 “그가 남긴 사람들은 내게 마치 간장(肝臟)과 같이 소중하다. 슬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내가 돌볼 것이다”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나이만의 왕자 쿠출룩


나이만의 쿠출룩은 몇 차례 도주해서 거란 군주 구르 칸에게로 갔다. 구르 칸의 오르도에 도착했을 때 큰 부인 구르베수가 그를 좋게 여겨서 쿵쿠라는 딸과 혼인시켰다. 이 딸은 몽골 여인들이 쓰는 보그탁 모자 대신 키타이 관습에 따라 니크세를 썼고 쿠출룩에게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를 믿으라고 강요했다. 구르 칸은 중앙아시아 많은 지방을 지배했다. 하지만 구르 칸은 과도한 세금으로 그 위세가 흔들렸다. 쿠출룩은 구르 칸을 배반하기로 마음먹고 구르 칸에게 자신의 옛 군대와 부민들을 찾아가겠다고 한다. 쿠출룩은 자신의 군대를 모아 구르 칸 고장과 지역까지 공격한다. 심지어 술탄 무함마드와 협약을 맺어 구르 칸을 협공하기에 이른다. 구르 칸을 덮이고 잡아서는 또 경의를 표했고 이런 기만으로 구르 칸이 지배하던 투르키스탄 왕국 전부와 군주의 지위를 장악했다. 불교로 개종한 그는 무슬림들이 사는 지방으로 군대를 보내 곡물을 먹어치우고 불태우는 등 학정을 일삼았고 결국 칭기스 칸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오트라르 학살 사건


칭기스 칸의 정복 전쟁에 불을 붙인 사건이 있었다. 몽골이 호라즘으로 보낸 사신단이 오트라르에서 학살당한 것이다. 칭기스칸은 1219~1225까지 7년간 신흥 대국 호라즘과 전쟁을 벌인 끝에 호라즘을 멸망시켰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많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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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 세계인형박물관(www.worlddoll.net) 학예사 / <인형의 시간들(바다 출판사 발행)> 저자 /<갖고 싶은 세계의 인형(바다출판사 발행)> 공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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